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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는 건축
함성호의 반反하고 반惑하는 건축 이야기
함성호
중앙북스(books) 201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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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건축, 또 다른 허구의 기호
누군가 나를 설계하고 있다.
사라진 역사와 건축
숲과 도시_수도권 신도시를 중심으로
한 시대의 신기루와 건축가의 환
광고와 건축의 이데올로기
종?산 복합체의 등장
파놉티콘_감시와 처벌의 공간

슈퍼매너리즘의 시대
몸의 공간에서, 말의 공간으로_혹은 말의 몸 입기
다시, 바로크로
건축의 미니멀리즘
건축, 문학, 자연
인간을 위한 건축은 망했다_가설 공간 속에서의 건축
한국건축은 왜 전통을 버렸는가?
슈퍼매너리즘의 시대
휘어진 공간, 휘어진 건축
건축, 그 바벨의 도서관에 대하여

저자 소개 1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했으며, 1991년 『공간』 건축평론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기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 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 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 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썼다. 현재 건축 실험 집단 ‘EON’의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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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7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36쪽 | 597g | 146*220*30mm
ISBN13
9788927803461

책 속으로

나는 이 책에서, 우리가 당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고 있는 건축이라는 공간 체험 예술이 어떤 내밀한 욕망과 사회적 담론들을 내재하고 있는지 밝혀내려 했다. 그 히스토리를 위하여 나는 건축을 ‘실재하는 건축’과 ‘다르게 실재하는 건축’을 비교하며 분석해나간다. 때로는, 나는 실재하는 건축보다 먼저 그 거울의 현실에 서 있는 건축에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체로 하나의 현실이며, 현실보다 더 절실하고 더 완벽한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축을 지배하는 사회?문화적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 거울의 현실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공간은 우리의 역사?경제?문화적 산물이며 아울러 그것의 미래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에서 모더니즘과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건축의 현대성을 ‘슈퍼매너리즘(super-mannerism)’이란 이름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말은 모든 양식들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쓰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일직선상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파괴하려고 하는 의도 또한 숨어 있다. 무엇보다도 슈퍼매너리즘이란 잡종과 혼성(hybrid)을 뜻한다. 그런 만큼 이 책에는 다양한 현실들이 공존해 있다. 어떤 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며, 어떤 것들은 미래이고, 또 어떤 것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거짓말이다. 슈퍼매너리즘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오직 ‘지금, 여기’에 대한 인식만을 따른다. 확고하지 않은 것들, 언제 변할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잡고 가는 방식이다.---「책머리에」

도시는 모든 것이 점멸의 2진법 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미 헤맴에서 오는 뜻하지 않는 발견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잠시 그 신호 체계를 잃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죽음과 직면한다. 횡단 신호보다 빨리 달려가는 사람들, 직진 신호보다 한 템포 빠르게 출발하는 자동차. 횡단보도로 뛰어드는 트럭과 손가락을 자르는 기계 톱날들. 병원에서 뒤바뀌는 아이들과 신호 체계에 미숙한 미아들. 도시는 이처럼 당신을 길들이고 조정하며 당신의 행동들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누군가 나를 설계하고 있다」

우리는 산책할 수 있는 도시의 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도시를 관통하고 있는 도로의 주변에는 끊임없는 광고의 유혹이 있을 뿐이고 한적한 교외의 거리마저 보행자를 위한 공간은 전혀 배려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자동차의 속도에 의해 느껴지는 위협만이 존재한다. 이 도시의 거리가 갖는 이데올로기는 우리로 하여금 걷지 말고 자동차 산업의 이익에 편승할 것을 강제한다. 모든 거리/도로는 이미 자동차를 위해 있다. 사람들은 한 정거장의 시내버스 구간도 걷기를 꺼려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이 도시에는 이미 걷는 자를 위한 공간의 배려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사라진 역사와 건축」

