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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 은둔하는 삶 야구 서바이벌 악惡 친밀성 은둔 파상력破像力 자기-비움 은둔지에서 2부 글쓰기에 대하여 좋은 글을 쓰는 법 문학의 체험 대중문화의 힘 연구 〈버닝〉 루만 단상이란 무엇인가 3부 난류 속으로 숲의 종언 포스트휴먼 바이러스 인류세 타연他然 미래의 미래 4부 모든 것을 단순하게 어떤 이야기 인간희극 페이션시patiency 헐벗음 문제 필로-조에philo-zo? 여행 이후以後 참고문헌 |
金洪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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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체에 매혹되거나 설득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파편이다. 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다.
--- p.5 야구를 좋아하는 자에게 세계는 낭만적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산문적이며, 고독한 세계다. 그것은 은둔지다. --- p.15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는 신비감이 동반된다. 다른 길이 아니라 그 길로 가서 살았거나, 그 열차가 아니라 다음 열차를 타서 살았다는 것. 왜 그 길로 갔으며, 왜 다른 열차를 탔는가?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로 (그들이 죽었고) 내가 죽지 않았는가? 왜 나는 구제되었는가? 왜 그 질병이 나를 빗겨갔는가? 해답이 있기 어렵다. 생존은 해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 p.25 아이는 자란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맹렬하게 자란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 아이의 성장을 기뻐하는 사람의 눈에 아이는 결코 ‘존재’하는 누군가, ‘실존’하는 누군가가 아니다. 아이는 자라고 있다. 이 변화와 생성을 지각하고 기뻐하는 힘이 사랑이다. --- p.36 쓰는 자는, 오직 미래에만 현재화될 미지의, 다수의, 통제 불가능한 해석 상황들의 주름을 만들고 있다. 하나의 문장에는, 미래에 누군가 그것을 읽을 때 그들의 의식에 발생하게 될 새로운 촉발, 감상, 생각, 감정의 가능세계들이 응축되어 있다. --- p.49 감염의 상상계. 잠복기까지의 기다림. 감염되었는지 감염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의 불안. 혹은 건강검진을 받고 난 후 결과를 기다리기까지의 시간. 이들은 모두 의학적 패러다임의 연옥이다. 불안 속에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복음과 더불어 회생하는 삶. 반복되는 부활. --- p.52 초연결사회의 참된 도덕성은 단절의 능력에서 발견된다. 얼마나 깊이, 진지하게, 창조적으로 끊어질 수 있는가? 끊어짐과 연결됨 사이에 얼마나 생동감 있는 리듬을 설계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은둔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p.55 파상의 핵심에는 세계의 가상성과 주체의 가상성의 동시적 파괴가 있다. 파상은 단순한 환멸이나 실망이 아니다. 그것은 환멸이나 실망을 통한 자아의 변형이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적, 실체론적 주체의 파괴적 변형. --- p.77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신, 그 아들과 함께 죽어가는 신의 모습은 ‘종교’라는 단어를 그 근본의 자리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사제와 교리와 의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의 문제다. --- p.86 좋은 글은 미문이 아니며 악문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지나치게, 과도하게 아름답거나 혹은 아주, 지나치게, 과도하게 추한 글이다. 핵심은 균형이 아니라 힘의 강도에 있다. 좋은 글은 움직이고, 변형시키고, 불붙이고, 흐르게 하고, 쏟아지게 하며, 뒤집는다. 좋은 글은 감응이다. --- p.116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 p.159~160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 p.209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 p.223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다. --- p.261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 p.318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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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좁아져 있다. 숨을 곳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완벽한 범죄는 존재하기 힘들다. CCTV와 인터넷 아래 모든 것이 감시되고 발각된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은 매우 안전하고 편리한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만큼 숨을 곳이 없어졌다. 카메라 밖으로,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SNS를 하지 않을 자유. 잡다한 정보를 보고 듣지 않을 자유.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 너나없이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려는 욕망이 들끓는 시대이지만, 그에 따른 피로 역시 곳곳에 완연하다. 