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2년 0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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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6쪽 | 400g | 135*200*20mm |
ISBN13 | 9791168949577 |
ISBN10 | 1168949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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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 2022년 0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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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6쪽 | 400g | 135*200*20mm |
ISBN13 | 9791168949577 |
ISBN10 | 1168949572 |
구어, 지역방언, 신조어, 노동 현장의 언어, 이주민의 한국어… 한국어가 아닌 한국어‘들’로 지금, 여기를 낯설게 살펴보다 ‘오함마’에서부터 ‘할말하않’까지 ‘뭔가 다른 말들’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회언어학자의 일상 언어 관찰기.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외계인’의 눈으로 살펴본다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우선 하나의 언어, 하나의 영토,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위일체의 신앙에서 벗어나는 수많은 한국어‘들’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단 이런 한국어‘들’을 발견하게 되면 다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다라이’ ‘벤또’ ‘빵꾸’ ‘구루마’ 같은 말들은 식민 시대의 잔재인 일본어일까, 지역방언일까? ‘미싱’이나 ‘오함마’, ‘공구리’ 같은 노동 현장의 언어는 꼭 순화되고 고쳐야 하는 언어인 걸까? 이 땅에 존재하는 250만 이주민들의 언어(와 그 차이)는 한국어로 볼 수 있는 걸까? 이 책은 위와 같은 수많은 ‘왜?’에 대한 의심과 탐구로 채워져 있다. 그럼으로써 성별도, 연령도, 계층도, 국가도 모두 다른 다종다양한 언어 사용자와 이들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 이를 둘러싼 삶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
프롤로그: 우주선이 도착했다 1. 낯선 한국어의 세계에 어서 오세요 : 표준어와 일상어를 대하는 우리들의 온도 차 혀의 연대기 / 다중 우주, 아니 다중 언어를 상상하라 / 사전에 빵꾸 내기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다시 찬드라의 경우 [책 속 칼럼] 금지된 언어1 2. 지금, 여기 말들의 풍경 : 폭력과 재난, 혐오와 차별의 현장에서 말들의 풍경 / 어느 식민지 출신의 고백 / 당신의 혐오가 당신을 찾아온다 / 긴 의자 / 분노를 팝니다 / 금지된 글 / 1956년 5월 18일, 맑음 / 한국인이라는 문제적 집단에 대하여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너의 이름은 [책 속 칼럼] 금지된 언어2 3. 지금, 여기 배움의 풍경 : 한국어 교실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다 시험에 대한 열정 /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 / 만날 수 없잖아 느낌이 중요해 난 그렇게 생각해 / 한국어, 착취의 언어 / 그녀가 갈 수 없는 곳 [책 속 칼럼] 금지된 언어3 4. 그 말은 ‘진짜’가 될 수 있나요? : 언어와 그 너머의 것들 근로하지 말고 노동하라 / 도둑맞은 말 / 보이지 않는 도시 / 현실은 글자 네 개 밖에 있다 / 용서, 불가능한 / 인공지능이라는 가짜 믿음 / MBTI와 나 / 시간의 재발명 / 아파트 에필로그: 나의 자매들에게 그리고 남은 말들: 한국이라는 ‘언어의 서식지’를 탐구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들 |
그는 제주 출신이다. 나는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없는데, 나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 그중에서도 사투리에 관한 얘기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가 없다. 그의 문제 의식은 고종석이 우리나라의 언어가 단일하지 않다고 한 것과 연결된다(저자 소개에 백승주는 고종석을 선생이라 칭하고 있다). 서로의 말을 해석해주는 매개자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같은 언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방영하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면 알 수 있다. 분명 한국어인데 자막이 나오지 않는가?
내가 제주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가끔 사투리를 해보라고 할 때가 있다. 난 안 한다. 말이라는 게 의사소통의 도구이지, 어떤 구경거리이지는 않은가? (모르는 이들에게 내 고향이 어디인지 맞춰보라면 맞추는 이가 거의 없다) 제주에 가면 사투리를 쓰냐고 묻는다. 쓴다. 아주 잘.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이지 않은가? 부모님과 잘 의사소통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곤란한 상황이 있긴 하다. 많은 ‘육지’ 사람이 있는데 고향 사람과 만났을 때다. 둘만 있으면 가끔 사투리를 쓸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서울말’을 쓴다. 역시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다.
이건 문어와 구어의 차이를 넘어선 것이기도 하고, 그 차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서울말’로도 구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지만, 사투리를 문어로 적지는 않는다(‘못한다’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서울말’과 사투리를 때와 장소에 따라 분명하게 구분하여 쓰는 것이 어쩌면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고, 편리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백승주는 여기에 대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방송에서 강호동은 경상도 억양을 잔뜩 담아 얘기할 수 있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노골적으로 쓰는(혹은 쓸 수 있는) 진행자는 거의 없다. 나는 나의 말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승주는 ‘사회언어학자’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짐작이 간다. 말을 연구하는데, 그 말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 지위 등을 연구하는 것일 게다(혹시 몰라 찾아봤는데, 이렇게 명쾌하게 정의되어 있다. “언어를 사회적 요인과 관련지어 연구하는 언어학”). 그래서 그는 당연히 언어와 사회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있다. 혐오의 언어가 파괴하고 있는 것들, 언어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노리는 것들, 외국인들이 배우는 한국어에 관한 것들(그는 교수가 되기 전 한국어교육원의 한국어 선생님이었다). 사회와 연관된 언어, 특히 한국어는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 권력에 대단히 취약하며, 착취의 언어로도 곧잘 작용하며, 아주 자주 차별의 언어가 된다. 그건 언어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나아가 사회의 문제다. 우리가 쓰는 말이, 언어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굳이 따지고 들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또 모르는 것들도 많다. 내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건 내가 기득권층의 일원이 되어버렸다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렇지 못함에도 그 자리를 노리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익혔다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남이 쓰는 말을 점검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그게 그것을 강제적으로 조절하고 바꾸려는 욕심이 문제다. 점검은 반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회 언어학자가 바라보는 한국어는 어떨까?