건축은 자본의 시녀이다. 그래서 도시는 정치권력의 공동묘지이다. 건축도 마찬가지지만 도시는 더더욱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다. 한 시대의 정치 지배층들은 건설의 책임은 지지만(그들의 선거 공약에는 장밋빛 도시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하다) 그 이후는 책임지지 않는다. 임기 안에, 특히 단임제인 한국에서는 더더욱 공청회 같은 적극적 의견 수렴을 가능한 줄여나가는 것이 돈과 시간과 쓸데없는 정력 낭비를 줄이는 길이다. 천민자본주의 하에서의 도시는 단연코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절대적으로 복속된다. 최고 권력자의 한마디로 도시가 버려지고 새로 생긴다. 전통도 달라진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 울리는 새벽종과 함께 새로운 길이 나 있다. 최고 권력자가 가는 길을 따라 동산에 있는 나무가 서산으로 옮겨 심어지고 북산이 남산으로 옮겨 오기도 하는 전능을 보여준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 도시 행정이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때는 위성도시라는 말 자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한 나라의 모든 편의들이 태양(?)을 위한 위성에 불과하니 말이다.---「숲과 도시」

이제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 건축은 그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어 보인다. 현대도시의 야경은 그런 빛이 만들어내는 환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신문사의 사옥들은 자신들의 헤드라인 뉴스를 전하고, 그 뉴스 중간 중간에 뉴스의 스폰서들이 밝고 명랑하게 스쳐간다. 깊은 가로의 양옆에는 이 도시를 움직이는 힘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형 광고 전광탑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그들은 ‘점-멸’하면서 다시 소생한다. 다른 모습으로, 또 반복해가면서. 그러나 그것들은 그들의 ‘점-멸’만큼이나 순간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광고는 이미지의 확장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건축적으로 구축한다. 문명이라는, 이 금방 무너져버릴 바벨탑 안에서 우리는 또 어떤 세계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가?---「광고와 건축의 이데올로기」

후기 산업사회의 상업주의는 후기 산업사회의 종교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즉 ‘종교산업’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교가 그런 식으로 신비감을 벗어던지면 마치 광고에서 환상을 벗겨내듯이 그 존립 여부가 의심받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종교건축은 기를 쓰고 높아만 간다. 부실한 판매로 미약한 자본력의 종교 주주들은 종탑만이라도 높이 세우려 애쓴다. 종교의 대자본가들의 건축은 의례히 체육관을 닮아가고, 그 안에서 신도들은 농구스타에 열광하는 여고생들처럼 복음에 열광한다.---「종?산 복합체의 등장」

건축가는, 그리고 행위자는 이미 존재하는 공간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 이루어낸다는 것은, 혹은 일구어낸다, 혹은 일으켜낸다, 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이루어낸다/일구어낸다, 라는 말은 이미 기존에 있었던 사물을 어떤 장치를 통해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공간을 인지하게 하는 구상명사---형태를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건축행위인 것이다.---「건축의 미니멀리즘」

그것은 그리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이런 과거를 가졌다고 믿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착각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런 과거를 지나온 적이 없다), 그리운 과거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그리운 과거는 오히려 미래의 시간 속에서 가능하다. 바로 하이테크(High-Tech)로, 로테크(Low-Tech)를 지향한다는 그것. 고도의 문명은 스스로의 진보를 억제한다. 진보라는 개념보다는 진화의 개념을 채택한다. ‘자절(自節)할 줄 아는 문명.’ 진화하는 사고는 앞과 뒤, 우열과 상하가 없는 무방향적인 개념이라고 할 때, 하이-테크는 자연스럽게 로-테크를 지향하게 된다.---「건축, 문학, 자연」

느슨한 스케일은 이러한 20세기 건축사의 실험에 대한 분석이고, 또 다른 실험이다. 이는 통일성에 대한 회의이고, 자연계의 비선형적인 질서, 혼돈의 질서에 대한 수용이다. 단순하고도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대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기도 하다. 따라서 느슨한 스케일의 잣대는 없다. 단지 거기에는 적응과 반응, 알 수 없는 작용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은 운동을 ‘기이한 끌개(strange attractor)’라고 부르는 과학자들의 사고방식도 재미있다. 이전의 과학에서는 ‘기이한’이라는 말은 과학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기이할뿐더러 신비하기까지 하다. 이 기이와 신비를 수용함으로써 현대과학은 자연의 비밀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이한 인식에 대한 수용이야말로 느슨한 스케일의 유일한 척도이고, 건축이 자연에 대해 질문하는 하나의 방법이고, 태도이다.---「인간을 위한 건축은 망했다」

