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낮 12시, 하루만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나는 멍하니 눈을 뜨고 조용한 거리를 걸어간다. 모든 장면이 느린 화면처럼 지나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태양을 향해 멀어져가는 하얀 풍선 네 개가 눈에 들어온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여자들의 비명이 들리고, 저 멀리서 꼼짝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진다. 물론 이런 나를 쳐다보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당연하다. 나는 벌거벗었고 몸엔 피가 묻어 있고 손에는 잘린 머리가 들려 있으니 그럴 수밖에. 몸에 묻은 피는 거의 다 말랐지만, 손에 든 머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천천히 뚝뚝 떨어지고 있다. 어떤 여자는 나를 보고 길 한복판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는 여자가 손에 쥔 장바구니를 땅에 떨어뜨리는 걸 보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갇힌 지 이틀째이다. 눈을 떠보니,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 문 아래 틈으로 들어오는 20센티미터 정도의 빛으로는 겨우 내 손만 볼 수 있다. 밖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경호원들의 발소리와 더 멀리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두려울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 어둠이 편안하다. 아마도 얼마 전에 한 일, 이틀 전 저녁에 한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조금씩 제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사람은 나쁜 행동만큼이나 좋은 행동도 많이 하니까, 결국 너는 너이다. 똑같은 너가 아닐 수도 있지만, 결국은 너이다. 그저께 밤에 들은 울음소리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잠들자마자, 불이 붙은 장면들이 나를 괴롭힌다. 어쨌든 살면서 절대 기분이 더 좋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만다는 팔찌에서 떨어진 작은 구슬들과, 반대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종이쪽지를 침대에 꺼내놓았다. ‘이 종이가 얼마나 오래 숨겨져 있었던 걸까? 겉이 다 닳은 걸 보면 수십 년이 흘렀을 수도 있겠어. 근데 누가 넣어둔 거지?’ 아만다는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며 생각했다. 쪽지를 펴서 내용을 읽던 아만다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너무 놀라 종이를 바닥에 떨어뜨렸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침대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바닥에서 종이를 주워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만다 매슬로, 1996년 6월” 쪽지에는 이렇게 이름과 날짜만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이상한 별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만다는 쪽지에 적힌 글자를 보고 또 보았다. 이 종이에 어떻게 해서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지, 이게 얼마나 오래 거기에 있었는지, 처음 이 집에 오는 날짜를 어떻게 알았는지,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거지? 전혀 상상이 안 됐다.
원장은 상자 뚜껑을 열고 안을 보는 순간 돌처럼 굳어버렸다. 스텔라도 의자에서 일어나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원장은 안색이 변하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상자에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비닐봉지에 담긴 한 여자의 잘린 머리가 들어 있었고 옆에는 빛바랜 메모가 있었다. 스텔라는 다시 일어나 상자 안에 있는 메모를 집어서 읽었다. “클라우디아 젠킨스, 2013년 12월” “클라우디아 젠킨스. 원장님과 성이 같네요.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망연자실한 스텔라가 물었다. 원장은 도저히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나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그날 밤 상처의 흔적을 느낀다. 그 빌어먹을 밤. 나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모두 다 있는지 확인한다. 새끼줄과 굵은 테이프, 사진들, 여러 개의 포대, 도끼까지 다 있다. 나는 오랫동안, 오랜 시간 동안 이 목표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날 밤의 기억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지만, 내 꿈을 부수고 내 삶을 산산조각 내고 내 영혼을 절망에 빠뜨린 그 소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나는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그날의 기억과 웃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라면 세상을 바꾸고 하늘을 움직일 뿐 아니라 끝까지 기다릴 것이다. 무엇보다 제정신을 찾고, 죄책감을 내려놓고, 이 모든 세월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종이에서 눈을 떼는 순간, 건너편 모퉁이에서 검은 실루엣이 움직이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누군가 몇 초간 꼼짝도 하지 않고 거기 있었다. 순간 아만다는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하얘졌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밀려오는 공포를 다독이고,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을 정돈해보려고 애썼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검은 실루엣의 얼굴을 확실히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거리가 꽤 멀고 창유리가 지저분해 얼굴을 명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만다는 그 실루엣을 계속 바라보며, 자동차 문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열었다. 차에서 나와 문 위로 머리를 내밀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 커지자 스텔라는 정신이 멍해졌다. 더는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기자들은 그녀가 기절했다고 생각했다. 웅성거림이 그치고 기자들은 스텔라의 초점 잃은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정신건강센터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왔고,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수많은 불빛에 스텔라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머릿속에는 온통 미시간의 저격수와 FBI 국가안보부 앞에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장면이 가득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사람이 스텔라의 어깨를 한 손으로 꽉 눌렀다. “좋은 오후입니다.” 젠킨스 원장이 의연하게 말했다.
나는 이처럼 종말을 맞기 위해 두 시간이 넘게 운전해왔다. 나의 마지막을 향해. 내가 여기,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린 결정엔 전혀 후회가 없다. 누구도 자기 결정은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결정을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살아야 한다. 적절할 때에 용서는 구하되, 절대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한다. 삶은 매 순간 우리가 내린 하찮고 사소한 결정의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어느 정도 고민은 하겠지만, 모든 것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 자신의 몫이다. 커피와 차 중에 무엇을 마실지 선택할 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정하는 순간 이미 마시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깊은 무의식은 특별한 사람과 커피나 차를 마셨던 좋은 순간, 차나 커피를 마시며 느꼈던 좋은 느낌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당신에게 커피나 차를 권
할 때마다 좋았던 기억들을 다시 정렬하고 의식으로 드러나게 해서 아무 의심 없이 선택하게 된다.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없다. 아무튼, 아무도 내게 결정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내 자아, 내 존재가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는 아주 적절한 날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