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롤로그
해나 내부고발자 콜센터 낙인 ‘A’ 의자 뺏기 놀이 작가의 말 |
김유철의 다른 상품
|
해나는 멍하니 서서 함박눈이 내리는 저수지를 바라봤다. 저수지의 표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송이는 저수지 경계면에 부딪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해나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춥지 않을 거야.” 해나는 습관처럼 주먹을 꼭 쥐었다. “춥지 않을 거야. 용기 내, 해나야.” --- p.10~11 “아닙니다. 재판장님,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사항은 피해자의 자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속한 부서에서 석 달 전에도 비슷한 자살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은 천천히 방청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해자가 근무했던 KC콜센터 해지방어팀에서만 지난 2년간 70여 명에 가까운 직원이 퇴사를 했고, 그중 서른두 명이 정신과 상담을 받았습니다. 3개월 전에는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해지방어팀 팀장이 자살했으며, 올해 또다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 p.71 “그러고 보니…… 해나가 실종되기 일주일 전쯤, 제게 전화한 적이 있어요……. 그냥 안부 전화라고 했지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어요.” “무슨 소리죠?” “이상한 이야길 들었거든요.” 김뿐만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의 시선도 모두 윤정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런 상황이 부담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어떤 이야길 들었는데요?” “알파벳 ‘에이’에 대해서요.” “알파벳 ‘에이’?” “네. 호손의 『주홍 글씨』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처럼 자신에게도 ‘A’라는 꼬리표가 달린 것 같다고 했어요.” --- p.84 조 변호사를 찾아가는 동안 김은 한 번 더 젊은 검사의 말을 되씹어봤다. 해나와 팀장의 관계부터 소송 준비 중인 사건, 그리고 보호해야 할 증인에 대한 의도된 노출. 김이 평소에 알고 있던 조 변호사의 모습과는 다른 이질적인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김을 당황하게 만든 건 조 변호사의 반응이었다. 전화상으로 그런 질문들을 던졌을 때 조 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다. --- p.103 “회사에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해나가 대답했다. 그러나 윤철은 누나의 표정에서 뭔가 어두운 느낌을 받았다. “나한테까지 숨길 필욘 없잖아.” “숨기는 거 없어.” “너무 노력하지 말라는 말은 그럼…….” “누가 그랬어. 자기 분수를 잘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랑 같은 말이잖아. 근데 난 그런 말 들으면 화가 나.” 윤철이 말했다. “왜?” 이번엔 해나가 질문을 던졌다. “누구나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잖아.” “그런 꿈들이 널 아프게 할지도 몰라.” --- p.160~161 업무 때문인지 팀장은 새벽까지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날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해나에게 문자나 톡을 보내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갑자기 보고 싶네’라는 작업성 멘트에서부터 ‘오늘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힘내고’ 같은 직장 상사로서 보내는 평범한 내용까지 다양했다. 때문에 해나는 오늘 새벽에 온 팀장의 문자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해나는 대변기 뚜껑을 닫고 그 위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휴대폰 화면만 내려다봤다. 팀장이 보낸 메시지를 여러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 p.175~176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좀 전에 너네 팀장님하고도 통화를 했으니까……. 월요일에는 꼭 출근하는 거야.” “그래도 다니기 싫다면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할 거다. 그리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말할 거야.” 해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나는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한 번만이라도……,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어볼 수는 없으세요? 전……,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헛구역질이 나고 손발이 떨린단 말예요.” --- p.207 김은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조 변호사의 전화번호로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문득 김은 해나의 휴대폰이 발견되었던 저수지 근처로 시선을 돌렸다. 햇볕이 내리쬐는 저수지의 물결은 잔잔하게 흔들리면서 옅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물과 경계를 이루는 바닥에도 푸른 새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저기에 서서 해나는 마지막으로 재석에게 문자를 보냈을 것이다. --- p.227 |
|
