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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나라 잃은 위구르의 비극과 우리의 백년 기억 제1장 자유 없는 도시 제2장 모스크 가는 길 제3장 누란의 미녀 제4장 허무마을 빠추허 · 독자를 위하여 역사와 현실, 또는 갈등과 사랑의 변주곡 | 김종회 |
白始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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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솔직히 지난 일 년간 나는 위구르 속에 흠뻑 빠져 살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꼬박 굶주린 늑대처럼 혼자 코를 벌름거리며 그 황량한 산하를 누비고 다녔다. 몸은 한반도 수도권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했지만, 내 영혼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사막을 헤맸고, 눈 덮인 톈산산맥을 오르내렸으며, ‘언제 시들지 모르는 하얀 양파꽃 같은 나라’ 누란왕국의 흔적을 좇았고, 3천8백 년 동안 모래 속에 누워 나를 기다려 준 ‘누란의 미녀’와의 만남을 경험했고……. 그러나 무엇보다 흡사 상처처럼 나를 휘어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대대로 신장을 지키고 사는 위구르사람들의 애절하고 캄캄한 삶이었다. 분명 제 나라 말이 있고 문자가 있어도 중국어를 배우지 않으면 먹고살기조차 힘들다. 아니, 설사 중국어를 터득한다 해도 고작 주어진 업무가 제도적으로 제 민족을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단공무원 직종이 고작이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희망이 없으니 미래도 없다. 오로지 ‘하나의 중국’을 위해 멸종되거나 제 나라 언어와 문자를 깡그리 없애고, 민족의식도 없애고, 문화도 없애고, 입을 열면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전통적인 노래도 없애고 그냥 아무 생각 없는 로봇처럼 보통 중국인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조진표의 할아버지 조봉삼 씨가 살아냈던 1919년 무렵을 새삼 조명하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본의 만행에 항거, 나약하게 독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총을 들고 폭탄을 던지며 무력으로 독립의 당위성을 포효하던 독립운동가의 자랑스러운 투쟁사. 조국을 위해 청춘과 인생을 바쳤음에도 보상은커녕 엉뚱하게 친일파에게 쫓겨 남아 있던 후손들마저 풍비박산케 했던 이 나라의 비겁한 역사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민족의 반역자고 민족의 배신자들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침략자 일본의 앞잡이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동족을 고발할 수 있으며, 더구나 몹쓸 고문까지 손수 자행할 수 있는가. 누구는 차디찬 감옥에서 나라 잃은 억울함을 한탄하고 있을 때, 누구는 호의호식하며 재산까지 풍덩풍덩 늘리고 있을 수 있는가. 더구나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도 억울한 마당에 어떻게 하루아침에 독립군 잡은 민주경찰로 둔갑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슬픔과 좌절과 고뇌와 회한이 이 나라 역사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되며, 더구나 왜곡되어서 안 된다는 절실함에 몸을 떨었던 사실도 2019년 위구르사람들의 슬픈 현실을 보며 터득한 처절한 반성이라고 해야 옳다. ― 작가의 말 「나라 잃은 위구르의 비극과 우리의 백년 기억」 중에서 평론가 해설 이 소설의 배경이자 이야기의 무대인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령이다. 중국 북서쪽 중앙아시아에 위치하며, 현실적으로는 중국에 속해 있으나 위구르인들은 그 복속이 타민족에 의한 강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신장은 ‘새로운 영토’라는 한자어이며, 위구르는 ‘단결과 연합’을 의미하는 터이니 서로의 시각이 매우 다른 편이다. 중국 정부의 탄압 때문에 위축되어 있으나 지속적으로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현실적 감각과 도덕적 자기정체성을 가진 주인공 조진표가 ‘누란의 미녀’에 매혹되는 것은 현실 속에서 그 신비한 전설을 실상으로 만나는, 곧 쟈오서먼의 사랑을 만나는 전조前兆를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사랑이 실현되고 합일을 이루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희생이 지불되어야 했다. 쟈오서먼의 생각과 행적이 점진적으로 밝혀지는 것도 이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사랑의 의미를 장중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이야기의 점층적이고 순차적 형성이라는 소설 문법에 매우 능숙한 기량을 가졌다. 다른 모든 사건들이 소설 속에서 충돌하고 있다 할지라도 누란의 미녀와 쟈오서먼의 내포적 소통과 동일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의 서사적 위력이 증폭될 수 없다. 그런데 조진표과 쟈오서먼의 사랑이 사랑 자체의 결실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조진표가 위구르 분리 독립의 투쟁 사상에 동조자로 자기정립을 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그에 못지않게 주요한 하나의 변곡점이 있다. 기독교 선교사인 조진표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결심하는 대목이다. 종교적 함의에 있어서 이 개종은 실로 간략하지 않은 의미망을 포괄한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모두 교리에 있어 ‘절대타당성’을 지향하는, 타협이 불가능한 성향을 지녔다. 불교가 그 ‘보편타당성’의 교리로 토착신앙이나 다른 종교적 사상과 큰 마찰이나 충돌 없이 연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렇게 보면 소설 말미에 등장하여 마무리 수순에 복무하는 이 개종의 사태는 보다 주밀周密한 고찰을 요하게 된다. 만약 두 종교의 교리가 전면에서 대립하면 이야기의 진척이 불가능하다. 조진표는 한층 대국적인 차원에서 나중의 ‘반드시 또 다른 개종’을 위해 기도하면서 쟈오서먼의 소망에 부응하기로 한다. 이는 어쩌면 교리의 속박을 넘어서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교리 위반과 어떻게 상충하게 되는지는 그야말로 또 다른 관찰을 예고한다. 동시에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전설의 담론을 끌어안은 채 너무도 절박하며 나아가 그 다음 삶의 행보를 추동하는 저력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 사랑은 마지막 장면, 유령도시 빠추허에서 낙타를 타고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피신하는 이들의 소망을 암묵적으로 허용한다. 그렇게 참담한 사막 땅에서 새 희망의 잠재와 운명적인 사랑의 존재를 함께 발굴한 역작이 바로 이 소설이다. ― 김종회 문학평론가의 「독자를 위하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