건축 역시 그런 혼재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이브리드(hybrid)라는 말이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혼재’를 나타내는 명사형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명사형으로 쓰이고 있다는 의미는 혼재를 ‘극복한다’는 관례적 용법과 구분된다는 뜻이다. 혼재된 상태 자체가 탐구의 대상이 된다. 그 요동의 질서를 탐구하기 위해 건축은 점점 더 과학을 닮아가고, 자연의 원리가 아닌 자연의 현상계를 건축에 이식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모더니즘 이후에 오는 모든 건축적 현상들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 전제할 때, 이런 역사주의적 혼재와 현상적 혼재, 이론적 혼재의 영역 모두를 이 글에서는 ‘수퍼매너리즘’이라고 지칭해보는 것이다.

---「슈퍼매너리즘의 시대」

출판사 리뷰

시대에 반反하는 건축
공간에 반惑하는 건축
인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두 얼굴의 건축 이야기


시인이자 건축가, 건축평론가로 잘 알려진 함성호가 인문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두 얼굴의 건축 이야기 『반하는 건축』(문예중앙, 2012)을 펴냈다. 함성호의 공식 직함은 시인, 건축가, 건축평론가이다. 이밖에도 그림과 미술비평, 만화와 만화비평, 영화비평, 전시 및 공연기획자 등 세상에 없는 직업까지 들쑤시고 다니지만, 본인은 정작 ‘한 우물을 팠다’고 말한다(열심히 파다 보니 여러 ‘지층’이 나왔다는 것). 1990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1991년 건축 전문지 《공간》에 건축평론이 당선되어 건축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에는 자신의 건축 실험을 위해 일산 신도시에 소소재(素昭齋)를 직접 설계하여 지어 올렸다. 결국 “원수 같은” 집이 되어버린 소소재에서 그는 요즘도 건축설계를 하고, 시를 쓰고, 만화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

이 책은 저자가 1998년 건축 사무실을 연 이후 10여 년간 자신의 건축 이론을 무두질해가며 “칼을 갈듯이” 쓴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따라서 혼종과 잡종의 시대에 이른 오늘날 건축에 대한 저자의 진지한 비판적 분석뿐만 아니라, ‘늘 새로우며, 낯설고, 항상 전위에 있는’ ‘진정한 의미’의 건축 예술을 꿈꾸는 그의 마음결마저 이 책에는 녹아 있다.

저자는 『반하는 건축』에서 크게 ‘반(反)하다’와 '반하다[惑]’의 의미로써 두 얼굴의 건축 이야기를 풀어낸다. 첫째 ‘반(反)하는 건축’은, 건축이라는 공간 예술에 내재하고 있는 내밀한 욕망과 사회적 담론을 실재하는 건축에 빗대어 밝혀내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세종문화회관〉 등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과거양식을 차용한 건축물, 자본과 정치권력이 결탁한 신도시 개발, 환(幻)의 세계를 구축하는 광고 건축물, 하나의 기업체로 탈바꿈한 종교 건축물 등을 통해 자본과 정치권력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다르게 실재하는” 거울 현실 속의 건축 이야기를 1부 「건축, 또 다른 허구의 기호」에 담아내고 있다. 둘째 ‘반하는[惑] 건축’은, 새로운 건축의 방법과 새로운 공간의 창조에 대한 매혹을 말한다. 저자는 2부 「슈퍼매너리즘의 시대」에서 모더니즘에서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 건축을 ‘슈퍼매너리즘(잡종과 혼성hybrid의 의미)’이란 단어로 설명하며, 곳곳에 매혹적인 건축의 방법과 공간 개념을 부려놓고 있다. 아무것도 구축하지 않는 빈 것을 구축하는 ‘바로크적 미니멀’, 건축은 그저 공간을 ‘일구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공간의 이해, 한국적 미니멀니즘의 본령이라 할 ‘절제와 도저한 게으름’의 미학,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으로서의 건축, 하이테크로써 로테크로의 지향 등이 그것이다.

하나, 건축에 반反하다!
“건축은 또 다른 허구의 기호이다.”