김 변호사(이하 ‘김 변’)는 어느 날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후배 조 변호사(이하 ‘조 변’)와 오랜만에 만난다. 갑작스럽게 김 변을 찾아온 그녀는 암 투병 소식과 함께 사건 하나를 건넨다. 공익근무 중인 재석을 변호해야 하는데 피해자는 다름 아닌 저수지에서 익사하여 죽은 여고생 해나. 조 변은 피해자의 죽음이 반은 본인의 책임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암 수술 때문에 할 수 없는 변호를 김 변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돈이 되지 않는 형사사건이지만 김 변은 20년간 알아온 후배의 첫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김 변은 재석을 만나 해나와의 관계를 알게 되고, 사건이 벌어진 저수지와 근처 모텔, 식당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사건을 검찰이 무리하게 강간 및 살인치사 혐의로 재석을 몰아붙이는 이유가 궁금하여 조 변에게 알아낸 것은 해나의 죽음이 대그룹 KC의 계열사와 관계되었다는 것과 그녀보다 먼저 자살한 팀장이 있다는 사실이다. 해나를 둘러싼 배경을 하나둘 조사해나가던 김 변은 첫 재판에서 해나의 자살 이유를 수치심이 아닌 대기업 횡포와 관련된 문제로 옮겨가며 재석을 변호하기 시작하는데……. |
|
“누구나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거잖아.”
“그런 꿈들이 널 아프게 할지도 몰라.”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한 여고생의 시신이 저주지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같이 밤을 보낸 학교 선배 ‘재석’이 해나를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혐의로 구속된다. 대학 후배이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조 변호사’의 부탁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된 ‘김’(김 변호사)은 단순한 남녀 사이의 문제가 아님을 직감하고, 사건에 감춰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해나의 가족, 친구, 학교, 직장 동료 들을 만나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항상 밝게 생활하던 해나가 현장실습을 나갔던 콜센터 해지방어팀의 과도한 실적 압박과 비정상적인 업무량, 비인격적인 대우로 고통스러워했고, 그것이 해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둘 실습생이라면, 그들을 이용해 해지방어팀을 꾸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그 제안은 데스크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었고, 재작년 가을부터 실습생들을 현장에 투입하게 되었던 거죠.”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온 거군요.” “네. 놀라운 일이 벌어졌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에겐 엄청난 에너지가 있었어요. 그들은 콜센터의 베테랑 직원들보다 높은 방어율을 유지했거든요. 지속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지만…….” _113쪽 한국 사회의 변하지 않는 시스템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려낸 색다른 사회파 미스터리! 죽음에 이르기 전, 해나는 현장실습의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찾아갔던 담임에게서 “불경기에 그런 대기업 하나 뚫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31쪽), “졸업할 때까지 무조건 버텨라”(29쪽)라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화장실을 갔다 오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할 만큼 콜 수에 대한 압박”을 받고 “욕설과 함께 무작정 화부터 내는 사람”(80쪽)들을 매일매일 상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가까운 일을 감당해내야 하면서도 회사나 학교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콜24』는 현장실습생 제도가 가지고 있는 여러 폐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IMF가 터지고 그동안 누렸던 경제 호황이 거품처럼 사라지면서, 경제위기의 두려움 속에서 현장실습생 제도는 임금 부담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매스컴에서는 ‘고졸 신화’ ‘학력 파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정작 학생들은 아무런 사회적 보호망조차 마련되지 않는 현장으로 내몰려야 했다. 『콜24』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함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희생자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연결고리. 작가는 그 변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에 정면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선배, 의자 뺏기 놀이 알죠?” “물론.” “그 놀이에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 없어요. 의자를 차지하기 위해선 진보도 보수도 의미가 없거든요. 오로지 생존만이 존재하죠. 제가 공단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바로 그런 거예요. 시스템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절박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눈앞의 이익에만 신경 쓰게 만들 수 있어요. 의자 뺏기 놀이처럼요.” 220~22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