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3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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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4쪽 | 504g | 140*200*25mm |
ISBN13 | 9791197918179 |
ISBN10 | 1197918175 |
발행일 | 2023년 0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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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84쪽 | 504g | 140*200*25mm |
ISBN13 | 9791197918179 |
ISBN10 | 1197918175 |
추천의 글 제목 없는 헌사 프롤로그 자미 에필로그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
지난 주 금요일 아침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밤에 읽으면 밤샘한다는 친구의 경험을 타석 삼아 아껴 읽으려한 자구책이었다. 오늘 아침이 어찌나 허전하던지, 빛이 다 사라진 계절이 닥치는 듯했다. 반가운 북토크 영상이 있어서 덕분에 속을 채워 집을 나섰다.
https://www.youtube.com/live/95O6bKYxo64?feature=share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얼굴>을 읽고 자신의 식민지성, 백인 우월주의, 흑인공포증을 생각해본다던 먼 곳의 친우의 글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미>를 추천했는데 여전히 오드리 로드는 자신에게 신인류 같아서, 읽기 싫기도 너무나 읽고 싶기도 하다고.
내 무심함은 주로 선택과 고민을 얄팍하게 한다. 불행과 폭력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 하는 오드리 로드식(?) 무심함은 사랑을 기록하여 이런 엄청난 작품을 만들었다. 왜 표지가 이토록 다채롭고 풍성하고 찬란해야했는지 읽고 나니 다 이해된다. 아름답다.
이벤트로나 기억되는 현실의 사랑은 참 볼품이 없다. 문자에 온갖 색조가 묻어 있는 책을 번역이란 생각 없이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실패 없는 황홀한 몰입이 내내 즐거웠다. 빨려 들어갈 듯한 시간 동안에는 나도 잠시 섬 여자처럼 빛에 타고 볕에 데워졌다.
“이 여성들이 가진 아프리카인다운 예리함에는 보다 부드러운 모서리가 있고, 그들은 비가 내리는 따뜻한 거리를 오만하면서도 점잖은 태도로 휘젓고 다니며, 나는 힘과 취약함 속에서 그 모습을 떠올린다.”
여행을 가고 싶지만 이미 잔뜩 쌓아둔 탄소마일리지가 어마어마해서 괴롭고, 오래 전 가려다 예방백신접종에 놀라 그만 둔 아프리카를, 아니 어디든, 이번 생에 다시 향해볼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고향을 찾지 못한 나는 어디에 가든 이방인일 뿐이겠지만,
“어디를 가든 온갖 색조의 갈색 얼굴들이 내 얼굴과 마주쳤고, 거리에서 나와 같은 피부색을 수도 없이 보며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완전히 새롭고도 짜릿했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사랑에 대한 관심과 같고 삶에 대한 간절함과 같다던 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처음 들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식욕이 없어서 혈당 조절 약처럼 식사하던 몇 달 간의 고역, 사랑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일도 힘들었고, 삶의 민낯은 무기력으로만 해석되었다.
“절구 바닥에서 으깨지는 향신료에 절굿공이가 부딪치는 낮은 소리와 함께 소금과 후추는 마늘고 셀러리 잎에서 배어나는 노란 즙을 흡수했다.”
꽃다발 장미에게 다시 뿌리가 날까 심어보았다. 딸기 모종도 곧 옮겨 심어야 한다. 파릇파릇 향기 진한 허브들도 심어야겠다. 키우고 따고 자르고 으깨고 먹는 그 시간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작품 속 색과 빛의 계절이 여름으로 도착할 것이다. 어쩌면, 설렐 것이다.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우리가 의지하는 진리들이 있다. 여름철엔 해가 북쪽으로 움직인다는 것, 얼음은 녹으면 작아진다는 것, 휘어진 바나나가 더 달다는 것. 아프레케테는 나에게 나의 뿌리를, 우리가 가진 여성의 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가르쳐주었고, 여태까지 나는 그 정의를 배우기 위한 훈련을 해왔을 따름이었다.”
난 인물과 인물들이 관계를 맺고 세상을 살아가는 소설을 잘 읽지 못한다. 특히 외국소설은 젬병이다. 어쩌다 유명한 책을 읽어야 할 때면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을 메모에 기록해서 읽어야 한다. 읽다가 이 인물이 누구인지 멍할 때가 있으며, 가끔은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냥 책 읽기를 포기하고 책은 내 손에서 떠나 멀리 우주 속으로 던져지기도 한다.
이번 책은 등장인물 메모라는 도우미 없이 그냥 읽었다. 가끔은 이게 누구였지하면서 읽은 부분을 다시 읽기도 했지만 주인공 오드리 로드만 기억해도 읽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책 표지 내용대로 오드리 로드의 자전 신화이므로 주인공 이외의 인물들은 그냥 오드리 로드의 마음에 ‘정서적인 타투’인지 그냥 ‘상처의 흔적’인지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이 책은 오드리 로드라는 흑인 레즈비언의 이야기이다. 어느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연인과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랑을 만나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책이다. 오드리 로드라는 어떠한 배경지식도 없이 그냥 마구 책을 읽고 난 뒤 그녀가 평생 인종주의와 성차별, 동성애 혐오와 싸워 온 흑인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활동가, 시인임을 옮긴이의 글에서 알게되었다.
이 책에는 인종주의에 대해 주인공이 철저하게 희생되는 것만 나온다. 또한 성차별에 대한 내용도 동성애 혐오나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녀가 레즈비언으로서, 아니 그보다는 흑인 레즈비언으로 살아왔던 젊은 오드리 로드의 이야기뿐이다.
원저는 어떤 문장으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은 마치 원래 우리글로 되어 있던 것처럼 술술 잘 읽힌다. 외국 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translation이 아니라 rewrite가 되어야 한다고 누가 그랬던 것 같다. 그래야 원작자와 제대로 대화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드리 로드와 일정부분 제대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회 전반에서 그러하듯 내가 흑인 사회건 동성애자 사회건 하위 사회에서도 남들과 다른 입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는 지나치게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받아들여지려고, 펨으로 보이려고, 이성애자처럼 굴려고, 이성애자처럼 보이려고,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보이려고, '괜찮아' 보이려고, 호감을 사려고, 사랑받으려고, 승인받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저 살아 있기 위해, 아니, 인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 노력을 하느라 내가 얼마나 더 강해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흑인 동성애지 오드리 로드의 이야기를 읽었으니 이제는 흑인 페미니즘과 퀴어 문학에 강렬한 자취를 남겼다고 하는 오드리 로드의 다른 책들을 읽으러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