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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 광인의 글쓰기 1.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와 천사의 언어 * 영의 세계 * 천국의 시간과 공간 * 천국의 말과 글 * 천국의 소통과 인간의 소통 1-1. 스베덴보리에 대한 철학자 칸트와의 가상 대화 * 프롤로그 * 염소 선지자 얀 파브리코비치 코마르니키 * 머리의 병에 대하여 * 에필로그 2. ‘지금’을 잡으려는 손: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글쓰기 * 글쓰기의 물질성 * 끊임없이 쓰기 * 글쓰기의 육체성과 물질성 * 행동하기와 글쓰기 * 육체의 흔적, 육필 3. 진리에 대한 순교자적 열망: 다니엘 파울 슈레버 * 근대 과학자들의 순교자적 파토스 * 글쓰기와 육체 * 언어라는 수단 * 신경언어와 사유 강제 * 탈의미화 * 손의 흔적 2부 근대, 광기, 예술 1. 근대와 광기: 막스 노르다우, 《퇴행》 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 빌헬름 딜타이, 《시적 상상력과 광기》 4. 체사레 롬브로조, 《천재와 퇴행》 5. 카를 야스퍼스, 《스트린드베리와 반 고흐》 6. 한스 프린츠혼, 《정신병자들의 조형 작업》 3부 광기와 철학자 * 철학자의 몸 * 칸트의 일과 * 병적인 열정 대 도덕적 의무: 마리아 폰 헤르베르트 * 칸트와 무감성적 주체 * 칸트와 성관계 * 성관계의 주체 후기 도판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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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언어는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공허하고 엉뚱한 것으로 만들고, 내가 확신했던 진리가 그 진리적 가치 속에서 기록되지 못하게 한다. 하나의 진리에 대해 확신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나의 행위 속에 연루되어 있는 시간과 언어가 내가 확신하는 진리와 쓰여진 진리 사이에 거대한 심연을 만들어놓는다. 나는 내가 확신하는 바로 그 진리를 기록하지 못하며, 기록했다 하더라도 그 쓰여진 것에서 정작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지 못한다. 내적 확신으로 존재하는 진리와 그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간극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확신하는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은 쓰여질 수 없는 것일까? 쓰여진 것 속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1부 광인의 글쓰기」중에서 스베덴보리 이후 글 쓰는 광인들은 그 누구보다 언어에 대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내면의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과, 어떻게든 진리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전도자적 소명 의식은, 가장 먼저 인간의 언어를 만나 치명적인 좌절을 겪는다. 인간의 언어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나의 고통, 나의 정념, 내가 깨달은 진리에 최적화되어 창조된 창조물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무도 많은 사람에 의해 남용되어왔던, 아무리 해도 나의 것이 아닌 불결한 수단이다. 언어는 나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 나를 만나기 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품을 거쳐 내 앞에 온,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애인인 것이다. ---「1부 1장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와 천사의 언어」중에서 강박적 글쓰기, 끊임없는 글쓰기는 글쓰기에 수반하는 시간성을 극복하려는 힘겨운 투쟁이었다. 그것은 삶의 순간을 ‘바로 그 순간’ 포착해 기록함으로써 ‘지금’에 붙들어두고자 하는 열망이었고, 그 ‘지금’의 내적 확신을 순식간에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시간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그 저항은 스베덴보리에게는, 천국과 지옥의 실상을 알려 말씀의 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종교적 사명감의 모습으로, 슈레버에게서는 굴욕과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이 체험한 진리를 알 리고자 하는 순교자적 열망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 한 인간이 경험한 감각과 생각은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고 내적 기억(스베덴보리)이나 신경으로서의 영혼(슈레버)에 보존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부 2장 ‘지금’을 잡으려는 손: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글쓰기」중에서 노르다우의 《퇴행》은 19세기 말 삶에 일어난 급격한 물질적 변화들과 그 변화로 인해 생겨난 문화적?예술적 현상들을 대하는 당대의 보수적 감수성을 대변한다. 노르다우에게 오늘날 ‘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당대의 새로운 문화와 예술 현상들은 과도한 피로와 자극, 신경의 고 갈로 생겨난 병리적 현상에 다름 아니었다. 이 책이 당시 전 유럽에 걸쳐 큰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이 책이 당대 보수적 감성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근대적 현상들에 대해 느끼던 불만과 불안을 언어화시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2부 1장 근대와 광기: 막스 노르다우, 《퇴행》」중에서 광인과 예술가-천재의 이 차이점은 그들이 벌이는 행위와 활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만든다. 