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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바르게 말한다면 시작당하는 것이다. 교회를 시작하거나 시작당하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이것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배부름으로 시작하는가? 배부르기 위하여 시작하는가?” “배부름의 넘침이 흐르게 하려는가? 결핍을 채워 배부르려 갈망하는가?” 배부름에 대한 부정적 어감이 염려되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왜 거의 항상 결핍에서 시작하려 하는지를 묻고 싶었다. _p 019 우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을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이라 말하면서도,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일을 하려는 쪽으로 변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용받는 대신 하나님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기대하는 것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그 명찰의 권리로 하나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것을 신앙이라 부르는 허위가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을, 조금이라도 예민한 영혼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_p 20 그리하여 나는 마스터플랜이 없는 교회, 수식어가 없는 교회를 향하려 한다. 과거에 대한 치유행위로서의 오늘, 미래의 현재적 경험으로서의 오늘, 단지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오늘, 그리하여 오늘이 전부인 오늘을 사는 교회, 예측할 수 없는 교회,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을 위해 깨뜨려지는 교회를 그리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그림이고 꿈이고 어쩌면 환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된다. 단지, 그 희망을 품고 걷고 싶다. _p 026 교회는 내가 그려가는 그림이 아니다. 하나님의 그림이다. 내 그림에는 언제나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망과 시대적 편견이 가득하여 겉은 주님의 몸이나 속은 욕망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잡동사니들로 채워진다. 내 그림은 자기주장과 욕망과 겸손해 보이는 비전들이 묘하게 결합된 형태의 이상한 그림이다. _p 034 교회는 끝없는 소통일 뿐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인 성도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소통, 머리를 향한 질문과 머리에서 오는 대답, 그리고 그 대답에 답하는 적합한 행동을 통해 생각지 못했던 창조주의 길을 걷는 것이다. _p 064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이상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반사하는 거울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지향해야 하는 것인 반면, 우리 현실이 리더의 얼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면, 실제로 교회의 얼굴은 리더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얼마나 향하고 있느냐에 의해 그 모습을 형성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_ 092 교회도 틀림없이 나이를 먹는다. 손발에는 힘이 빠지고 눈은 희미해지는 중이나, 옛 시절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과 회복을 향한 열정은 깊이 간직하고 있다.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살게 되듯, 나이 든 교회는 옛것에 대한 추억 혹은 집착을 오늘을 견디는 힘으로 삼는다. _p 109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온 것은 수면장애 때문이었다. 수면장애는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분노가 일어난 것은 그들이 내가 마땅히 기대하고 생각하는 만큼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인정해 주어야만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이끄심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어찌하여 버림받고 학대받고 멸시받고 모함당하신 예수보다 더 나은 대접을 갈망해왔던가? _p 122 나는 교회를 무엇이라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선언이 아닌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세상이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요즘 과연 어떤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는 말인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자기 몸을 깨뜨림으로 생명을 낳을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깨뜨려지려는 교회는 왜 그토록 손꼽을 만큼 미미할 뿐인가? 나에게는 과연 자신을 깨뜨리는 교회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_p129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수는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셨지만 이 땅에서 여전히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남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교회가 과연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가? 세상이 교회를 통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세상에게 물어야 하겠지만, 우리도 눈치껏 알고 있다. _p151 무엇보다 성도들은 목사의 목회적 전문성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목사는 ‘성도’로 존재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출발점에 서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과의 친밀성이라는 주제에서 성도들에 대하여 상대적인 우월성이 자동적으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성도들이 영성과 영적 자각 능력과 신앙적 실천의 모든 면에서 대등한 동역자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_p 183 그리스도는 자기주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바벨의 영으로 가득한 이 땅, 참 생명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땅에 생명을 창조하고 낳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 그가 생명을 낳으시는 방식은 자신의 몸을 깨뜨리시는 거였다. 결코 깨뜨려지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려고 끌어 모으고 움켜쥠으로 도무지 생명을 낳을 수 없는 바벨의 세상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깨뜨려짐의 방식으로 생명을 낳으려 하셨다. _p 212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를 배운다. 한 마디로 그들은 복음을 배우지 않고 나의 행함 여부가 결정하는 인생의 규칙을 배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보다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보게 만든다. … 결과적으로 우리 자녀들은 다만 하나님을 잘 사용하는 법을 주입받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_p 248 세상을 향한 교회의 얼굴과 세상의 질문에 대한 교회의 대답은 보수 혹은 진보의 정치적 구호와 습관을 좇는 대신 언제나 복음적이어야 한다. 인접한 이웃과 교회의 관계는 언제나 복음적이어야 한다.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훈계는 언제나 복음적이어야 한다. 부모는 틀림없이 윤리강령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했지만, 놀랍게도 자녀들은 복음을 통해서 변할 거라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끝없이 윤리강령과 도리와 율법을 나열한다. 그 바탕에는 두려운 미래를 보장받고자 하는 탐욕이 자리한다. _p 252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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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산교회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려 했던 당회 서기장로를 향해, 부교역자의 정체도 잊은 채 맞장뜨며 언성을 높였던 사건이 부끄럽다. 벌써 15년도 지난 일이건만, 보잘것없으면서도 공의의 명분을 빌어 존재를 입증하려 했던 그 시간이 내 가치추구의 본질을 보여주는 게 분명함으로 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전의 모든 시간은 그 사건에서 드러난 나의 실체보다 하찮았다. 무용한 존재로 끝나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 초조하였다. 설교와 목회의 모든 형태를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입증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더 나아가, 그보다 이전의 모든 시간은 그 모든 어두운 열망에 붙어 있는 육욕적 탐심에 불이 붙은 세월이었다.