평범한 일상 포스팅에도 광고가 스며들고, 유행하는 카페에 가서 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하면 뒤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퍼져나가기도 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스토킹당하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목록의 상위항목엔 항상 아이돌 가수가 올라 있지만, 반면 악플에 목숨을 끊는 연예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우리는 과도하게 연결되고, 과도하게 상처받기 쉬운 상황에 몰려 있다. 김홍중은 이런 문제들이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문명사적 변동의 한 징후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초연결사회에서는 오히려 단절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얼마나 깊이, 진지하게, 창조적으로 끊어질 수 있는가? 끊어짐과 연결됨 사이에 얼마나 생동감 있는 리듬을 설계할 수 있는가? 공동체의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누군가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군가는 음악으로, 누군가는 산책으로, 누군가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SNS로 은둔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SNS로부터 은둔하는 사람도 있다. 은둔지는 멀리 있지 않다. 그곳은 발명될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 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 동물,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다” 김홍중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은둔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페이션시patiency라는 단어를 통해 ‘은둔기계’의 특성을 표현한다. 이 단어는 ‘페이션트patient’, 즉 ‘환자’에서 유래하는데, ‘견뎌냄’ ‘견디는 힘’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환자는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해지는 질병과 치료를 수용하는 자, 즉 감수하는 자다. 여기서 저자는 십자가를 감당하는, 헐벗은 예수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견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세계는 견디는 자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서구 사회이론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파악해왔다. 그것은 활동적 남성을 모델로 한다. 하지 않는 것은 무시되거나, 존재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에는 하는 자들뿐 아니라 겪는 자들도 존재한다. 은둔기계는 이들과 썩 닮아 있다. 그들은 세상의 많은 것들을 그저 감내한다. 은둔 속에서, 세상에의 참여가 좌절된 자리에서, 유민처럼 흩어져, 도주하며, 완강하게 잔존한다. 동시에 그들은 삶을 사랑한다. 바이러스와 인간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바이러스’에 관한 글이다. 생명의 작동이 멈추었지만 죽지는 않은 것. 부활-가능성 속에서 잔존하는 것. 조건이 주어지면 맹렬하게 자기복제하는것. 유보, 정지, 멈춤을 내장한 생명력. 막강한 변이능력. 그리고 면역 시스템에 식별되지 않을 수 있는 은폐능력. 바이러스는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COVID-19를 통해 우리는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행위자agent와 대면하게 되었다. 바이러스의 통제하기 어려운 미세한 작용, 기존의 사회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재구성하는 힘, 사회적 삶에 가져온 파괴적 영향력의 폭과 깊이를 매일 느끼고 지각한다. 만일 바이러스가 생명과 활동력이 없는 무언가라면, 타인과의 악수를 꺼리거나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는 것, 종교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겁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두려워한다. 인간은 이미 바이러스를 행위자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홍중은 21세기 문명에서 바이러스는 생물학적 명칭이라는 함의를 넘어서, 시대의 탁월한 존재론적 형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현상, 미디어적 현상, 경제적 현상, 심리적 현상, 사회적 현상, 기호학적 현상 모두가 바이러스적viral이다. 생각의 아상블라주 이 책은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도 무방하다. 프롤로그에서 이야기하듯, ‘전체’가 아닌 ‘파편’이 더욱 강렬한 책이다. 야구나 영화 같은 일상적인 소재에서부터 철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관한 단상까지 다채롭게 담겨 있다. 저자가 여행을 다니며 떠올렸던 생각들도 파편화된 형태지만 은은하고 아름답게 쓰였다. 그리고 모든 글에는 ‘은둔’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생각의 아상블라주. 이 책은 그 자체로 김홍중이 말하는 은둔의 한 형태라고 할 만하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는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은둔기계』는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매우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인문 에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