현실적인 것의 한계들로부터 ‘자유로운’ 광인의 행동이 병리적 강박이나 망상이라면, 상상력을 통해 현실적인 것의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예술가의 행위는 유희가 되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인형을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는 광인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강박적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이는 상상력을 통해 그 인형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2부 3장 빌헬름 딜타이, 《시적 상상력과 광기》」중에서 그림이나 조각물에 형상화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인물 등을 우리는 그 제작자 내면에 떠오른 표상이나 이미지의 모사라고, 따라서 모사 경향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묘사된 대상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상징일 수도 있다. 상징은 이처럼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 속에서 추상적인 것, 정신적인 것, 초감각적인 것”을 표현하는 조형물들을 말한다. 프린츠혼에 따르면 인간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가시적이지 않은 감정-표상 복합체를 시각적 형상화에서 드러내려는 경향”인 ‘상징 욕구’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 상징들뿐 아니라 다양한 기호나 문자도 가시적인 대상을 통해 비가시적인 감정과 표상 복합체를 지시하려는 상징 욕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2부 6장 한스 프린츠혼, 《정신병자들의 조형 작업》」중에서 칸트가 이상적으로 삼는 주체는 베르테르 같은 인물과는 매우 먼 대척점에 서 있다. 그 주체는 열정과 경향과 같은 내적 감정은 물론, 외적 위협과 자극에 직면해서도 늘 이성적 능력의 우위와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 합리적 계산과 관리를 경멸하고, 소모적이고 공격적인 정념에 자신을 내맡기는 베르테르와는 반대로, 칸트적 주체는 스스로가 허락한 욕구나 감정만을 충족하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름 모를 감정에 사로잡히고, 알지 못할 무언가에 의해 촉발되며 귀결을 알 수 없는 열정에 빠져드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다. ---「3부 광기와 철학자」중에서 칸트에게 성적 향유를 위한 성관계는, 자신 육체의 일부?성 기관?를 상대가 사용하도록 제공하고, 자신은 상대의 그것을 사용하는 상호적인 성기 사용이다. 이러한 상호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거기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사물화를 극복하고 손상된 개인의 인간성이 회복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칸트에게서 성적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성 공동체가 계약적 성격을 갖는 부부 관계가 되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칸트에게 부부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개인이 그들의 성적 특성을 평생 동안 상호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맺어진 관계”(§24)다. […] 칸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상대의 향유를 위해 한 성이 자신을 제공하고 제공받는 행위는 부부라는 조건에서만 유일하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 조건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25) ---「3부 광기와 철학자」중에서 성관계에 임하는 칸트적 주체는 타인의 육체로부터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 주체는 자신의 성적 향유를 위해, 자위를 위해,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는 상대의 성기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사물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그 사물화된 육체는 그로부터 “반응”과 ‘대답’이 기대되는 주체가 아니라, 다만 나의 성적 자극을 고양하기 위한 객체일 뿐이다. 그 대상이 여기에서 요구되는 수동성에서 벗어나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반응”한다면 그 대상을 ‘사용’하려던 주체는 오히려 화들짝 놀라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자신의 성적 향유는 사라질 것이다. 설사 어떤 “반응”을 기대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를 향해 열려 있음으로써 비로소 생겨나는 육체적 교감의 지표가 아니라, 성기에서 분비물이라는 ‘반응’이 나올 때까지 온갖 실험을 벌이는 일본식 포르노그래피에서처럼, 성적 향수를 위해 행한 자신의 의식적 행위로 얻게 된 인과적 보상물이라는 의미만을 지닐 것이다. 외적 자극에 대해 무감해짐으로써 자신을 지키려는 자율 훈련적 주체는 이렇게 성관계에 있어서 성도착자가 된다. ---「3부 광기와 철학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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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는 우리가 영원히 풀지 못할 세상의 비밀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주목해야 할 ‘정상성’의 개념인가? 광인의 내면세계를 다각도로 들여다본 흥미로운 인문서 광기라는 개념이 남긴 파장을 통해 인간의 ‘초월’의 잠재성, 우리가 포기한 삶의 가능성에 다가서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른바 ‘정상성의 세계’라 부른다. 이 세계에서는 명백한 이성과 확실한 경험에 근거에 삶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부합한 것만이 정상적인 것이고 ‘우리’라는 범주에 들어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범주를 벗어나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들은 배제되고 격리되고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광기(狂氣, Wahnsinn)’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개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광기는 “미친 듯한 기미” “미친 듯이 날뛰는 기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는 뜻으로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친”은 정상성 안에서는 잘못된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지양될 수밖에 없다. 