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나 역시도 ‘참 몰랐구나’ 하고 자각했다. 미술대학에는 여학생이 훨씬 많지만 현장에는 여성 미술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성모마리아나 왕비처럼 수업에는 여성을 모델로 한 그림이 많이 나오지만, 여성 화가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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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알파걸’ 나혜석은 이혼으로 남편도 네 아이도 잃고, 1948년 행려병자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인상파의 여성 멤버로 평생 그림을 그려온 베르트 모리조가 1895년 세상을 등졌을 때, 사망진단서 직업란에는 ‘무직’이라고 적혔다.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 버네사 벨은 화가였다. 남편과 세 아이, 애인, 그리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동생까지 돌보며 화가로서 생활을 미감 있게 꾸몄으나, 그림으로 이렇다 할 수익을 올리지는 못했다. 그녀의 예술세계는 ‘주부 취미생활’ 정도 취급을 받았고, 천재 문호 동생의 명성에 가려졌다. 나혜석이나 모리조, 벨이 평생 추구해온 세계는 왜 존중받지 못했을까. 누구의 아빠도, 누구의 남편도 아닌 그저 ‘화가’로 살았던 남성들처럼 그림에만 전념했다면, 다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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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더 나은 세계를 꿈꿨지만, 많은 여성들이 역사에서 지워졌다. 섬유디자이너 안니 알베르스, 사진작가 루시아 모호이는 남편인 요제프 알베르스, 모호이너지의 이름에 가려지기도 했다. 2019년, 설립 100년을 맞은 바우하우스가 재조명되면서 가려졌던, 혹은 무시됐던 반, 바우하우스의 여자들도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중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의 짧은 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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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 그림을 팔아 돈을 번 프로페셔널이었으며, 한 세기 전 머나먼 타국을 누빈 용감한 독신 여성이었다. 도쿄에서 수채화 전시를 할 때 일본 목판화 출판인인 와타나베 쇼자부로의 강권으로 그의 작품들은 목판 출판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조선에서는 크리스마스씰로 제작되어 결핵 환자 기금 마련에 쓰이기도 했다. 키스는 1921년 9월에 지금의 소공동에 있는 서울은행집회소에서 개인전도 여는데, 나혜석이 여성 화가로 첫 전시를 열고 반 년 뒤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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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노은님을 말할 때는 여전히 파독 간호사였다는 것, 아이처럼 천진한 그림을 그린다는 것, 이 두 가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독일에서 전업 간호조무사로 일한 건 딱 2년, 중요한 전환점이었을지언정 그 기간이 70년 넘는 삶을 규정한다니 억울할 것도 같다. 혹시나 여성 미술가의 정체성을 엄마나 간호사처럼 돌봄 업무에서 찾는 것은 아닌지, 또 그들이 철학자이기보다는 나이를 먹어도 천진한 아이에 머물길 원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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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서 베르트 모리조는 마네의 「발코니」에 그려진 모습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 전체에서 인상파의 여성 멤버 모리조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인상파가 현대미술에서 갖는 의미와 비중에도 불구하고 모리조가 미술사에 남긴 자취는 많지 않다. 2000년을 전후해 미술사 공부를 시작한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모리조는 저 묘한 세 사람의 그림, 혹은 마네가 그린 신비로운 초상화로만 남아 있다. ‘인상파의 뮤즈’, 그 이상 그녀를 알 기회는 없었다. 여성 화가와 그들이 남긴 당대 여성들의 이야기가 주목받은 것은 이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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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에게 화가 언니가 있었다는 건 잘 몰랐다. 영국에서도 버네사 벨의 대규모 회고전은 2017년에야 비로소 열렸으니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미 젊은 시절부터 ‘문단의 아이돌’이었던 버지니아의 천재성을 알아볼 만큼의 재능만 있었던 화가 언니, 동생의 유명세를 지근거리에서 보며 작아지는 자신을 바라만 봐야 했던 언니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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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가로는 드물게 대중의 사랑을 받은 화가, 그의 호암갤러리 회고전에는 8만 명 넘는 인파가 몰렸다. 화가의 사인을 받으러 관객들이 줄을 섰다. 지금도 시립미술관 상설 천경자실에는 우리 근현대미술사 속 ‘낭만의 시절’이 자리잡고 있다. (……) 외출했다 돌아오면 작품을 향해 “잘 있었는가?” 하고 말을 걸기도 했다는 화가. 분신 같은 그림들 남기고 긴 여행 떠난 천경자에게 “잘 계신가요?”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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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을 사진작가로 일으켜 세운 건 1975년 UN 세계여성의 해 기념전이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평등·평화·사랑을 주제로 한 사진 작업을 의뢰했다. 영등포의 닭장 같은 일터부터 남대문시장, 미용실 등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어떻게 직면했나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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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힐마)는 괴팍한 아웃사이더였을까. 아니면 마땅히 미술사의 중심에 올라섰어야 했을, 추상미술의 선구자였을까. 그림은 사후 20년도 훨씬 지난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공개된다. 그리고 사후 74년 뒤인 2018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은 그녀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나선 계단이 있는 신전’에 걸기 위해 그린 제단화들이 비로 소 맞춤한 전시 장소를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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