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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생각 / 국경을 넘는 일 / 사형(私刑) / 환희 / 해설(서영인) /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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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숲」은 성대모사로 사람을 웃기는 ‘개그맨’이 중심인물이다. ‘말의 묘미’를 좇는 이 인물은 작가의 분신일 듯싶은데, 개그맨이 소재를 찾아 시골 외딴 골짜기로 들어가는 흥미로운 설정 속에서 환각을 담은 마술적 상상력이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펼쳐진다. 개그맨은 ‘이야기를 줍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고, 시골 노인들은 풍성한 은유와 비유로 가득 찬, 그 고장의 생태와 내력을 들려준다. 산골 노인들의 이야기는 풍 맞은 다리로 마을을 걷는 노인과 개울에서 요강을 씻는 할머니의 환영으로 개그맨의 눈앞에 나타난다. 문학평론가 김화영은 “감칠맛나는 문체로 작가의 노련한 기량을 느끼게 하는 고전적 수작이다. 한번 읽고 나면 그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연이 생각」은 평범했으나 “좀 독했던” 친구에 대한 짤막한 전기형식을 띠고 있다. 주인공 ‘나’는 1993년 어름, 친구 ‘연이’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괴로움을 느낀다. 연이는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고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대학을 오가야 했고, 프락치로 몰렸던 정보장교와의 연애로 곤란한 소문에 휩싸이기도 한 친구다. 이런 연이가 학교 연못에 투신하여 자살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의 암담함 때문이거나 쉽게 매듭지어지지 않는 청춘의 고민 때문이었을까? 연이의 죽음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느 젊은이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투쟁의 시대, 학우들의 죽음이 이어졌던 시대를 반추한다. 서영인이 지적하듯 전성태는 “시대를 비통해만 하면서 짐짓 우리가 마주쳐야 할 현재로부터 도피한 것”은 아닌지 아픈 질문을 던지며 한 “평범한 죽음을 통해,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진 시대 속으로 더 깊숙이 진입하기 위하여” 천착한다. 「퇴역레슬러」는 전라도 섬마을 출신의 한 퇴역 레슬러의 고향방문기이다. ‘가장 조선놈다운 기술’인 박치기로 일본 레슬링계에 군림했던 왕년의 레슬러가 늙고 병들어 고향에서 노후를 보낸다. 고향사람들은 그의 기념관도 만들고 그를 고향 마을의 대소사에 초청하지만 고향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레슬러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뇌손상’으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며 과거의 기억에 혼란스러워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후각과 같은 원초적인 감각조차 혼돈스러운 레슬러의 마음속에는 그가 굳이 잊고자 한 모종의 기억이 있다. 레슬러는 좌우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던 전쟁 시기에 동료들을 밀고했고, 주체할 수 없는 성욕으로 이웃 처녀를 능욕했다. 그러고는 일본으로 밀항해서 레슬링의 영웅이 되었다. 작가는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능란하게 깔아놓으며 역사에 억압당한 불행한 한 개인을 뭉클하게 그려낸다. 「한국의 그림」은 걸개그림의 개척자 김대호의 이야기이다. 어려서부터 칼로 조각하기를 좋아했던 김대호는 신문배달원과 식당종업원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목수를 만나 집 짓는 일을 배우고 억울하게 피살된 대학생의 얼굴을 판자에 새길 기회를 갖았다. 그리고 그 대학생의 얼굴이 판화가 되어 대학가로 퍼져나가고 더 크게 벽에 걸려 ‘걸개그림’이 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그의 걸개그림은 칼로 무언가를 조각하기를 좋아했던 그가 목수일을 하듯 대학생의 억울한 죽음을 몸으로 그리고 새긴 것이다. 시대의 분노가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가운데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개인이었던 김대호의 삶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국경을 넘는 일」에는 국경을 넘으며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는 인물 ‘박’이 등장한다. 바다나 철조망을 건너야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분단국가의 사람에게 국경을 지나 걷는 일은 여행중의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기이한 체험이자 부담이다. 단지 국경을 넘는 일에서만 그런 불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박은 동독출신의 얀과 얘기할 때는 분단국가의 일원으로 그와 마주하는 느낌을 갖았고, 일본 여인 나오꼬와 만남을 통해 낯선 불안을 감지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다가온 불안과 착잡한 심정을 다스려야 하는 박의 행로를 나직한 목소리로 그려가는 데서 작가의 차분한 힘이 느껴진다. 긴 장마가 누그러진 어느날, 한 소년이 마을 강둑에서 소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오면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소를 줍다」는 질박하고 아름다운 토속적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전성태는 요즘 작가로서는 흔치 않게 『우리 동네』의 이문구나 「봄봄」의 김유정이 연상될 만큼 해학과 풍자가 두드러진 문체를 빼어나게 구사하고 토속적인 삶에 뿌리박은 표현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최근 많은 소설들이 날로 ‘독백적’이 되어가는 상황에 비추어볼 때 「소를 줍다」에 등장하는 생동감 넘치는 묘사는 주목할 만하다. 어린 딸과 술에 취해 농약을 먹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아비의 절망적인 상황을 그려낸 「환희」, 황폐와 파멸의 악몽 속에 살아가는 퇴역장군의 삶을 담은 「사형」 역시 흥미로운 작품이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 개인이 부지불식간에 아득한 환각에 빠지게 되고 끔직한 죄를 짓게 되는지를 독특한 개성으로 형상화하여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작가 특유의 리얼리즘이 빛을 발하는 이번 소설집이 독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