야심 이전에는 흑심이 지배했다. 흑심 위에 얹힌 야심으로 오랜 세월 황폐하였다. 계산적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되, 그건 들키지 않은 채 개혁적인 이슈에 대해선 관심있는 듯 행하려 했다. 예민한 이들은 나의 비열을 놓치지 않았으리라. 그리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작은 책은 교회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고백에 관한 것이다. 쓰레기장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의아함으로 가득한 예수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모두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듯한 그 질문에, 나를 불러 그가 되게 하신 신비함에 대하여 대답하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죽고 그가 살면’이 편하고 고마운 현실적 주제가 되어 내 안에서 뿌리 내리기 시작한 것도 말하고 싶었다. 지금 나에게 그보다 더한 ‘생생한 현실’은 없는 게 분명하다. 나는 여전히 내 무엇을 자극하는 흑심과 야심의 급한 방문을 수시로 받고 있지만, 다만 그것과 깊이 대화하는 시간은 조금씩 줄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불러 그의 몸이 되게 하시고 ‘교회’라 하셨다. 교회는 ‘그의 몸’이며 동시에 ‘우리’라고 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 모임에서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너’가 바로 ‘나’라고 절규할 수 있듯이, 우리 각자는 ‘그 모임’이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나를 불러 그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동적으로 내가 곧 교회라 주장하는 것은 어감이 이상할지 모르나, 그리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종종 교회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성도에게 “당신이 말하는 교회의 실체가 대체 뭐냐?”고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그가 곧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나를 불러 교회가 되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내가 교회에 속한 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원에 잇닿은 시간을 흐르고 무한에 담긴 공간을 사는 교회의 이상한 형식이 가장 치열한 현실로 와닿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영원과 무한을 향한 확고한 미소로 사선을 넘는 수많은 성도들의 영광에 참여하면서, 죽음을 이미 넘어간 자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버겁고 엄연한 현실이라는 사실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수년 전 월간목회로부터 예수향남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분수를 모른 채 개척 5년 차 교회 이야기를 적어가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예수향남교회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불러 교회가 되게 하시는 과정에 대한 놀라움과 그 한 사람의 지독한 연약함이 어떻게 거룩한 교회의 본질에 맞닿아가게 하시는지를 적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겸손하고 부끄럽게 말해야 하지만, 모든 감시자를 잊은 듯 담대하고 감격스럽게 ‘나는 교회다’를 읊조리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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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이어지는 끝없는 소통의 사건이라는 관점은 다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확장에 마음을 쏟으려는 분들에게 필독서로 추천합니다. - 김인중 (안산동산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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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몸부림으로 인하여 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말에서 눈물이 솟구친다. 몸을 세우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리운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을 만났다. - 김병년 (다드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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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대답해가는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는 목회 지침서로, 평신도들에게는 교회 생활의 안내서로 읽혀야 할 역작이다. - 심창섭 (전 총신대신대원 원장 겸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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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했음에도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한 아픔을 철저한 자기 성찰과 처절한 씨름을 통해 큰 은총의 기회로 받아들인 그의 목회경험담은 너무도 귀합니다. - 신국원 (전 총신대학교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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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나서 온통 구정물이 되어버린 교계에 절망하기보다, 소량의 생수를 흘려보내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 중 한 사람을 만나는 기쁨과 감사로 추천사를 쓴다. - 정민영 (전 국제위클리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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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는 자가 아니라 목회를 당하는 자로서, 교회의 중심축이 주님이라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교리를 이론보다 실제로 경험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 박성 (필라델피아 기쁨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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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목회의 길이려니’ 하면서 성찰 없이 달려가던 나를 멈춰 세우고 반성하게 한다. 그의 생각은 시종일관 그의 세계로 나를 깊이 빨아들인다. 한번 손에 들었는데 놓을 수가 없었다.
- 이인호 (더사랑의교회 담임목사, CTCK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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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알고 고뇌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충분하심을 알고 소망하는 목회자의 복음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신뢰를 회복시켜주는 책이 너무 반갑습니다. - 노진산 (LFCC 담임목사, CTC Korea Cat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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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삶이 형성되어온 한 목회자의 신선한 교회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추구하는 힘과 인정욕구에 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 스티븐 엄 (시티라이프장로교회 담임목사, CTC 협력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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