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괜찮아. 이젠 괜찮아.’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넘어 내가 바뀌고 내 글이 바뀌게 된 이유는 글을 계속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명확히 말하자면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즐기면서 내 마음이 리부트 되었다. 이건 글을 써 본 사람이면 이해하는 말이고, 써 보지 않은 사람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고민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차선책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 p. 135
대화 내용과 기술은 상대가 누구냐, 여기가 어딘가, 지금 분위기가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그러므로 머리 다 큰 아이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면 “아이구, 벌써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네. 우리 아들, 텔레비전 더 보고 싶을 텐데 속상하겠다. 엄마도 마음이 짠하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끄자.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약속을 잘 지킬 수 있어야 해”라고 1절부터 4절까지 읊어댈 게 아니라, “시간 다 됐어. 텔레비전 꺼”라고 말해주는 게 명답이다.
--- p. 165
엄마의 사유 대상은 대부분 자녀일 테고, 자녀를 개념화시켜 판단하고 추리하는 작용은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의 영역까지 포함시킨다. ‘저걸 그냥 확!’, ‘내가 못 살아.’, ‘이럴려고 엄마가 됐나?’ 이 모든 것이 엄마의 사유가 된다. 거창할 것 없다. 자식들을 보며 눈에 레이저가 발사될 때, 한숨을 쉬며 허리에 손을 걸치는 그 순간이 사유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징그럽게도 엄마 말을 듣지 않는 자녀와의 경험이 엄마의 인식을 건드려 스파크를 일으키게 되고, 그후 잠시 멈춤의 시간이 찾아온다. 여기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춤’이다. 숨을 고르는 구간이 없으면 사유할 수 없다. 사유하지 않으면 감정의 노예가 되어 후회할 일을 하게 될 확률이 백 퍼센트에 가까워진다. 건너가는 존재가 될 수 없다.
--- p. 224
MZ세대가 돈 안 들이고 나를 콘텐츠화하며 부캐 놀이를 즐긴다면, 우리 엄마들은 글쓰기 놀이를 하면 된다. 글쓰기 역시 돈 들어가는 것 없다. 나를 콘텐츠화하기에 안성맞춤인 도구다. 현장에서 보여주는 잔소리 대마왕의 모습이 본캐라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아이’라고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부캐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캐와 다른 점은, ‘글쓰는 엄마’라는 부캐는 본캐의 한 영역이라는 거다. ‘저걸 그냥’ 본캐와 ‘우쭈쭈 내 사랑’ 부캐는 뗄 수 없는 관계다. 엄마의 공회전하는 슬픔은 아이의 행복과 만날 수밖에 없고, 그 만남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 p. 259
6천 번 투고, 2백 번 거절, 17건 출간계약, 9권 책 출간을 하고 나면 ‘내 삶이 최고의 콘텐츠다’라는 말에 50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0순위인 시장의 사정도 고려해야 하는 새로운 숙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비 저자는 ‘내 삶이 최고의 콘텐츠다’라는 말을 100퍼센트 신뢰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내 삶을 돌아보고 내 감정을 쏟아놓는 글쓰기가 우선시되어야만 독자를 위한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즐기기 위해 쓴다’는 것을 기본 자세로 여기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에 엄지 척을 보내주길 바란다. 아니, 무라카미 하루키도 즐기기 위해 글을 쓴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한 입 꼬리 올리며 “너가 무라카미 하루키냐?”라고 말하는 그 사람에게 한 마디 해주자.
“이봐, 써 봤어?”
--- p. 266
아이들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마음만 먹으면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 내 아이를 대하고 있는 나의 ‘익숙함’과 나를 들여다보지 않는 글쓰기 형태의 ‘익숙함’은 애도를 마주할 만한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는 고통이 비웃을 수 있는 슬픈 일이다. 이제 글을 쓰는 엄마인 나는, 나와 나의 글을 대상으로 애도의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떠나보낼 것과 남겨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과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 고집을 부려야 할 것과 온전히 버려야할 것은 무엇인지, 충분히 고민하고 슬퍼하며 ‘상실’에 집착해 보아야겠다. 회복을 위해 우리는 그러해야만 한다. 직면의 두려움보다 상실의 고통에 편들어주어야 할 때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글을 써야만 한다. 내가 쓴 글은 삶의 모습으로 진화하여 건강하게 잘 살다가 먼 훗날, 나와 내 아이들에게 유산이 된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우리 아이들은, 몸부림쳤던 엄마의 모습을 글을 통해 애도하게 될 것이다. 결국 글쓰기다.
--- p. 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