도시는 당신은 길들이고 조정하며 당신의 행동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누군가 나를 설계하고 있다」 중에서

건축가 함성호가 말하는 ‘반(反)하는 건축’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반(反)은 당연히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책머리에」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는 이 책에서 건축에 담긴 “어떤 내밀한 욕망과 사회적 담론”을 밝혀내고 있다. 그는 실재하는 건축보다 그 거울 현실의 건축(“다르게 실재하는 건축”)을 분석해나가며, 건축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짚어나간다. 먼저 「누군가 나를 설계하고 있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램(CAD)에 의해 구조화되는 2진법적 도시 구조의 이면을 파헤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도시 설계자들이 만들어낸 현대도시는, 자본주의의 욕망에 따라 인간을 “길들이고 조정하며 인간의 행동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의 생활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도시 설계자들의 컴퓨터 시스템에 의해 설계되고 있으며, 인간은 그 불안한 시스템 속에서 떠돌고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밀리터리 멘털리티의 조악한 전통미를 보여주었던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이나, 궁궐 건축의 기둥 형태를 기괴한 스케일로 ‘뻥튀기’하여 육중한 돌로 포장한 광화문 네거리의 〈세종문화회관〉은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과거양식 차용의 좋은 예이다.
―「사라진 역사와 건축」 중에서

「사라진 역사와 건축」은 정치권력과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 건축물의 이야기이다. 제3공화국에서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 〈국립민속박물관〉, 〈세종문화회관〉, 〈롯데월드〉, 〈독립기념관〉, 〈63빌딩〉 등의 사례뿐 아니라, 민족 생활환경의 파괴와 고부갈등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킨 아파트 주거형식에 대한 분석이 펼쳐진다. 그리고 점차 심각해지는 도시화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현대도시의 도로는, 신호등과 지하도 등의 기계적 제어장치와 거리를 가득 메운 광고판 등으로 인해 점차 사람들의 도보 문화가 사라져가고 자동차만을 위한 도로가 설계되는 세태를 분석, 비판한다.

이어 일산, 평촌, 분당 등지 수도권 신도시 개발문제를 다루고 있는 「숲과 도시」, 「한 시대의 신기루와 건축가의 환」에서, 저자는 “신도시 개발은 부동산 자본주의의 이익과 취약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합작품”이라고 지적하고, 쇼핑타운으로 전락해버린 일산 신도시 등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신도시 설계의 문제점들을 밝혀내고 있다.

종교의 대자본가들의 건축은 으레 체육관을 닮아가고, 그 안에서 신도들은 농구스타에 열광하는 여고생들처럼 복음에 열광한다.
―「종?산 복합체의 등장」 중에서

「광고와 건축의 이데올로기」에는 건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선물상자로 표현한 〈뉴코아 백화점〉, 서구 중세의 성곽을 본떠 안전한 모험의 세계로 유도하는 〈롯데월드〉, 일이층을 오픈시켜 내부를 개방하는 홍대 카페 등 광고의 세계를 실현한 건축, 광고에 의해 모욕받는 건축의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종?산 복합체의 등장」에는 점차 기업화되어가는 종교와 종교 건축물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도시의 어둠 속에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붉은 네온의 십자가들은 규모의 경제 하에서 이루어지는 대리점식 판매망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파놉티콘」에서 저자는, 흔히 병원이나 학교 등의 건축물에서 보여지는 감시와 처벌의 공간으로서의 건축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다.

둘, 건축에 반惑하다!
“하이테크로 로테크를 지향하라.”


나는 이 책에서 모더니즘과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오늘에 이른 건축의 현대성을 ‘슈퍼매너리즘’이란 이름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말은 모든 양식들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쓰인다는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일직선상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파괴하려는 의도 또한 숨어 있다. 무엇보다도 슈퍼매너리즘이란 잡종과 혼성을 뜻한다. 그런 만큼 이 책에는 다양한 현실들이 공존해 있다. ―「책머리에」 중에서

저자는 2부 「슈퍼매너리즘의 시대」에서 오늘날 건축의 현대성을 슈퍼매너리즘이란 이름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 책에는 모더니즘과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역사와 그에 대한 저자만의 해석이 담겨 있으며, 이와 더불어 모든 양식들이 ‘혼성hybrid’된 건축의 현재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이어간다. 그 속에서 저자는 매혹적이고 새로운 건축 방법과 공간 개념들을 곳곳에 펼쳐놓는다. 여기서 함성호의 반(惑)하는, 매혹하는 건축이 드러난다.

