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보 연수생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 시위를 하고 가족법 개정안을 추진했던 이태영의 정치적 결단을 가끔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태영이 남긴 말과 글을 찾아 읽는다. 이태영은 어떻게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과제들을 붙들고 ‘끈질기게’ 도전할 수 있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시간은 늘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우리들 생각으론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제 시간에 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무엇보다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할 때, 여성은 기꺼이 정치에 뛰어든다.
---pp.17-18 「장영은, ‘끈질긴 이 여자의 정치’」 중에서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시민사회의 간헐적 시도가 있어 왔지만, 본격적인 물꼬를 튼 것은 익명 인터넷 환경에서 만난 여성 인터넷 사용자들이었다. 국가가 외면할 때 단체를 조직해 피해자를 지원하고 모니터링을 한 것은 대부분 10대에서 20대 중반의 젊다 못해 어린, 제도권 내에서의 정치 경험이나 여성학적 지식을 익힌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도, 소속도, 나이도 모르는 채로 오로지 디지털 성폭력 근절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모였다.
---p.24 「백가을, ‘디지털 성폭력에 맞서는 여성 시민들’」 중에서
국제 여성단체 글로벌발룬티어는 여성의 역할을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 전통 지식을 배워 미래 세대에게 ‘가르치는 사람’, 저개발 지역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 단체에 따르면 세계에서 여성은 농업노동력의 43%를 차지하는데 이 수치가 70%까지 올라가는 지역들도 있다. 여성은 가족을 먹여 살릴 궁리를 하고 식단을 짜는 사람이다. 환경 파괴의 피해를 가장 먼저 깨닫는 지구의 카나리아들이고, 땅이 마르지 않게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고, 토착민의 지혜를 많이 아는 사람들이다.
---p.57 「구정은, ‘지구를 지키는 여성들’」 중에서
“내가 『미래에서 온 편지』라는 책에서 살림이스트 선언을 한 게 20년 전인데 동물해방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이 나보고 “살림이스트 원조세요?” 하는 거예요. 그들이 살림이라는 코드로 동물해방과 비거니즘을 풀어가는 게 너무 놀라워요. 어쩌면 내 세대의 살림이 철학적인 지향이었다면 여러분 세대의 살림은 실존적인 지향이 됐어요. 죽임의 순간이 너무 가까워졌으니까요. 그럼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에코페미니즘의 전망이 너무 커진 것 같아요.“
---pp.68-69 「현경+윤석+희연, ‘아픈 것, 사랑하는 것, 온전함을 찾아가라’」 중에서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고대 그리스 기둥 양식을 설명하며 장식 없는 도리아식은 남성을, 부드러운 곡선의 이오니아식은 여성을, 화려하고 장식적인 코린트식은 처녀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를 계승한 르네상스 이후 건축에서 건물을 남성과 여성에 비유하는 방식은 일반적이었다. 남성적인 건물은 견고하고 단순하고 엄숙하고 수직적이며, 여성적인 건물은 허약하고 복잡하고 가볍고 수평적이라는 이항대립의 문학적 은유가 사용된 것이다. (…) 근대 건축의 대표적 특징인 ‘투명성’도 그중 하나다. 투명함은 베일에 가려진, 어둡고 제한된, 경계가 불확실하고 모호한 모태 공간과 대비되어 남성성을 표현했다.
---p.118 「남상문, ‘기후위기로 도전받는 투명성의 신화'」 중에서
나는 통일을 염원하지는 않지만 남한과 북한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롭게 통합하기를 바란다. 군대 문화에서 ‘원산폭격’의 이름을 딴 가혹 행위가 서사하듯 지역에 새겨진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기를. ‘원산 서핑 클럽’의 원대한 플랜이 실현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원산’ 하면 ‘서핑’이 절로 떠오를 것이다. 마치 ‘춘천’ 하면 ‘막국수’가 꼬리표마냥 붙는 것처럼. 남북한과 세계 각국의 서퍼들이 어우러져 원산 바다를 공유하는 풍경을 상상해 보시라.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이 파도를 타며 염원했던 영적인 서핑 문화가 현대적으로 부활한 모습 아니겠는가.
---p.137 「편지지, ‘원산 서핑 클럽’」 중에서
성공한다면 핵융합은 인류가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폐기물의 독성이 적고 원료는 풍부하며 발생하는 에너지도 풍부할 것이다. 하지만 실험이 성공하고 나아가 모든 공학적 난관을 이겨내고 상업화 성공을 이룩했을 때의 일이다. 이를 위해 가야 할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겨내도 빨라야 2050년이다. 더 늦어질 가능성도 매우 높다. 에너지 문제 해결, 나아가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매달리기에는 시점이 너무 늦다.
---p.176 「윤신영, ‘‘꿈의 에너지’ 핵융합, 수사에 가려진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