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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문장
홍재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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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희곡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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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 끊임없는 고뇌와 참회의 기록… 윤동주 문학의 에스프리

윤동주의 문장 __ 시
초 한 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거리에서|남쪽 하늘|공상|창공|비둘기|이별|식권|모란봉에서|황혼|가슴 1|가슴 2|종달새|닭|산상|오후의 구장|이런 날|양지쪽|산림|가슴 3|꿈은 깨어지고|빨래|아침|곡간|가을밤|황혼이 바다가 되어|장|밤|달밤|풍경|울적|한난계|그 여자|야행|비ㅅ뒤|소낙비|비애|명상|바다|산협의 오후|비로봉|창|유언|새로운 길|어머니|가로수|비 오는 밤|사랑의 전당|이적|아우의 인상화|코스모스|고추밭|슬픈 족속|자화상|소년|달같이|투르게네프의 언덕|장미 병들어|산골물|팔복|병원|위로|무서운 시간|눈 오는 지도|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십자가|눈 감고 간다|새벽이 올 때까지|못 자는 밤|돌아와 보는 밤|간판 없는 거리|바람이 불어|또 다른 고향|길|별 헤는 밤|서시|간|참회록|흰 그림자|흐르는 거리|사랑스런 추억|쉽게 씌어진 시|봄

윤동주의 문장 __ 동시
조개껍질|눈 1|참새|고향집|병아리|오줌싸개 지도|기왓장 내외|창구멍|닭|빗자루|해ㅅ비|무얼 먹구 사나|비행기|봄|굴뚝|버선본|눈 2|개 1|겨울|사과|편지|호주머니|둘 다|반딧불|나무|할아버지|만돌이|개 2|거짓부리|귀뜨라미와 나와|애기의 새벽|햇빛·바람|해바라기 얼굴|산울림

윤동주의 문장 __ 산문
달을 쏘다|별똥 떨어진 데|종시|화원에 꽃이 핀다

윤동주를 말하다
벗들의 회고와 최근의 평가

윤동주 연보

저자 소개2

尹東柱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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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눈(雪), 작가 이상의 글을 좋아한다. 뇌리를 깨우는 서늘함이 좋기 때문이다. 한때 역사책과 추리소설에 빠져 다양한 지식의 세계를 탐험했으나, 현재는 철학과 고전 문학을 공부하며 매일 ‘하루 한 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꼰대’가 아닌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저서로는 《이상의 문장》(판테온하우스, 2018), 《관인지법 : 사람을 보고, 쓰고, 키우는 법》(홍재, 2020), 《윤동주의 문장》(홍재, 2020), 《스무 살이 되는 아들에게》(루이앤휴잇, 2021), 《리더의 얼굴》(루이앤휴잇, 2022), 《이기는
겨울과 눈(雪), 작가 이상의 글을 좋아한다. 뇌리를 깨우는 서늘함이 좋기 때문이다. 한때 역사책과 추리소설에 빠져 다양한 지식의 세계를 탐험했으나, 현재는 철학과 고전 문학을 공부하며 매일 ‘하루 한 줄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꼰대’가 아닌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저서로는 《이상의 문장》(판테온하우스, 2018), 《관인지법 : 사람을 보고, 쓰고, 키우는 법》(홍재, 2020), 《윤동주의 문장》(홍재, 2020), 《스무 살이 되는 아들에게》(루이앤휴잇, 2021), 《리더의 얼굴》(루이앤휴잇, 2022), 《이기는 사람들의 7가지 법칙》(루이앤휴잇, 2023), 시집 《나이 들수록 나는 젊은 네가 그립다》(판테온하우스, 2021) 등이 있다. 각 작품에서 그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삶의 가치를 탐구하며, 실천적이고 심오한 통찰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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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354g | 122*186*20mm
ISBN13
9791189330163

