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센나는 단순한 중개자 이상이었고, 독자적인 의학적 연구를 발전시켜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당시 모든 의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별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고 의학과 점성술적 연관에 주목했다. 전반적으로 아랍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독창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는 알하젠의 예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쓰는 모든 숫자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다. 우리의 숫자들은 바로 아랍에서 탄생했고, 전세계에서 예외 없이 사용되고 있을 만큼 매우 훌륭한 것이다. 아라비아숫자, 이는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하고 널리 수용된 기호체계이다.
--- '알하젠과 아비센나' 중에서
라부아지에의 중요한 성과가 무엇인지를 한 문장으로 답하라고 하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라부아지에는 저울로 화학의 혁명을 달성했다.” 체계적이고 지능적인 저울 사용으로 화학은 비로소 정밀한 과학이 되었다. 여기서 당연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라부아지에가 정확한 분석을 위해 꼭 필요한 고품질의 저울을 만들거나 구입하려고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사실이다. 저울을 통해 신중하고 고집스럽게 측정한 결과 라부아지에는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기본 원칙을 수립할 수 있었다. 아주 단순한 원칙이다.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앙투안 라부아지에'중에서
패러데이는 강의 내용을 신중하게 필기했고, 이 노트를 집에서 공부하며 결국 책으로 묶어냈다. 이 작은 책이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 경이 실험실에서 작은 사고를 당해 실험조수를 채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패러데이가 강의노트를 필기했다는 사실을 들은 경은 1813년 그를 채용했다. 패러데이는 이제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갔다. 데이비에게서 1주일에 고작 1기니만을 받았던 그는 제본공으로 일할 때보다 벌이가 더 적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경력 대부분은 22세 때 실험조수로 들어간 이 왕립 과학연구소에서 형성되었다. 패러데이는 연구소에서 조수와 정회원 자리를 거쳐 1825년 주임에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봉급은 여전히 적었기에 강의 형태의 부업으로 살림을 꾸려갔다.
---'마이클 패러데이'중에서
윈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것도 자신의 사촌과, 정확히 말해 웨지우드 가문의 엠마라는 여성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야 그는 친척과의 결혼이 2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걱정을 했다. 다윈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데 느리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예컨대 색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올바로 배열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를 걱정했다. 특히 사랑하는 딸 애니가 메스꺼움을 하소연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 오늘날 말로 하자면 ― 유전적인 조건 때문이며 이 요인이 애니에게도 발현된 것일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1851년 딸이 고작 10살에 세상을 떠나자, 다윈은 너무 큰 충격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찰스 다윈'중에서
그들은 다음해 물리학 노벨상을 받았다. 오늘날이라면 대사건이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별반 주목하지 않았다. 노벨상이 생긴 지 얼마 안된 때라서, 상을 받는 일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공공의 떠들썩한 사건은 아니었다. 퀴리 부부는 상금을 받아 기뻐했을 뿐, 통례적으로 노벨의 생일인 12월 10일 열리는 대규모 행사에는 “너무 어려운 살림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보기에 “북쪽 나라로 떠나는 그렇게 긴 여행”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었다.
---'마리 퀴리'중에서
독일의 신사들이 이 위대한 여성을 부당하게 취급한 예는 무수히 많다. 1907년 그녀가 막 박사학위를 받고 베를린에 도착해 대학에서 막스 플랑크의 강의를 수강하려고 신청하자, 유명한 물리학자는 이렇게 질문했다. “벌써 박사 직함을 가지고 있는데 뭘 더 바라는 거요?” 또 오토 한과 함께 일했을 때는, 그녀에게 연구소 후문으로만 들어오라는 소장의 분명한 지시가 있었다. 그녀는 지하 목공소에서만 실험할 수 있을 뿐 그 외의 장소에 나타나서는 안되었다. 1926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우주(kosmisch) 물리학에 관하여’라는 발제강연을 했을 때, 베를린의 한 언론은 ‘마이트너 양’이 ‘화장품(kosmetisch) 물리학에 관하여’(!) 얘기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리제마이트너'중에서
아인슈타인의 명예는 혜성처럼 상승했다. 그는 매체에서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멍한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공식을 개발해서 그것으로 전세계를 이해했다. 그는 노골적인 언어를 구사하기 좋아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당국의 “먹물 골통”이나 “대학을 지배하는 늙다리들”을 거침없이 거론했다. 또 무엇보다 누구든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신의 형상을 순박하고도 탁월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주님이 (내 착상들에 대해) 웃지 않고 나를 속이시는지” 아니면 “옛것들에 달린 나사 하나를 돌리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세계가 창조될 때 “영원한 수수께끼를 낸 자”의 어떤 선택이 있지 않았는지 등등을 말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중에서
그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연설을 했고, 머리를 기울인 채 불완전한 문장들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가끔은 중간중간 파이프 담배를 채워넣고 웅얼거리며 손을 입에 대고 계속 말하곤 했다. 때로는 파이프를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칠판에 공식을 쓴 후 왼손으로는 다시 공식을 닦아내기도 해서, 누군가가 그에게서 지우개를 뺏기도 했다. 모든 물리학자들이 보어를 좋아했지만, 한 명이 특히 그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두 사람이 1922년 동시에 노벨물리학상에 지명되었을 때 ― 아인슈타인은 1921년 성과까지 포함해서 ― 보어는 매우 당황했다. 그는 서둘러 자신은 이런 명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전세계에 알렸다.
---'닐스 보어'중에서
폴링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화학의 천재로 활동을 시작했다. 40년대와 50년대에는 당당하게 직접 의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분자적 질병’ 개념을 도입한 화학계의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60년대에 그는 원자무기실험에 거세게 반대하고 일방적인 군비 중지를 요구하면서 몇몇 동료들로부터 소외당했다. 결국 70년대에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더 이상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비타민 C가 암을 예방해 준다는 주제로 그가 점점 더 열심히 계획을 세우면서 직접 매일 10그램 이상을 복용했기 때문이다. 생화학자들은 비타민 C의 90퍼센트 이상이 이용되지 않은 채 다시 배설된다는 반증을 제시했다.
---'라이너스 폴링'중에서
이 붉은색 표지의 책들이 나온 이후로,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파인만의 능숙한 교수능력과 자연의 연관관계에 대한 육감을 아무리 칭찬한다 하더라도, 그가 벌인 물리학 축제는 직접 참가한 학생들에게, 적어도 초심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다. 동료학자 데이비드 굿스타인은 파인만의 리서치를 이렇게 요약했다. “과정을 진행할수록, 첫 학기 대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수가 과정을 그만두었다. 동시에 더 높은 학기의 학부생 중 점점 더 많은 수가 강의를 들었다. 따라서 강의실은 언제나 대만원이었기에, 파인만은 아마도 원래의 청중을 잃어버렸음을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리처드 P. 파인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