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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시와 출세의 역사
2. 선거, 참정권이 걸어온 길 3. 사회주의와 반공주의의 한 세기 4. 총독관저에 드나든 조선인들 5. 역대 대통령의 '역사'점수 6. 민족 지도자들의 초상 7. 일본인 망언의 뿌리 8. 서양인이 본 한국과 한국인 9. 됫박과 잣대의 역사 10. 땅,투기의 대상인가 삶의 터전인가 11. 외자로 흥하는가 망하는가 12. 보릿고개를 넘어서 13. 땅을 지킨 사람들 14. 바다에서 찾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 15. 장돌뱅이에서 세일즈맨까지 |
The Organization of Korean Historians,韓國歷史硏究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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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1952년 미국의 알선으로 단절된 국교를 열기 위한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10월에는 제3차 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다가 한국측의 피해 배상 요구에 대해 “일본도 철도와 항구를 건설하고 농지를 조성해주었으며 대장성은 많은 해에는 2천만 엔까지 주었다.
그래서 그것은 상쇄되었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1951년 미일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망언을 늘어놓아 회담이 결렬되었다. 이것이 망언의원형이라 불리는 '구보다망언'의 골자이다. 그 이후 망언은 연례 정치행사처럼 계속되어 한국, 중국 등의 이웃 나라로부터 거센 항의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망언을 발설한 자들은 망령된 자이기는커녕 오히려 애국자 대접을 받고 있다. 1995년은 일제가 패전한 뒤 50주년, 한민족이 해방되고 나서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두 나라는 떠들썩하게 기념행사를 치렀다. 일본에서는 일부 진보적인 인사를 중심으로 전쟁 책임을 묻고 과거의 침략행위를 반성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 우익적 세력을 중심으로 '과거역사의 재해석'이라는 미명하에 침략과 전쟁을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은 현재의 역사서술과 인식은 전쟁에 졌기 때문에 생긴 '자학사관'으로써 연합군측(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거나 유물사관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사관이라고도 하는 이러한 반동사관은 오히려 큰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정치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당시 일본 국회에서도 전후 50주년을 현대 일본의 하나의 분기점으로 삼아 새로운 일본의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였다. 당시 수상은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회당의 당수가 맡고 있었다. 그러나 우익, 보수세력의 준동과 반발로 그것은 '과거 반성'은 커녕 침략과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평화' 운운하는 말장난으로 일관하는 '부전결의'를 채택하는 데 그쳤다. --- p.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