책 속으로

윤동주의 시 「사랑의 전당」과 「소년」, 「눈 오는 지도」에는 어김없이 ‘순이’가 등장한다. 순이는 과연 누구일까.
시인의 벗들에 의하면, 순이는 이화여대 문과 졸업반 여학생이라고 한다. 시인은 그녀와 교회를 함께 다니며 성경 수업을 함께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적이 없다. 사랑의 달콤함보다는 시대의 상처를 아파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희전문학교 동기 강처중의 말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제 홀로 간직한 채 힘써 감춘 것이다.”
시 「눈 오는 지도」에는 그런 순이를 떠나보내는 시인의 애틋함과 이별의 안타까움이 잘 나타나 있다.
--- 「눈 오는 지도」 중에서

27년 2개월이란 짧은 생애에서 윤동주의 삶이 가장 풍요로웠던 때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핀슨홀’ 3층 다락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한방을 쓰면서 야심 차게 대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거기서 잠을 자고, 사색하고, 꿈을 꾸며, 새로운 길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시 「새로운 길」은 입학 한 달여 후 새 출발에 대한 설렘과 미래에 대한 다짐을 담은 작품이다. 시인은 생전에 독립투사도 유명 시인도 아니었다. 다만, 민족의 아픔과 역사의 무게를 통감한 청년이었다. 「새로운 길」에는 그 시대를 산 청년으로서의 시인의 각오가 다짐이 짙게 배어 있다.
--- 「새로운 길」 중에서

육필 원고에 ‘모욕을 참아라’라는 메모가 눈길을 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제 암흑기를 살면서 시인이 겪은 내적 갈등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아우의 인상화」는 아우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인상과 생각을 그린 작품으로,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에 비유하여 일제 강점기 청년들의 슬픈 자화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인의 대부분 시가 내면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면, 「아우의 인상화」는 자신이 아닌 아우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와 걱정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 「아우의 인상화」 중에서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시가 담긴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될 수 있었던 데는 벗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의 힘이 매우 컸다. 특히 정병욱은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남긴 자필 원고를 마루 밑에 파묻은 항아리 속에 넣어 보관하며, 귀중한 원고를 지켰다.
강처중 역시 벗의 요절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알리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1947년 초,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던 정지용을 같은 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강처중이었다. 그는 죽은 벗의 육필 원고를 건네며,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얼마 후 정지용은 꼼꼼한 검토 끝에 그중 하나를 1947년 2월 13일 자 신문에 싣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정지용은 직접 소개 글까지 덧붙였다.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십여 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 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
그는 왜 무명 시인의 시를 자랑스럽다고 했을까. 그가 쓴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스물아홉이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이바지를 한 사람이 벗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라면, 시인의 시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시인 정지용이었다.
--- 「쉽게 씌여진 시」 중에서

시인은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하지만 출생 당시 손 위 누나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라서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누나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이 작품은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며 눈이 오지 않는 곳으로 간 누나를 떠올리며, 편지로라도 눈을 담아 보내고 싶은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누구나 좋은 것을 대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자신이 먼저 먹는 것이 못내 미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그 사람은 아마 어린 시절 유명을 달리한 누나가 아니었나 싶다.
--- 「편지」 중에서

살아생전에 시인으로 등단한 적이 없는 시인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조부 윤하현이다. 시인이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햇수로는 29년)이라는 짧은 삶을 마감하자, 윤하현은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주의 비석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시인 윤동주 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썼다. ‘왜떡(센베이)’은 쓰다고 하는 이 작품에서 시인은 일본 떡은 비록 그 맛은 달지도 모르지만, 결국 우리 민족에게 쓴맛을 줄 것이라며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 「할아버지」 중에서

출판사 리뷰

진실한 자기성찰의 바탕에서 써 내려간,
깊은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기는 124편의 빛나는 문장!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 그는 생전에 시인이라고 불리지 못했다. 시집을 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부여한 사람은 조부 윤하현이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손자가 일본에서 만 27년 2개월(햇수로는 2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하자, 그의 조부 윤하현은 자신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손자의 비석으로 사용하며, 거기에 ‘시인 윤동주 지묘’라고 썼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시인이 된 것이다.

