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궁금해하며 자신만의 답도 써보기 시작했다. 퀴퀴한 냄새가 나던 방 안에서도, 한 밤의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서도, 옥상에 누워 별을 보면서도, 해지는 걸 보던 자리에서도, 어떤 이의 기습으로 혹은 스스로 떠올린 물음으로, 잊고 지내던 질문들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나를 궁금해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p.49
아주 어렸을 때 만난 친구들은 취향의 공통분모가 있다거나, 이야기가 잘 통해서라기보다는 정말 사소한 이유로 친해지게 되니까. 사는 동네가 같다든가, 집 방향이 같다든가, 같은 반이라든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든가, 대개 이런 이유들이니까.
나는 가끔 새로운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남의 되풀이도 금방 지치게 될 것을 모르고 말이다.
--- p.52
한심하게 보인 대도, 내가 그 밤 덕에 숨통이 트였다면 그만 아닌가. 나도 언젠가 그 밤의 바깥에서 한심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막상 그 밤 안에 들어가자 한심으로 엮어 낼 수 없는 게 있었다. 바깥은 한창 여름을 가리키고 있었고, 우리는 여름과 꼭 닮아 있었다.
--- p.69
매일 그 밤 안에서도 그 밤을 그리워했고, 그 장소 안에서도 그 장소를 그리워했고, 그 사람들과 있으면서도 그 사람들을 그리워했다. 공기, 바람, 그 안에서의 감정, 그리고 두 달 동안의 내 모습도. 눈앞에 두고도 그토록 그리웠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 p.76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내 귀를 어지럽힐 때 〈프란시스 하〉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우리 다른 이야기 말고 쟤들처럼 아찔하도록 뜨거운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 p.97
몽골을 갔다 온 뒤로도 어떤 건 계속 남아 변하고, 채워졌다. 공식적으로 여행은 끝났지만, 그 끝이 꼭 끝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계속 여행 중이었다.
--- p.111
당근 케이크와 카푸치노, 강변과 책, 아까 산 꽃이 전부였는데 편안한 마음이 차오르는 게 너무 좋아 간지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그냥 이 정도면 됐다. 나도 거기 있는 사람들처럼 눈부신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박한 행복으로도 눈부신 표정을 만들어내는, 가장 나다운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 p.127
사실 난 이렇게 제멋대로 여행하고 있는 내가 마음에 든다. 목적지 없이 가방을 짊어지고 나가 아무 데나 쏘다니는 내가 좀 마음에 든다. 아무 벤치나 앉아 책 읽고 일기를 쓰는 것도, 잔디에 천 돗자리를 깔고 누워 책 읽는 것도, 없으면 그냥 누워버리는 것도,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곳에 막 들어가는 것도, 그러다 몇 번이나 찾을 정도로 단골 공간을 만들어버리는 것도 좋다.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함을 얻은 이 여행이 마음에 든다.
--- p.143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어떤 타이밍은 믿는다. 때마침 그런 이야기가 나를 찾아온 타이밍 같은 거. 엄지 이모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싶었다. 내 여행이, 내가 좋아 죽는 글이 얼마나 중요하다 한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피곤하다 한들, 여기 이 사람, 이 분위기, 이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고. 네가 좋아 죽는 글에서만 살다가, 지금을 놓치지 말라고. 지금부터 살라고. 타이밍 맞게 그 이야기가 내게 도착했다.
--- p.157
누구는 겨우 책 한 권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책 한 권으로 어떤 사람이 몰려오기도 하는 법이었다.
--- p.190
빈센트 그림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작가의 순수한 열정을 생각했다. 자기가 본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너무 보여주고 싶어 그림을 그렸던, 그림밖에 모르는 빈센트의 순수한 열정을 생각했다. 나는 두 순수한 열정을 생각하다, 내가 가진 열정을 생각했다. 모르는 채로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이제는 알게 된 나의 순수한 열정을 떠올렸다.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된 어떤 마음에 대해서였다. 쓰는 일에 대해서였다.
--- p.191
여행 중에 나는 자주 게을러진다. 아니 게을러지려고 한다. 나는 게을러지는데도 연습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쉴 때도 끊임없이 뭐든 하고 있었고, 어쩌다 가만있게 될 때면 불안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바빴다. 몸이 바쁘든, 마음이 바쁘든 반드시 하나 이상은 움직이고 있었다. 종종 내 그런 면은 나를 갉아먹었다. 몸도 마음도 어떨 땐 그냥 내버려 둬야 했다. 아니면 상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 p.195
카페로 들어가니 짧은 커트 머리 여자가 봉주ㅎ~하고 인사했다. 4년 전 파리에 왔을 때 ‘봉주르’하고 또박또박 발음했던 내 인사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아 저렇게 발음하는 거였구나. 저런 톤이었구나. 나는 봉주ㅎ~ 하는 상냥한 인사가 마음에 들어, 혼자 몇 번이나 따라 했다.
--- p.198
이제 더 이상 행복하다는 말에 까탈스럽게 굴지 않기로 했다. 왔을 때 흠뻑 행복을 남발하기로 했다. 행복을 말로 다 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 되어 선명해지기도 했다. … 행복을 입에 담는 누군가에게 반발심을 일으켰던 내 모난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신기하게도 행복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런 날이 있었다.
---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