건축가는 이미 존재하는 공간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루어낸다/일구어낸다, 라는 말은 이미 기존에 있었던 사물을 어떤 장치를 통해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건축의 미니멀리즘」 중에서

함성호 자신은 “공간의 무의지”에 반하며[惑], “공간은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래 거기 그대로 존재해왔던 그런 공간을, 건축가가 제작하거나 만들어낸다는 말은 오류라는 말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형태를 그저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건축 행위’다. 따라서 건축에 있어 형태를 가지고 운운하는 것은 실패한 건축 담론이며, 바로 여기서 건축예술에 대한 일반 오해가 빚어진다고 밝히고 있다.

망설이면서 서성대면서 설레면서 깜박깜박 잊었다가 문득문득 거듭 생각하면서, 그 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함과 소박함과 의도하지 않은 절제와 도저한 게으름의 미학, 이것이야말로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본령이다.
―「건축의 미니멀리즘」 중에서

20세기 속도의 문명이 불합리한 가치와 불필요한 사고를 배제하며 달려왔다면, 오늘날 건축은 “서성대면서, 해찰거리면서, 어영부영하면서, 놀면서” 간다. 저자는 이러한 “도저한 게으름”의 미학을 조선과 성리학을 넘어선 그 이전의 한국건축에서 발견한다. 그 예로 우리나라 어느 산봉우리에 얼굴만 새겨진 부처의 모습과 같이, 부처의 몸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그 산 일대가 곧 부처의 몸이요, 곧 용화정토라는 은유를 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 표현의지가 재현에 있지 않고 메타포에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건축의 깨달음은 자연의 따뜻한 얼굴을 완전하게 재생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이런 과거를 가졌다고 믿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착각이다. 우리는 한 번도 그런 과거를 지나온 적이 없다), 그리운 과거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돌아가야 할 그리운 과거는 오히려 미래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다. 바로 하이테크로 로테크를 지향하는 그것.
―「건축, 문학, 자연」 중에서

우리는 자연을 그리워한다. 싱그러운 풀잎 내음과 산새들이 지저귀는 그리운 자연. 하지만 저자는 그런 자연은 반쪽짜리 기억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애써 자연의 폭력성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자연의 폭력성과 멀어짐으로써 도시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저자는 “돌아가야 할 그리운 과거란 없”으며 “그리운 과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라는 개념보다는 진화의 개념을 채택하여, “하이테크로 자연스럽게 로테크”를 지향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행위들은 자연의 행위와 같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도시는 더욱 도시답게 하나의 자연임을 당당히 선언해야 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느슨한 스케일은 이러한 20세기 건축사의 실험에 대한 분석이고, 또 다른 실험이다. 이는 통일성에 대한 회의이고, 자연계의 비선형적 질서, 혼돈의 질서에 대한 수용이다. 단순하고도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대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기도 하다.
―「인간을 위한 건축은 망했다」 중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휴먼 스케일은 자연과 유리된 비인간적인 스케일이며 툴(tool) 스케일일 뿐이었다. ‘인간적’이란 말은 다른 종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이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망각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실패했다. 따라서 저자는 또 다른 실험의 “느슨한 스케일”(‘느슨한slack’이란 말은 게으른, 침체된, 태만한, 꾸물대는, 맥이 빠진, 등등의 산업사회의 온갖 부정적인 태도를 지칭하는 말)을 제안한다. 혼돈의 질서를 수용하고 자연의 비밀에 한 발짝 더 다가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느슨한 스케일은 무엇인가? 저자는 도시에는 ‘언어’가 있다고 말한다. 도시의 지금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상상(언어)이고, 언어가 주는 자유로운 구축의 방식이 바로 건축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시대의 건축을 우리가 무엇이라고 부르든, 현대는 분명 새로운 사고와 마음의 진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새로운 구축의 시점에 와 있다. 이 새로운 구축의 모양은 분명 우리의 앞 세대들이 누렸던 영광과는 비교될 수 없는 새로운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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