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것 좀 보세요. 큰일 났어요. 갈매기가 밧줄을 먹고 있어요.”
“어디?”
“저기 있잖아요. 입에 밧줄 물고 있는 거 보이죠?”
“갈매기가 왜 밧줄을 먹고 있지?”
“어머니, 갈매기가 갯지렁이인 줄 알고 밧줄을 먹고 있나 봐요.”
아이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잔한 해변 구석에 파도가 밀고 온 쓰레기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저기에 쓰레기 진짜 많아요.”
“모래 놀이할 때 구해온 거 전부 파도에 떠밀려온 쓰레기였어요.”
그제야 바다 쓰레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p.23
아이들이 주워온 슬리퍼 한 짝이 잊고 지냈던 추억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이들이 주워온 슬리퍼 한 짝. 이것도 처음부터 쓰레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사용했던, 주인이 있었던 물건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주인이었던 물건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조차 없이 살아간다. 쓰레기차가 지나가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놓치거나 버린 쓰레기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발견되어 또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될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찔했다. 아무 상관 없는 일처럼 살아온 것에 대한 놀라움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 p.29
아직 걸음마도 쉽지 않았던 지훈이가 휴지통에 과자상자를 넣기 위해 서너 번 넘어졌다가 일어섰다가를 반복했다.
“다시 해볼까? 하나, 둘, 셋.”
“와~ 골인! 짝짝짝.”
우리의 첫 쓰레기 줍기는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다. 놀이터에서, 장미가 많이 피어있는 공원에서, 자주 그리고 가끔 쓰레기 줍기 놀이를 했다. 길거리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은 환경미화원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가 되었다. 오로지 놀이를 위한 ‘쓰레기 줍기’였다. 그렇게 우리는 산책을 하고, 우리만의 놀이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 p.40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엄마의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충고해 준다.
“아이들이랑 매일 함께하면 엄마 시간은 없잖아요.”
“꿈이 있을 건데, 자기 계발은 언제 해요?”
“일하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 행복하다.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바다에 머물면서 ‘나를 위한 평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다시 내려와야 하는 길을 올라가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우연히 떠나온 한라산 등산길에서 난생처음 ‘순례자의 마음’을 떠올렸다.
--- p.48
‘남편에게도 꿈이 있을 텐데’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남편이 안쓰럽고 가엾게 느껴졌다. 나는 남편을 사랑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었다. 남편을 응원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의 삶을 버리고, 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 p.63
사용하지 못하는 냄비, 중고 서점에서 받아주지 않는 오래된 서적, 찢어지거나 작아진 옷은 따로 모아 고물상으로 가져갔다. 우유갑과 다 쓴 건전지는 주민 센터에서 로 두루마리 휴지와 새 건전지로 교환했다. 친정 부모님께서는 처음 보는 딸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달라진 나를 두고 걱정스러운 말씀도 아끼지 않으셨다. 돈을 물처럼 펑펑 쓰던 내가 몇백 원을 벌기 위해 중고 거래를 하고, 고물상에 가다니, 스스로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물건을 계속 줄이니, 나중에는 꼭 필요한 것만 남았다.
물건을 줄인 후, 앞으로의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겠다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 p.68
“어머니, 쓰레기 주울 때 집게를 사용해보니깐 편했어요.”
“우리도 집게 사서 쓰레기 주워요.”
집으로 돌아온 뒤 쓰레기를 주울 수 있는 긴 집게를 샀다.
쓰레기 줍기는 집게의 기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집게가 있으니깐 손이 안 닿는 곳까지 주울 수 있어서 편안해요.”
“지구에 있는 쓰레기, 다 청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으하하. 우리가 지구를 구하자.”
집게가 도착한 그 날부터 매일 집 앞 쓰레기를 줍고, 마을 강변 청소를 하면서 아이들은 뿌듯함을 느꼈다.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만 줍던 일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지구 쓰레기 다 주워버리겠다. 지구야 기다려! 우리가 널 구해주겠다.”
쓰레기 줍기는 아이들에게 지구를 지키는 영웅처럼 다가왔고, 그날 ‘지구를 지키는 사 남매’가 탄생했다.
--- p.92
“이제 담배를 끊어야겠다.”
“담배 피우는 게 부끄럽네.”
할아버지들께서 담배꽁초를 줍는 아이들을 피해 멀찍이 물러나시면서 말씀하셨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들은 쪼그려 앉아 평상 아래 담배꽁초의 흔적을 모두 정리했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을 하러 갔을 때, 평상 아래에는 담배꽁초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느티나무 평상 아래에 담배꽁초가 사라졌다.
“어머니, 우리는 쓰레기만 주웠을 뿐인데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 p.149
“자경 씨가 플로깅은 전문이잖아요.”
“매일 플로깅을 실천하고 있으니깐 적합할 것 같아요.”
나는 관심 있는 일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사람이었지만, 앞에 나서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제안을 받았을 때 가슴이 뛰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상치 못한 나의 감정에 스스로도 놀랬었다. 그런 내게 푸른 낙타 님과 줄리아 님은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나는 리더 역할을 수락했다.
“네, 한번 해볼게요.”
코로나로 인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져서일까? 모집 인원 100명은 5일 만에 조기 마감이 되었다. 활동에 필요한 가방은 현수막 업사이클 제품으로, 택배 발송은 비닐 없이 물건만 발송해 달라는 나의 의견을 수용해 줍기 키트까지 제작했다. 매일 모두 잠든 밤, 아이들의 인증 사진을 보며 댓글을 달았다.
‘네 아이의 엄마’라는 자리에서 ‘나’라는 존재로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일상의 틈을 비집고 만든 그 시간은 ‘나’를 내 인생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