기대하며 책을 열게 되었다.
저자는 제주에서 태어났으며 10년간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중 한국어를 타자의 눈으로 보며 느껴진 내용이
담긴 도서이다.
실제로 언어라고 하면 표준어, 서울말이라는 게 문득 떠오른다.
언어에 대해 어쩌면 정말 외국인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말을
바라본다는 것은 새로운 시각일 것이다.
그 새로운 시각 속에서 바라보는 한국어에는
우리도 모르게 차별이 존재한다는 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문법은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문법이 발명되기 전에는
'틀린 말'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P41
나와 내 공동체의 기억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서사에 편입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4.3은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는 회색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P78
어떻게 보면 그렇게 지성인이 많고 학구열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내가 쓰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다양한 의미가 섞여 있을
줄은 뜻밖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에 우리가 쓰는 한국어와 표준어라는
기준을 통해 결국, 세밀한 의사소통의 한계는 물론 피할 수 없는
갈등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논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서 언어를 배울 때 어느 사람에게 배웠는지
어느 기관에서 배웠는지 생각해보다 보니 어쩌면 거기서부터
왜곡된 의사소통을 가르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모국인이 모국어를 잘 이해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무슨 대화를 했었던 걸까? 하며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경솔한 부분은 없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가짜뉴스가 많이 양산되는 것도, 그것을 분별해내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끊임없이 우리는 오염된 정보와 단어들을 민감하게 분별해내는
힘을 꼭 길러야 하는 시대가 왔다.
정보화시대에, 4차 산업을 앞둔 이 시기에 정말 작가는 불온서가
아닌 불온서를 쓴 듯한 느낌을 내 비췬다.
읽는 내내 정말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내용이다.
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작가는 이 도서를 통해 외치고 있다.
차분하게 뚜껑을 뒤집어 보며 한국어의 민낯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조금씩 차분하게 내가 쓰고 있는 언어들을
재점검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모두가 건강한 모국이 되길 기도해보며
나부터 변화해 나가야겠다.
이 도서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꼭 필요한 도서라고 생각이 든다.
백승주 저의 『미끄러지는 말들』 을 읽고
나 자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으로서 우리말인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우리말을 정말 이상 없이 어떤 대상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통용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는지는 나 자신 궁금하다.
솔직히 나 자신 지금까지의 성장과정을 통해 볼 때 정식 성장과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학사 과정과 교직의 직업 자리까지 거쳤지만 아직도 다양한 자리에 섰을 때 언어적으로 표현이나 색다른 언어 표현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며 한국말을 쓰면서 일정의 과정을 다 겪었으면서도 이런 어슴푸레 낯설음이 많다고 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고 고백해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당연히 이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인식을 깨우치는데 정말 따끔한 자극을 주는 글들이었다.
지금까지 너무너무 쉽게만 알고 취급하려 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여태 관심 밖으로 여겨왔던 필요한 구어, 지역방언, 신조어, 노동 현장의 언어, 이주민의 한국어 등등등
한국어가 아닌 한국어‘들’로 지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서 앞으로 관심과 함께 공부도 해나가야겠다는 각오도 다져본다,
“저도 사실 여러분과 같은 외국인이예요.”라고 밝히고 있는 저자는 한국의 변방인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면서 제주의 작은 방에서 보르헤스와 로맹 가리, 롤랑 바르트, 고종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생들을 만나 세상에 대해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제주를 탈출 육지로 사회언어학을 공부하고 지금도 현역에서 가르치고 있는 언어 학자이며 교수다.
저자는 출생부터 육지와는 다른 제주에서 성장하였고, 그 이후에도 바로 사회언어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통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활하면서 놓치기 쉬운 언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당연하다는 듯 지나치는 말들을 둘러싼 장면들에, 그 ‘접촉의 순간’들에 정지 버튼을 누르고, 이를 자전적 성찰과 정치한 메타포, 비판적 담화 분석과 SF적 상상력까지 품는 섬세한 글쓰기에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한 마디로 따끔하면서 나 자신을 질책하기도 하였다.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 속에서 말들의 의미는 고정되지 못하고 언제나 유예된다.”고 말한다.
유예되고 미끄러지는 말들을 붙잡아 언어-사람-사회의 관계를 그려 보려는 시도에서 우리말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더욱 더 공부와 함께 열심히 활용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각오도 다짐해본다.
이러한 글들은 저자가 2020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 중인 ‘언어의 서식지’라는 칼럼을 중심으로 다른 매체에 쓴 글들, 논문, 에세이 그리고 추도문 등을 함께 묶은 것으로 편찬한 것이다.
목차는 크게 표준어와 일상어를 대하는 우리들의 온도 차, 폭력과 재난, 혐오와 차별의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지금, 여기’ 말들의 풍경,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모순의 한국어 교실 등 언어와 언어 그 너머의 세계에 관한 주제를 다룬다.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는 순수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언어는 순수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에 대해서 생각할 땐 언어의 사용자인 사람들 간의 관계, 사람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야만 비로소 ‘자연화’되어 마치 상식처럼 존재하던 말들은 상식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러나 실제에 가깝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사람들 간의 관계, 사람들이 세상과 맺는 관계, 그 모든 관계사이에 언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언어의 모습은 항상 이쁘고 좋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노력하면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정녕 최고 공동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우선 언어로라도 혐오와 차별이 완전 없어지는 그런 사회가 구현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