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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Paul Schre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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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그리고 아내와 함께 집에서 살기 위해 조만간 이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것을 결심한 이상, 내 주위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 최소한 나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대략이나마 알려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는 그것을 통해―비록 완전하게는 아닐지라도―나의 행동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이상한 점들을 그들이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며, 최소한 나로 하여금 그런 이상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어떤 필연성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p.21 이후 일어난 일들에 근거하여, 나는 내 신경병이 치료되기 힘든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누군가가 나에 대해 영혼 살해를 시도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첫 번째 영혼 살해가 일어난 후, ‘식욕은 식사를 함으로써 생겨난다’는 원리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도 영혼 살해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저 첫 번째 영혼 살해가 진정 한 인간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답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문제들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명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들이 서로 질투해서 시작된 싸움이 그 발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 p.47 내 삶에서 중요한 국면이라 일컬을 만한 또 한 번의 신경 몰락은 1894년 2월 15일경에 일어났다. 그때까지 매일 몇 시간씩 나와 함께 있었고 또 점심식사도 정신병원에서 함께 하던 아내가 나흘 일정으로 베를린에 있는 그녀 아버지에게 여행을 갔을 때였다. 그 나흘 동안 내 상태는 너무도 악화되어서, 나는 아내가 돌아온 뒤 단 한 번 그녀를 만나고는 그런 끔찍한 상태에 있는 내 모습을 그녀가 계속 보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부터 아내의 방문이 없어졌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간혹 건너편 방 창문에서 아내를 보았을 때는, 이미 내 주위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변화들이 생겨난 터라, 나는 아내에게서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다만 ‘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적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 형상을 보았다 믿었다. 나의 정신적 붕괴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하룻밤 동안 범상치 않을 만큼 많은 몽정(아마도 대여섯 번)을 했던 어느 날 밤이었다. --- p.70 그런 이유로, 대량으로 내 몸속에 들어온 여성 신경 혹은 쾌락신경들은 일 년이 넘도록 내 태도와 사고방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그 신경들이 자극될 때마다 나는 내 남성적 명예를 동원해서, 나를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생각들의 성스러움을 통해 그것들을 억압했다. 따라서 내 몸에 여성 신경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불안감에 몸을 떠는 여자 같은 인간으로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광선이 그 신경을 갑자기 자극해서 일부러 요동시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의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내 의지력으로 침대에 누울 때 내 몸에 쾌락감이 생겨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p.163~164 그런데 환자는 현재 자신의 ‘회상록’을 (여기 첨부된 그대로) 출판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려는 강한 바람을 내세우고 있으며, 그를 위해 출판사와 협상 중에 있습니다(당연하게도 지금까지는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에 실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 우려스럽고 미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무절제한 상황과 사건의 묘사, 외설적 표현 등을 고려하면, 평상시엔 분별력 있고 세심한 한 남자가 자기 명예를 공공연히 훼손할 만한 행위를 하려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의 세계관이 병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현실에 대한 시각이 부재하며, 병적 상태에서 기인한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지켜야 할 한계에 대한 그의 인식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베버 박사의 2차 감정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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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번역이라면 모름지기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함께 옮겨야 한다면, 영어 번역자들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어 번역에도 해당된다. 이 번역은 타협의 산물이다. 슈레버의 증상적 문장을 되도록 그대로 전하려던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한국어 문장의 끔찍한 비가독성 앞에서 좌절했다. 오랜 고심 끝에 번역문의 가독성을 위해 언어적 징후들을 치유하는 길을 택했다. 긴 문장은 짧게 나누고, 어색한 수동문은 능동으로 바꾸었다.
옮긴이 주석을 통해 독일어 원문에 있는 중요한 언어적 요소들의 의미를 전달하려 노력했지만 슈레버 독일어의 낯선 증상은 어쩔 수 없이 치료되어 번역되었다. 그 결과물인 이 번역에서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낯선 언어들을 만날 것이다. 그것은 슈레버의 언어적 증상의 흔적일 수도, 번역자의 부족한 능력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래도 한국의 독자들도 드디어 슈레버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 모든 부끄러움을 감수하게 한다.” (‘옮긴이 해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