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를 중앙상석에 앉히고 열린 연회장 망월루는 한일병합 이전에 신축 개업한 일본 요정이었다. 마산 최초의 목조 3층 건물이었다. 병합 전이었으니 매우 이른 시기에 지은 집이었다. 특실은 화려한 서양풍이었고 목욕탕에는 화장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붕기와에까지 ‘望月(망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어 섬세한 디테일로도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외부는 기둥이 노출된 발코니형이어서 난간에 나와 바깥 경치를 조망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망월의 난간에 서면 마산의 달을 삼킬 듯하다”고 쓴 이도 있었다. (…) 마산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유명했던 요정이었다. 망월루 기생들의 잘 다듬어진 몸가짐과 몸매를 일러 ‘망월스타일’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지막 왕 순종, 34쪽
집안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이극로는 상남리에 있는 마방(馬房, 마구간을 갖춘 주막집)의 말죽 끓이는 일을 했다. 거리와 여관으로 다니며 인단 장사도 했다. 당시 마산에는 총 33개의 여관이 있었는데 그중 3개가 마산포에 있었다. 운영자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한글학자 이극로, 52쪽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에게 “식민지 시대 고향 마산이 배출한 인물을 들라면 누구이겠느냐?”고 물었을 때, 선생은 촌각도 망설이지 않고 “만주 벌판 휘달리며 일본군과 총으로 싸운 김명시이다. 마산의 독립 운동사에서는 그를 가장 앞에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사에서 이만한 인물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는 잊혔다. 고향에서조차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여장군 김명시, 77쪽
곧 마산역 광장이었다. 짐 끄는 마차가 몇 대 보였고 광장 주위로 상가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오른편으로 상반(常盤)이라는 여관 간판이 보였다. 광장을 막 지나자 오른쪽이 경찰서(지금의 중부경찰서)였다. 원래 마산부청 앞에 있었다가 나도향이 오기 4년 전에 옮겨온 것이었다. 일식 기와를 얹은 단층 목조 건물이었고 정면에는 현관으로 오르는 여덟 단의 돌계단이 있었다. 신마산 거리에 접어들었다. 경정(京町, 지금의 두월동)거리 양쪽에는 각양각색의 점포들이 들어서 있었다. 깨끗하긴 했지만 북적대는 마산포에 비해 상권은 약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마산의 긴자’라 불렀던 경정 아닌가? 나도향이 자주 봤던 명치정(明治町, 지금의 명동)보다야 못했겠지만 눈길 끄는 집들과 간판들이 많았다. 신마산은 일본인 그들의 도시였다. -나도향의 마산 석 달, 93쪽
이원수(1911~1981) 가족이 거처로 잡은 곳은 오동리 80번지(지금의 오동동 인애돌곱창 뒤편), 교방천에서 가까운 초가 셋집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논밭이었던 오동리가 주거지로 변해가던 즈음이었다. ‘오동(午東)’이라는 지명은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1914년 마산이 독립된 시(市)로 부(府)가 됐을 때 생긴 이름이었다. 오산리(지금의 산호동 일대)와 동성리에서 한 자씩을 따 만든 지명이었다. -고향의 봄 이원수, 112쪽
신축한 원동무역 사옥은 마산포에서 가장 돋보이는 집이었다. 세련되게 디자인된 당당하고 균형 잡힌 건물이었다. 시각적 안정감을 높이기 위해 기단부를 두었고, 무게감 있는 엔타블러처(entablature)가 얹혀 있었다. 르네상스식 열주를 연상시키는 수직형 벽과 일부 벽의 최상부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갓돌(capstone)이 박혀 있었다. 도로에 바싹 붙여 지은 건물이라 처마는 없었지만 화려하고 중후한 출입구를 가진 건물이었다. 설계를 한 건축가도 집을 지은 이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만석꾼 옥기환, 146쪽
서울역에서 출발한 백석은 삼랑진에서 기차를 갈아탄 후 구마산역에 내렸다. 통영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필 그날은 란이 서울로 가는 날이었다. 선창에서 내린 란이 구마산역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백석은 배를 타기 위해 구마산역에서 선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종거리에서 지나쳤다. 백석은 몰랐고 란은 알았다. 란과 함께 가던 서정귀가 백석을 알아보고 란에게 귀띔해주어 알게 됐다. 그러나 란은 역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어 알은체를 하지 않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 백석이 왔던 1936년, 마산에는 31,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그중 일본인이 5,400여 명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 대부분은 그들의 도시 신마산에 모여 살았다. 백석이 걸었던 불종거리는 한국인들의 거리였다. -시인 백석, 156, 162쪽
