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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uro Nukui,ぬくい とくろう,貫井 德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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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념했다. 예상이란 강한 충격을 받아도 덜 상처받게끔 장치해 둔 완충재와 같아서 미리 각오를 해 두면 어떤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덜컥 고꾸라지지는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면 나는 기노우치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날을 각오하고 있었다. 앞날에 대한 내 예상은 감탄스러우리만치 정확했지만 그것은 누구나 할 법한 예상이었으므로 결코 자랑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결국 이럴 줄 알았다는 혼잣말로 나를 다독여 보호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각오와 달리 좀처럼 그 자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아직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우뚝 멈춘 마음은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니까. --- p.118 나는 왜 기노우치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가. 그가 이토록 완벽한 연기를 보여 줬는데도 통하지 않는다는 게 억울했다. 나는 기꺼이 속고 싶었다. 감쪽같이 속아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었다. 하늘은 무심했다. 얻고자 한 건 마음의 평안이었지만 정작 얻은 건 기노우치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능력이었다. 이따위 것이 여자의 감이라면 개나 주라지. 내게는 개똥만큼도 필요 없는 능력이었다. 나는 그에게 속아 편해지고 싶었다. --- p.123 “이유가 뭐죠?” 묻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궁금했다. 왜 내가 아닐까. 왜 하필이면 도키코일까. 아무리 끙끙거려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같았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해답이 존재하는 문제였다. 기노우치의 설명 없이는 답을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런 게 논리로 설명될 리 없잖아.” 질문이 영 글러 먹었다는 투의 대답이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라면 하나하나 다 열거할게. 그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렇다고 그 조건들 때문에 당신을 좋아한다는 얘기는 아냐. 조건과 감정은 다른 문제야. 내가 열거한 모든 조건을 갖춘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 여자를 반드시 좋아하게 되리란 보장은 없거든. 절대로 장담 못 하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점 때문에 당신한테 끌리는 거니까. 연애 감정이란 그런 거잖아.” --- pp.208~209 “좋은 소설은 어떻게 해야 쓸 수 있을까? 물론 작가가 아는 세계가 좁으면 그만큼 좋은 소설이 나오기 힘들지. 그렇다고 견문을 넓힌다고 반드시 좋은 소설이 나온다는 얘기는 아니야. 그런 논리대로라면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노인들만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소리잖아. 뭐야, 그럼 우리처럼 젊은 소설가는 필요도 없게? 그러니까 그건 틀린 얘기야. 소설의 정수에 다가가려면 단순히 경험만이 아닌 다른 뭔가가 필요한 것 같아. 그 ‘뭔가’의 정체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걸 찾아가는 과정에서 좋은 소설이 탄생할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 p.470 내면에서 말이 소용돌이쳤다. 내 시커먼 마음이 말을 낳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샘솟는 말이 내 마음을 검게 물들이는지는 수수께끼였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말을 밖으로 토해 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것이 창작욕인가? 그마저 불분명한 상태에서 나는 기꺼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는 말의 수도꼭지이자 꼭두각시였다. --- p.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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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쿠이 도쿠로에 대한 편견을 깨다!
한 사람의 반평생을 건 긴 싸움에 대한 이야기 그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당신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빼어난 외모로 유명했던 전설의 베스트셀러 작가 사쿠라 레이카. 그녀가 느닷없이 절필을 선언했다. 모두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로부터 8년, 사쿠라 레이카의 열렬한 팬이었던 햇병아리 편집자 와타베 도시아키는 그녀가 다시 펜을 들게끔 설득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가 보여 준 열정과 '사소한 이유 하나' 때문이라며 그녀는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서두는 충격적인 고백에서 시작되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달이 없는 새로운 달, 신월(新月)의 밤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 외롭지 않았다.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작풍으로 유명한 누쿠이 도쿠로. 지금까지 그가 선보인 소설들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신작 소식이 들렸을 때 또 다른 사회파 미스터리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독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는 소설이다. 『신월담』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만큼이나 개인적인 한 인물의 지난 역사를, 처절하리만큼 지독했던 연애담으로써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라는 ‘야만스러운 종족’의 일원이 될 것을 선택한 여자, 사쿠라 레이카. 그녀의 오랜 팬이었던 풋내기 편집자 와타베 도시아키가 그녀를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인 사쿠라 레이카의 이야기는 지겹지가 않다. 청자인 도시아키의 말마따나 ‘어찌나 재미있는지 등이 오싹오싹할 정도’이다. 사회적 이슈를 미스터리라는 방식으로 풀어 왔던 누쿠이 도쿠로는 이 작품에서 연애소설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다. 지극히 한 개인에게 집중된 이야기지만 여기에서도 그가 지금까지 캐내어 왔던 사회적 모순과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작가적 특성을 배제하더라도 『신월담』은 연애소설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긴장을 거의 느낄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얼핏 보면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질척질척한 관계가 이어진다. 그럼에도 결국 이 작품은 연애소설일 수밖에 없다. 주인공 자신의 입으로 줄곧 말하듯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가 한 모든 일의 이유는 모두 당신 때문’이었던 까닭이다. 남성 작가가 쓴 소설이 맞는가? 여성들의 세계와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처럼 현실감 있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마존 저팬’ 독자 서평) 주인공이 반평생에 걸쳐 사랑했던 남자, 기노우치 도루는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만한 인상을 가진 그는 별 죄의식 없이 양다리를 걸치곤 하는 바람둥이다. 그 정체를 깨달은 이상 관계를 끊고 멀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주인공은 도저히 그와의 인연을 놓지 못한다. 비록 수많은 상처를 안겼지만 그는 상대의 잠재력과 진정한 존재 가치를 볼 줄 아는 인간이었으며, 그로 인해 주인공이 난생처음으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기쁨을 누렸기 때문이다. 책장 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독자들은 뻔뻔한 남자, 답답한 여자라며 가슴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한 와중에도 인간으로서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면을 가진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특히 남성 작가인 누쿠이 도쿠로가 여성 작가인 사쿠라 레이카라는 캐릭터를 창조해 내고, 그 미묘한 내면을 속속들이 묘사하는 부분들을 보면 여러모로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기에 창작에 대한 고뇌와 일본 출판 업계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신월담』의 흥미로운 점이다. 147회 나오키상 최종 후보까지 올랐던 만큼 이야기의 재미와 문학적인 깊이를 모두 갖춘 이 작품은 여태까지 누쿠이 도쿠로가 갖고 있던 이미지에 새로운 색채를 더할 의미 있는 소설이다. 연애와 창작, 그 쾌락과 지옥을 그려 낸 이 작품은 전율이 일어나는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명작이다. (분게이순주 편집자 서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