시인 윤동주는 단 한 순간도 온전한 내 나라에서 산 적이 없다. 민족의 한이 서린 간도에서 태어나 식민지의 최전선인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후 압제자의 땅에서 쓰러졌다. 그는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독립투사도, 유명 시인도 아니었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문학을 통해 민족이 처한 아픔을 달래고,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문학청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여느 투사 못지않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는 「서시」의 구절처럼, 독립의 희망을 끝까지 잃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죽음의 늪에 빠진 민족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다가 결국, 민족의 제단에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말았다.

그가 시를 쓰던 때는 문학이 철저히 외면받던 때였다. 오로지 전쟁의 광기만이 너울거렸다. 그러다 보니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었고, 벗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감시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창씨개명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옷’, ‘살구나무’ 등은 영락없는 불온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조국과 민족을 잊은 적이 없다. 민족의 아픔을 사랑으로, 분노를 꿈으로 피워내며, 죽는 순간까지 우리말로 시를 썼다.

『윤동주의 문장』은 어둡고, 암울한 시대 문학을 통해 민족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고자 했던 시인의 ‘부끄러움의 미학’을 대표하는 시 86편, 동시 34편, 산문 4편 등 124편의 작품을 창작연월일 순으로 담고 있다. 특히 작품에 깃들어 있는 시대적 아픔과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시인의 내면과 문학세계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벗들의 회고와 추모의 글을 함께 담아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고 부단히 애썼던 시인의 올곧은 정신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문학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며,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시인 윤동주의 올곧은 삶과 정신!
삶의 여정을 따라 진하게 울려 퍼지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고뇌의 기록

대부분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윤동주의 작품 역시 행간에 깃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단순한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행간의 의미를 알면 완전히 새로운 텍스트가 된다. 그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이던 1936년 6월 10일에 쓴 「이런 날」이라는 시가 있다.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 (중략) …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날’은 ‘일본의 국경일’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 채 이 시를 읽으면 하나의 서정시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만주에서는 일본의 국경일에 만주국 국기인 오색기와 함께 일장기를 함께 달았다. 어디에도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기념물은 없었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은 그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크게 웃고, 신나게 뛰어놀 뿐, 나라 잃은 설움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는 그런 현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이런 날」은 그 심정을 담은 작품이다.

124편에 이르는 시인의 작품 대부분은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동시 역시 마찬가지다. 평범한 소재를 아이다운 엉뚱한 생각과 동심으로 담은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순진한 아이의 눈을 통해 본 세상의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고 있다. ‘꿈에 가 본 엄마’와 ‘돈 벌러 간 아빠’가 등장하는 「오줌싸개 지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누구도 돌보는 사람 없는 형제의 비극을 티 없는 아이의 순진한 눈을 통해 그리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더 먹먹하게 한다.

빨랫줄에 걸어논
요에다 그린 지도는
지난밤에 내 동생
오줌 쏴서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이렇듯 시인의 작품에는 시대의 아픔과 상처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또한, 그는 그런 아픔에 처한 민족을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보듬고자 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윤동주의 문장』은 어둡고, 암울한 시대 문학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며,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시인의 올곧은 삶과 정신을 담고 있다.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고뇌했던 시인의 삶이 오롯이 들여다보이는 깊은 울림의 기록인 셈이다. 이에 빛바랜 한 편의 드라마처럼 오롯이 펼쳐지는 시인의 글을 읽다 보면 때로는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며, 또 때로는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제목을 『병원』이라고 지은 이유

