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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파국’을 기피하는 시대다. 우리는 생산력이 모든 결핍을 채우고,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주의가 모든 이를 성공으로 이끌 것이라는 어떤 도저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간지奸智를 발휘하며 신들의 시험과 괴물들의 손아귀를 피해 페넬로페의 품으로 돌아간 오디세우스처럼, 이 시대는 기존의 생산력과 과학기술과 시스템을 물신화함으로써 다른 모든 균열을 덮고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는 가장 실제적인 파국의 가능성에 직면한 시대다.
--- p.12 이러한 상황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디스토피아적 파국의 상상력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해야 할지, 어떻게 정규직을 얻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해고되지 않을지, 어떻게 노후를 보낼지에 대해 언제나 고민 중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용산의 참사가 2년 넘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백수 취업준비생’을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언론사의 사장과 진행자와 프로그램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평등과 자유를 진전시키는 법률안들이 상정도 되지 못하는 국회의 모습을 보면서, 이미 디스토피아적 서사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 더 이상 진정 유의미한 역사 발전이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그 공포, 이미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희망의 목표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그 좌절, 내가 지금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 길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다는 그 절망, 이런 디스토피아적 감성이 우리 삶의 서사 위에 짙게 드리워 있는 것이다. --- p.20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 자체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다.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 신호가 열어젖히는 ‘공백기interregnum’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욱 근원적인 질문들을 먼저 대면해야 한다. 그 질문의 시작은 바로 ‘회의주의’와 ‘냉소주의’에 관한 것들이다. 과연 자본주의의 붕괴는 가능한 시나리오인가?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꿈꾸기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기획인가? 아직도 유토피아가 가능한가? 그것은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길로 우리를 이끌지는 않을까? ‘나도 잘 알아, 그러나’라는 형식으로 대변되는, 지젝이 말하는 ‘냉소적 페티시즘’의 일반화 현상에 대해 좌파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 p.126-127 파국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대면하는, 대면해야 하는 딜레마가 이것이다. 아포칼립스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사는 자세를 취할 수도, 현실의 자원에 대한 정교한 분석 없이 보편성과 평등에 대한 ‘열정’과 ‘광신’의 정치를 외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레이와 토스카노가 신자유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낸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딜레마에 대한 고민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정치politics’를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정치란 무엇보다도 현실이 본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딜레마의 상황 속에서 결단을 내리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일련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71-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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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과 구원, 아포칼립스와 유토피아의 지형학을 위한 첫 스케치
『파국의 지형학』은 국내 젊은 인문학자의 새로운 인문학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는 ‘하이브리드 총서’의 여섯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최근 인문학의 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파국, 묵시록, 종말 담론을 콜라주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그 지형도를 드러내고 있는 첫 스케치다. 사상 초유의 전 지구적 기상이변 현상과 세계적 경제침몰 그리고 개인적 삶의 파편화 등이 일반화되면서 아포칼립스 담론이 감염되듯 퍼지고 있다. 이 시대는 가장 실제적인 파국의 가능성에 직면한 시대이다. 저자는 아포칼립스 나우의 현상들을 ‘파국’이라는 용어로 포섭해 그 ‘지형학’을 펼쳐 보이며, 인류가 자신의 문화유산 속에 ‘파국’의 이중성을 기입해왔다고 설명한다. 인류의 창조와 종말, 새로운 시작과 유대-기독교 서사에서부터 기후급변과 자원 고갈, 경쟁격화로 인해 발생할 근미래의 대참사에 대한 포스트-아포칼립스 문화 텍스트들의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수많은 서사들을 만들어냈고 여전히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 ‘파국’은 언제나 끝이면서 시작인, 절망이면서 희망인, 디스토피아면서 유토피아인, 독이면서 약인 이중성을 가진다. 이 책은 이러한 파국의 상상력을 다룬다. 설계도가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고 울퉁불퉁한 콜라주로서 제시한다. 이 실현되지 않은 픽션과 우리 실제 일상의 변화 파국의 상상력은 우리의 일상을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누군가는 자살하며, 누군가는 망가지고, 누군가는 이용하며, 누군가는 흘러간다. 이 모든 누군가들 사이에서 또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애쓴다. 이 그림과 글과 사랑은 자신들이 처한 운명의 시간을 바꿀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에 작은 생채기를 내며 자신들을 둘러싼 시스템이 결코 뿌리 뽑을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한다. 그래서 저자가 그려내는 ‘파국의 지형학’의 한 유턴 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어쩌면 ‘아포칼립스’의 시간이 진정으로 ‘드러내는’ 유일한 미래의 비밀은 바로 이러한 ‘과잉’의 몸짓일 것이라고.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도를 그려나갈 하이브리드 총서 자음과모음에서는 2011년 젊은 인문학자들이 지금-여기의 다양한 인문적 글쓰기를 시도한 ‘하이브리드 총서’를 선보여 한국 인문학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다. ‘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 한국 인문학의 새 지형도’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통섭’의 학문하기가 한국의 환경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로 기획된 하이브리드 총서는 문학평론가이자 작곡가인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여성학자 권김현영 외 5인의 『남성성과 젠더』, 문화비평가 이택광의 『이것이 문화비평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정진열·김형재의 『이면의 도시』 등 5권을 통해 성공적인 행보를 내디뎠다. 국내 젊고 의욕 있는 학자들의 야심 찬 학문적 실험과 매력적인 글쓰기가 한데 어우러진 보기 드문 총서로서, 익숙한 대상들을 낯선 시각과 실험적인 방법론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낸 이들의 탐구는 오늘과 이 땅의 구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대중들과 연구하려는 인문학도들이 두고두고 참조해야 할 중요한 판본이 될 것이다. 이현우, 정여울, 이승우, 복도훈 등의 근간도 준비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