광기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은 근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 때의 인식은 현재의 인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고대 그리스 이후로 광기는 창조성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으로 여겨졌다. 철학자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신에게서 오는 광기가 사람들에게서 유래하는 분별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며 광기를 유익한 것으로 설명했고, 광기 없이 단지 기술만으로 쓰여진 시는 결코 온전한 시가 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창조성의 동력으로 광기를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계몽의 시기를 거치며 광기는 사람들에게 이성이 아닌 것, 잘못된 것, 격리하거나 치료해야 할 인간의 정신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관념론적 철학과 미학적 개념을 대신에 등장한 경험적 ? 실험적 관점을 통해 예술가-천재와 광기에 대한 관계는 예전과는 다르게 그려지기 시작했고, 현대 예술 담론에 이르기까지 광기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광기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우리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광기’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그것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고 우리가 끊임없이 지향하고 현실에 구체화시키려고 한 그 무엇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배제하고 관심 갖지 않던 광기와 그에 사로잡힌 광인들의 모습 속에서 오히려 ‘정상적이고, 또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듯한’ 사유와 삶의 가능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광기, 예술, 글쓰기》의 저자는 바로 여기에서 이 책의 논의를 시작한다. 비정상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광기’라는 개념을 추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정상적인 것으로서의 ‘광기’를 소위 정상성의 세계 안에서 다시 논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인 동시에 다소 ‘낯선’ 관점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 이유다. 《광기, 예술, 글쓰기》는 광인의 내면세계를 자세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갇혀 있는 ‘정상성’의 경계들을 초월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단념해야만 했던 삶과 사유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적했던 사람들이었음이 바로 그들이었음을 저자는 ‘발견’한다. 광인들은 우리가 포기하고 단념해야 했던 가능성들을 끝까지 추적하고 실행해 결국 현실로 만들었다. 저자는 광인들이 만들어낸 세계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유와 삶의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이야기하며 독자를 지적 탐색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세계 내 존재로서의 광인의 현존재 구조에 관한 독특한 사유의 포획과 변주는, 독자들로 하여금 지치지 않고 이 여정에 동참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어준다. 광인의 내면세계에 관한 저자 김남시의 사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의식적 토대를 바탕으로 그 절대성을 점점 견고하게 만들어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다시금 진실하고 투명한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광기라는 파장이 남긴 흔적들을 하나로 모음으로써 결국에는 ‘투명한 소통, 진실한 소통으로의 지향’을 추구하고 다시금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과 사유의 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 김남시의 ‘진실한 말’이며 독자인 우리가 함께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대화’의 요체이다. 풍부하고 논리 정연한 글을 통해 마치 르네상스적 지식인과 대화하는 듯한 지적 탐색의 여정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저자 김남시의 독특한 사유는,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서로를 향한 진실한 소통, 투명한 소통으로의 말과 글에 대해, 예술에 대해, 그리고 광기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가 포기했던 삶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할 것이다. 광인의 현존재 구조에 관한 사유의 포획과 변주 르네상스적 지식인과 대화하는 듯한 지적 탐색의 여정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광인의 글쓰기’에서는 광인들의 글과 글쓰기를 다룬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와 바슬라프 니진스키, 다니엘 파울 슈레버는 자신의 내적 충돌과 갈등까지도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내고 소통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간성과 언어의 일반성, 즉 시간과 언어의 문제를 넘어서려는 것이 이들 광인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근본 지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의 글에서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 언어를 통해 행할 수밖에 없는 글쓰기의 숙명에 대해 터져 나오는 통찰을 얻게 된다. 