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한숨을 쉬고 탁자를 오른 주먹으로 부드럽게 두드린 후 정수리를 앞뒤로 문지른다. 스트레스를 나타내는 가장 명확한 지표다.
“저 사람들은 기꺼이 합의를 해 줄 의향이 있대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뭐든 좋아.”
“잘못한 걸 인정하시고 도넬리한테 사과를 하세요. 그리고 어머니
가 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고 성실하게 노력할 마음이 있다는 걸 보여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할 수 있어.”
“이 짓을 그만두셔야 해요. 알아들으셨죠, 엄마? 이 짓을. 그만두셔야. 해요.”
밀리는 어마어마한 안도감을 느끼며 손 안에 고개를 떨군다.
“너 없었으면 내가 어쩔 뻔했니?”
“한 가지 더 있어요.” 아들이 헛기침을 한다. “우리는 가정방문 도우미가 마르게이트를 방문하게 해야 할 거예요.”
“무슨… 미?”
“집에 들러서 봐줄 사람… 도우미요.”
“우리 집에?”
“아뇨, 마구간에요… 가 아니라, 당연히 집이죠. 맙소사. 그게 싫으시면 기소당해 법정에 서시고 뒷일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저쪽에는 도넬리의 잡동사니들을 가방에 쑤셔넣는 어머니를 찍은 영상이 있으니 너무 큰 행운을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난 썩 내키지 않는구나, 케빈. 내 집에 모르는 사람을 들이라고?”
“그냥 일주일에 몇 번이 다예요2. 0시간.”
“20시간이나!”
“3개월 보호관찰 기간이에요. 당장 오늘부터요. 사람이 구해지는 대로 당장… 믹네 누나가 직업소개소 비슷한 걸 하니까 어쩌면 거기서 알아봐 줄 수 있나 물어볼게요. 어머니가 어머니 쪽 조건을 지키시면 기소는 조용히 무마될 거예요.”
“협상은 불가능한 거겠지?”
“그게 바로 협상이에요, 엄마. 범죄를 저지르셨잖아요. 여기서 어머니는 협상력이 없어요.”
“사과하는 건 괜찮아. 그건 응당하니까. 하지만 도우미 건은…”
“기소보다는 낫죠.”
밀리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 들고 탁자 위에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늘어놓는다. 하나하나 차례로. 애초에 원하지도 않고 필요도 없었던 우스꽝스러운 물품들의 전시관. 굳이 말하라면 밀리는 자신이 물질숭배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이 지구에 밀리가 쥐똥만큼이라도 관심이 있는 물품은 한 줌에 불과하다. 오래전 피터가 처음 보여준 케빈의 사진, 아기 모린의 장례식 때 쓰인 조그만 기도서, 그리고 피터의 약혼반지. 반지는 양쪽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그리고 사실 돈푼깨나 나가는 가보 에메랄드컷 에메랄드다.
“그럼 저 잠깐 나가서 오코너 경사님하고 이야기 좀 하고 와도 되죠?” 케빈이 묻는다.
“알겠다.” 밀리는 말한다. “그래, 좋아. 미국 갔다 온 후에 전부 정리하면 돼.”
“아뇨, 엄마.” 케빈이 시선을 피하며 말한다. “유감이지만 미국행은 미뤄야 할 것 같아요.”
--- p.34~37
행운인지 케빈의 무의식적인 의지가 우주를 움직인 것인지, 블리클랜드의 사무실 앞에 앉아 그 앞 벽에 붙어 있는 세 대의 전화기를 곰곰이 살펴보는 척하던 케빈의 눈에 로즈 버드가 들어온다. 욕망의 대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케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캠퍼스 건물들 사이의 짧은 거리를 오가느라 뺨이 붉게 상기된 채, 단단히 움켜쥔 상당히 큰 파일 폴더 더미를 훑어보고 있다. 이전에는 보지 못한,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섹시한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몸매를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는 파란 랩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케빈은 즉각 그 드레스가 로즈의 몸에서 슬로모션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발에는 더블린의 모든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가죽 부츠를 신었는데, 부츠는 발목에서 장딴지 중앙까지 올라오는 지퍼와 두꺼운 은색 쇠고리들로 장식돼 있다. 저 지퍼를 내가 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리에서 벗겨내고 그 아래에 있는 것에 손이 닿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타이츠? 멜빵? 아니면 맨다리일까?
“고가티 씨.” 로즈가 갑자기 멈춰 서며 말한다.
자신을 향한 웃음으로 벌어지는 여자의 입술을 보자 케빈의 뺨에는 색이 돌고 고환에는 피가 돈다. 열네 살 때로 돌아간다. 무심한 듯 정중한 태도를 보이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로즈 버드를 향해 멍청하고 얼빠진 시선을 보내고 있다. 마치 엑스터시를 한 알 삼킨 듯한 기분이다. 이 여자에게는 케빈의 혈류에 불을 지피는 뭔가가 있다. 케빈은 기분이 좋다.
“버드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케빈은 인사예절을 놓고 고민한다. 한 번 끄덕이는 것은 너무 냉정하게 느껴진다. 입맞춤? 맙소사. 아니, 입맞춤은 아니지. 작은 손짓? 이젠 상대가 바로 앞까지 와 버렸으니 너무 어색할 것이다. 케빈은 악수로 마음을 정한다.