윤동주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래 제목을 『병원』이라고 지었다. 말과 글, 나라, 이름과 성까지 빼앗겼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즉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환자처럼 보였기에 때문이다. 이에 병원이 아픈 사람을 치료하듯, 자신의 시가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이다. 병원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에 혹시 이 시집이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 「참회록」에 담긴 굳은 각오와 의지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다. 국내에서 쓴 마지막 작품으로, 흔히 시인을 일컬을 때 말하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가장 대표하는 작품이다.
육필 원고에 ‘시(詩)란? 부지도(不知道)’, ‘생존(生存)’, ‘생활(生活)’, ‘힘’ 등의 낙서가 어지럽게 쓰여 있어 이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단상을 떠올리며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1942년 3월, 시인은 일본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만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으로, 당시 일본 유학을 하려면 반드시 그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 결과, 시인은 ‘히라누마 도쥬(平沼 東柱)’가 되었다. 창씨개명을 닷새 앞두고 쓴 「참회록」은 그때의 참담함과 괴로움을 담은 작품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한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참회록」은 그가 그것을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일본 유학 시절 내내 이어졌다.

시인의 도시샤대 동기에 의하면, 시인은 수줍음이 많아서 수업 시간이면 항상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펜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줬다. 이는 나라를 잃었을지 모르지만, 정신과 문화만큼은 절대 잃지 않겠다는 시인의 마지막 저항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윤동주의 고뇌와 괴로움의 모티브가 된 작가와 작품

윤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이라는 시가 있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투르게네프의 언덕」으로 읽는다. 이반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문학 인생을 마무리했을 만큼 시를 사랑했다. 그 때문에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의 시, 그것도 산문시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노년의 투르게네프가 뒤늦게 깨달은 삶의 가치와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는 이광수, 톨스토이와 함께 20세기 초 우리나라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만큼 많은 영감을 주었다. 윤동주 역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탐독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그의 산문시 중 가장 인기를 끈 「거지」를 오마주한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수작 중 하나로 젊은 지식인의 비극적 삶을 다룬 소설 『루딘』 역시 윤동주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윤동주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지식인의 고뇌와 괴로움의 출발점은 『루딘』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루딘』은 당시 암울한 사회 상황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젊은 청년 루딘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에서 루딘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조국 러시아는 우리가 없어도 전진하겠지만, 우리 중 누구도 조국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투르게네프는 인간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구별했다. 햄릿은 생각에만 몰두하는 분석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자신을 맹신하는 동시에 의심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끊임없이 자책한다. 반면, 돈키호테는 생각보다 행동이 우선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고 돌진한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투르게네프는 우유부단한 햄릿형 인간보다는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돈키호테형 인간이 되자고 했다. 세상을 끌어가는 것은 돈키호테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조리가 만연하고 불의한 시대일수록 돈키호테형 인간이 주목받기 마련이다. 윤동주가 산 시대 역시 그런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행동을 중시하는 송몽규가 윤동주보다 먼저 주목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의 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은 거기서 오는 질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윤동주를 만든 팔 할, 송몽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에 나오는 문구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의 윤동주를 만든 팔 할은 송몽규였다. 1935년 1월 1일, 송몽규가 「술가락(숟가락)」이라는 작품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분에 당선되자, 자극을 받은 윤동주는 본격적으로 습작에 돌입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작품마다 창작연월일을 기록했다. 송몽규의 등단이 시인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고종사촌 사이로 3개월 간격으로 같은 집에서 나란히 태어난 두 사람은 평생의 벗이자 라이벌이었다. 송몽규는 눈물 많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인과는 달리 소년 시절부터 활동적이고 리더십이 강했다. 두 사람과 어린 시절 친구로 ‘간도 삼총사’라고 불렸던 고 문익환 목사에 의하면, 시인은 늘 자신보다 한발 앞선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송몽규는 전도유망했던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독립군의 길을 걷는다. 생각건대, 그것이 시인을 더 부끄럽게 하고 반성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불의와 부조리에 행동으로 맞서는 송몽규와 그렇지 못한 자신을 한없이 비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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