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즈막이 일어났다. 출근 준비로 쫓길 일이 없으니 세상 여유롭다. 아침은 샐러드와 커피 한 잔.
차에 오른 시각 오전 11시. 목적지는 거문오름.
박정희가 죄수들을 동원해 만들었다는 5.16도로를 달린다. 구불구불, 헤어핀커브의 연속이다. 오토바이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자동차는 재미가 없다. 도중 한라산 등반을 시작하는 성판악에서 잠시 쉴까 하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가 도로 나왔다. 차들이 꽉 차있었다.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하고 와야 한다는데 사람들로 북적였다.
--- p.30, 「계속되는 허탕, 왈종미술관에서 만회하다」 중에서
법환에 있는 초밥집. 일전에 내가 그런대로 먹을 만한 초밥집이라고 소개했던 곳이다. 졸지에 2대 2로, 처음보는 사람들끼리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담소했다. 자주 페북에서 접하는지라 처음 만났는데도 오랜 지인처럼 서먹할 게 없었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된 담소는 유쾌하고 재밌었다. 살아온 이력을 털어놓고, 했던 일과 경험, 앞으로 할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느 국회의원 보좌관 일을 했고, 여덟 번의 선거에 관여했다는 윤지용 씨는 정치판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가보면 좋을 데로 어디가 있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빛의 벙커’를 추천했다.
--- p.81, 「〈인간시대〉의 추억, 비양도」 중에서
젊은 연인 한 쌍이 출입금지선 앞에서 용머리해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야, 도대체 언제 와야 볼 수 있는 거야. 우리 벌써 네 번째 허탕이다 그치.”
뭍에서 여행을 그렇게 많이 오진 않았을 테고, 아마 제주도에 사는 청춘들일 것이다.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남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발길을 돌린다. 하멜기념비와 산방연대는 올레길 10코스가 지난다. 오르막 경사길을 걸어야 한다. 길가에 올레길 표지판과 리본이 보인다. 하멜의 표착 스토리, 하멜기념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 p.137, 「또 다른 재미, 제주도 지질 탐방」 중에서
잔디 깔린 마당에 놓인 나무 테이블과 의자. 두 여자가 앉아 돌담 너머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멍 때리기 좋은 곳이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이 환장할 봄날이다.
카페 안. 낮은 천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구불구불 대충 다듬은 나무 기둥, 서까래, 하얗게 회칠한 천장. 간소, 질박, 자연… 옛집을 고친 카페들이 흔히 그렇듯 가파리212도 그런 곳이다.
주방에서 두 여자가 바쁘다. 키가 큰 한 여성은 머리를 짧게 잘랐다. 스포츠 스타일.
“남자인 줄 알았네.”
목소리를 듣더니 일행 중 한 명이 말한다.
“들리겠네. 목소리 낮추시오.”
남들은 미숫가루를 시키는데 나는 카페라떼를 시켰다. 바로 후회했다.
--- p.239,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고」 중에서
유리창밖으로 정원이 내다보인다. 눈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편안하다. 16년 세월을 지나며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배 PD와의 인연. 36년이 넘는 방송 생활. 앞으로의 계획.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했다. 지나고 보면 좀 자제할걸 하고 늘 후회한다. 37년 군인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인 듯하고 어머니는 활달하고, 여장부 스타일이다.
“배 PD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늦게 알아채셨네”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아버지는 광주 사람인데 어머니는 부산 사람이다. 옛날엔 흔치 않은 커플이라 사연이 궁금했다.
--- p.297, 「와아, 너무 좋다, 아내가 연신 셔터를 누르다」 중에서
새알팥죽. 묽은 팥수프 안에 새알들만 들어 있다. 예상이 빗나갔다. 보통 쌀팥죽과 새알이 같이 들어있는 것 아닌가. 새알 수도 적다. 결국 쌀팥죽과 새알팥죽을 한데 섞어 먹었다. 광주MBC 근처에 팥죽집이 있다. 팥칼국수, 쌀팥죽, 새알팥죽을 판다. 냉면 그릇이 넘치게 담아준다. 처음 갔을 땐 5,000원이었는데, 퇴임 무렵엔 6,000원으로 올랐다. 그렇더라도 언제나 한 그릇을 다 비우기 힘들었다. 어딜 가든 광주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 먹었는데도 포만감은 없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아는데도 뭔가 부족하다.
비 오는 이중섭거리. 사람들이 없다. 간혹 비옷을 입은 관광객들이 눈에 띌 뿐 가게들도 한산하다.
서귀포극장이 비를 맞고 있다.
--- p.312, 「비 오는 이중섭거리를 걷고 라떼를 마시다」 중에서
쿠사마야요이는 젊었을 때 호박에 꽂혀 평생 호박을 테마로 작품활동을 해왔고 호박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3전시관은 호박 한 점과 ‘무한거울의 방-영혼의 광채’가 전부였다. 야요이의 호박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커졌는데, 호박 위에 찍은 무수한 검은 점들은 반복과 집적이라는 쿠사마야요이 특유의 표현방식이고, 그녀가 끊임없이 고민해온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고 설명문에 쓰여 있었다. 음. 썩 와닿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환각증세를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시작했다는 쿠사마야요이. 머릿속 환상을 밖으로 쏟아내는 작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작품이 좀 더 많았더라면 이해도가 높아졌을 텐데, 아쉽다.
--- p.364~365, 「기대가 컸던 본태박물관」 중에서
어릴 적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조천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할망당 얘기를 들었고, 아버지가 시멘트로 바르는 것도 봤고, 할망당에 사는 뱀신도 직접 목격했단다. 아직 할망당이 바닷가에 있을 때였다.
“큰 바위 밑 조그만 돌들 틈사이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어요.”
“아니, 제주도에 원래 뱀이 많은데 그 뱀이 할망당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보면 알지요. 느낌이 다르드라니께요. 한참을 보고 있었더니 스르르 구멍 속으로 사라졌어요.”
크기를 물어봤더니 그다지 크지 않았단다. 배 밑창에 난 구멍을 막을 정도의 구렁이가 아니고?
“작은 뱀이었다면, 나주에서 온 구렁이 후손일까요? 대가 바뀌었을 수도 있겄네요.”
“그랄 수도 있겄지요.”
박씨에게 들은 얘기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 p.420~421, 「나주에서 건너온 또 다른 뱀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