“앗.” 로즈가 말한다. “얼음장 같아요!” 허스키한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그러나 로즈는 그렇지 않다. 로즈의 손은 따뜻하다. 아니, 뜨겁다. 그리고 밀번의 행정 담당 로즈 버드와의 이 첫 신체 접촉은 순수한 성적 전류, 어쩌면 기절할 것 같은 성적 전류다. 아찔한 번개가 케빈의 전신을 꿰뚫고 지나간다.
--- p.103~105
실비아가 오기 전에 밀리는 제대로 된 식사란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해 거의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주 추운 날 아침식사? 고집 센 개를 목줄로 끌고 다니듯 코드를 쥐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실내 난방기 옆에서 바나나 하나 까 들고 어슬렁거리기. 아니면 괜히 설거지거리 만들 필요 없이 그냥 부엌 조리대에 기대어 토스트(버터가 있으면 발라서)를 꿀떡꿀떡 베어 먹기. 그것도 아니면 (우유가 있다고 치면) 콘플레이크 한 그릇 뚝딱. 이건 저녁식사다. 피터가 밀리의 일요일 로스트와 셰퍼드 파이와 폭찹을 그토록 오랜 세월 칭송했건만, 피터가 가고 나서 밀리는 부엌을 버렸다. 요리를, 특히 어느 한 요리를 지독히 경멸하게끔 되었다. 83세가 된 지금은 거기에 어떤 자학적 경향이 있음을 느끼고 있지만, 자신의 이미 부정할 수 없는 고독을 스스로 떠올리게 하는 것들과는 선을 긋는다.
하지만 실비아가 찾아온 이후로 밀리는 다시금 요리의 부름을 느낀다. 매일, 아니 매시간 실비아에 대한 애정은 더 커져만 간다. 심지어 도우미의 유별난 버릇들조차 매혹적이다. 마치 상상의 겨울바람이 입술을 맹공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술에 바셀린을 끊임없이 바르는 것, 길쭉한 일회용 포장지에 든, 비소를 연상시키는 노란 스플렌다(설탕 대용품으로 쓰이는 저칼로리 감미료 브랜드-옮긴이)를 차와 커피에 뿌려 마시는 것, 버터를 그냥 접시에 담아 찬장에 두는 아일랜드식 보관법을 매번 보고도 매번 놀라는 것, 코털 족집게에서 자물쇠 수리공 그리고 아일랜드 법까지 모든 것에 관한 바닥 모를 호기심과 서슴없는 질문들, 우유를 따르기 전에 아주 수상하기 짝이 없다는 듯 킁킁 냄새를 맡는 것, 광고에서 더블린 억양만 나오면 우스워 죽으려고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양 아래 모든 게 다 자기 것인 듯하고 뭐든 못 할 게 없다는 듯한 그 티없이 실무적이고 자신감 넘치며, 신선하고 절대적으로 비아일랜드적인 방식.
--- p.154~155
에이딘이 현장에 나타났을 때, 밀리는 놀랄 만큼 마음이 놓였다. 지원군이 있다. 하지만 확실히, 에이딘을 좀 보라. 아직 여자가 아닌 아이의 어깨(밀리는 따끔한 아픔과 함께 자신이 그 어깨에 심지어 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냘픈 손목에 채워진 두꺼운 고무 밴드, 티셔츠(라마 그림 밑에 라마를 위해 드라마는 참아 줘라고 적혀 있는)… 그건 나이어림과 경솔함을 말해주고 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에이딘이 외친다. “모르셔서 그래요. 저희 할머니는…” 에이딘이 밀리를 보며 재촉한다. “무슨 말이든 하세요!”
밀리는 머릿속에 유일하게 떠오르는 행동을 한다. 그것은… 윙크다. 더없이 사소하지만 더없이 위험한 제스처. 다행히도 캐런의 시선은 여전히 밀리의 손녀딸에게 고정돼 있다.
“할머니는, 그니까….” 에이딘은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지으면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손가락을 관자놀이 옆에서 빙빙 돌린다. 미쳤다고 말하는 만국 공통어. “노망이에요.”
“네 말은, 이분이 알츠하이머나 뭐 그렇다는 거니?”
“네.”
대단한데. 밀리는 속으로 감탄하지만 에이딘의 거짓말은 불안하다. 눈을 거의 마주치지 못하고 뺨은 불타고 있다. 도저히 숨길 재주가 없는, 아일랜드식의 활활 타는 붉은 기운.
“헷갈려하시고, 막, 여기저기 헤매 다니시고 이런 일을 가끔 하세요. 아마도 본인이 어디 있는지 잊으셨을 거예요.” 에이딘은 밀리의 어깨에 부드럽게 양손을 얹는다. “저예요, 할머니. 저 누군지 아시죠, 네? 케빈의 딸 에이딘이에요. 할머니는 비행기에 타셨는데, 비행기에서는 담배를 못 피워요. 기억하시죠, 우리가 그 얘기 했던 거?”
밀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딘을 본다.
“아, 맙소사….” 캐런이 말한다.
에이딘의 연기에 밀리는 환희를 느낀다. 아니, 어쩌면 경탄한 걸까.
“네가 이분 보호자니?”
에이딘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은 제가 누군지도 까먹으세요. 제가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도요.” 두 문장 다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밀리는 새삼 깨닫는다.
--- p.35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