그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하는 소통의 가능성을 글쓰기의 실천에서 찾고자 했다. 자신의 글에서 시간을 지우려 하고 근육의 움직임, 필기도구의 미세한 떨림 하나까지 남김없이 포착하고 기록하려 했던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내적 확실성이나 진리를 아무 거짓 없이, 남김 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되새기게 한다. 2부 ‘근대, 광기, 예술’에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성행했던 ‘천재-예술-광기’를 둘러싼 담론을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새로운 학문적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한 정신의학이 광기와 광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접근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광기와 예술적 천재성에 대한 논의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광기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오래된 인식을 벗어나게 했다. 그리고 이는 19세기 근대라는 삶에서 이루어진 전대미문의 현상들(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병리적 정신 현상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도 앞의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광기와 예술에 관해 이 시기에 출간된 막스 노르다우의 《퇴행》,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한스 프린츠혼의 《정신병자들의 조형 작업》을 비롯한 몇몇 책의 핵심을 짧게 개괄하며, 광인과 예술가 개념의 근저에 놓인 학문적 욕구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3부 ‘광기와 철학자’에서는 계몽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와 사유에서 드러나는 이성의 타자에 대한 불안과 경계를 추적하며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0세기 초 많은 문화 예술가가 벗어나고자 했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는, 상당히 오랫동안 인류 문화를 지배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주지하듯, 임마누엘 칸트는 “너의 이성(Verstand)을 과감히 사용하라”는 슬로건을 통해 이성적 사유의 확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계몽주의 철학자였고, 경험에 근거한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에 각기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근대의 철학적 기초를 정초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의 근거를 철저한 도덕적 의무감과 결부했고, 많은 일화가 말해주듯, 칸트 자신이 삶에서도 이성적 판단과 강한 도덕적 신념을 훼손할 수도 있는 지나친 정념과 열정으로 멀리하는 엄격한 자기 관리와 청교도적 결벽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근대적 인간의 전범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삶의 태도를 좀 더 미시적으로 관찰한다. 칸트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 신체의 감각과 느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사랑이라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정념과 열정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칸트에게 결혼은, 혹은 성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을 추적하는 동안 우리는 이성의 철학자 칸트가, 매우 역설적이게도 앞에서 본 광인들의 어떤 모습들과 겹쳐져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3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 이 책에서 말하는 광인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초월의 가능성을 통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기투한 존재다. 광인은, 온갖 물질적 조건과 제약을 지닌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거기에 자기 자신을 적응시키는 대신,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초월’의 잠재성을 한껏 발휘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새롭게 기투한 존재다. 광인은 그 세계 속에서, 그러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세계를 감지하고, 사유하고, 너무나도 일관되게 행동한다. 우리의 삶이 결여한 이 일관성이야말로 우리에게 결핍된,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광인을 낯설게 만드는 진귀한 미덕일 것이다. 내가 이러한 광인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광인이 만들어낸 세계야말로, 우리가 경험했으나 포기해버린, 우리가 사유했으나 행위하지 못한 것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광인은 우리가 여러 이유로 더 발휘하지 못했던 ‘초월’의 잠재성을, 소위 정상성의 세계에서 일관적이지 못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단념하고, 그에 따라 살기를 접어야 했던 사유와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머리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