산책을 즐겼던 임화는 마산 해안을 자주 걸었다. 1935년, 폭풍이 지나간 8월의 어느 이른 새벽에도 해안을 걸었다. 아직 해가 바다 건너 산등성이를 오르기 전이었다. 산책 구간은 신포동 매립지에서 시작해 질펀하게 물이 드나드는 갈풀 더미였던 산호동 구강(舊江) 나루터까지였다. (…) 임화의 낚시터는 신마산 중앙부두에서 구마산 선창과 오동동 산호동까지 펼쳐진 마산포 해안이었다. 때때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기도 했지만 자주 있던 일은 아니었다. -임화와 지하련, 185, 189쪽
특기할 만한 것은 그의 ‘책 읽기’였다. 거의 병적이라 할만 했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그의 독서병(?)이 건강까지 해치게 되자 어머니가 책을 불태울 정도였다. 집이 가난해 주로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마산중학교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하굣길에 구마산 시장의 일본어 책방에서 한 시간씩 책을 읽었다. 이런 천상병을 보고 나중에는 책방 주인이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집에 가져가서 읽고 갖다 놓아라”고 까지 했다. 책방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바로 옆 다방에서 고전음악이 흘러나와 천상병의 귀를 사로잡았다. 생전에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유난히 좋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천상병이 드나들었다는 책방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SC제일은행 뒷골목에 책방과 고전음악 다방이 나란히 있었다는 한 노인의 말로 짐작할 뿐이다. 마산중학교와 오동동 집의 중간쯤 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귀천 천상병, 231쪽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유명했던 마산에 결핵 치료 병원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때가 절정이었다. 산장의 여인이 머물었던 요양소 외에 도립마산병원, 마산교통요양원, 마산상고 건물을 징발해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 군병원결핵병동 등이 있었다.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 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 불릴 만큼 문인들에게 만연한 때가 있었다. 해방 후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이 결핵을 매개로 이곳을 오갔다. 「이름 모를 소녀」로 19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냈다. -산장의 여인, 246쪽
어느 날, 김춘수는 잔무 처리 때문에 교무실에 혼자 늦게 남아 있었다. 전쟁 중이라 정식 교사는 군부대에 내주고 판자로 된 임시 교무실에서였다. 해가 다 지고 책상머리가 어둑어둑할 때였다. 바로 그때, 저만치 책상 한쪽 유리컵 속의 하얀 꽃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빛깔이었다. 그 순간 시인의 머리에 ‘저 선명한 빛깔도 곧 지워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어서 허두 한마디가 나왔다. 「꽃」 은 그렇게 탄생됐다. -꽃의 시인 김춘수, 276쪽
1960년 4월 11일, 미친 듯 마산거리를 나다녔던 어머니는 끝내 아들 찾기를 포기하고 남원 가는 첫 버스를 탔다. 시신을 시청 뒤 연못에 빠뜨렸다는 소문에 이틀간 못물까지 퍼내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같은 날 오전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3~2008)은 신마산 외교구락부(두월동 1가, 지금의 럭키사우나)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11시쯤 다방 문을 열고 한 사람이 들어와 주변을 살피며 허종의 옆 자리에 와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중앙부두에 빨리 가보이소. 틀림없이 김주열입니더. 떠올랐으예….”-열사 김주열, 285쪽
주교가 탔던 전용차는 짙은 초록색 미제 윌리스 지프(Willys Jeep)였다. 운전은 완월동 성당 신도였던 정태조 선생이 했다. 비서직을 맡은 신부가 있었지만 주로 주교 혼자 다녔다. 자가용은 꿈도 못 꿀 때였다. 더구나 미제 윌리스 지프는 아무나 탈 수 있는 차가 아니었다. 당시 마산에는 모두 세 대의 윌리스 지프가 있었다. 주교 외에 마산방직과 남성모직 사장이 이 차를 탔다. 두 차에는 에어컨이 있었지만 주교 전용차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여름 사목 방문 때 몇 시간씩 비포장 길을 다니는 게 예사가 아니었지만 끝내 에어컨을 달지 않았다. -추기경 김수환 ,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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