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오브 레전드〉의 출시만으로도 1분 1초가 부족한데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혜롭게 큰 갈등 없이 빠른 시간 내에 중요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커뮤니케이션에 임했다.
한국 대표로서 내가 본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초반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한국 지사의 위상과 결과가 달라지는 만큼 책임이 무거웠다. 만약 내가 한국 입장만 계속 견지하면 단기적으로 한국에서 필요한 것을 얻을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본사와 갈등이 커지고 최악에는 본사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비협조적으로 임할 수 있다. 반면에 본사의 뜻대로 맞추어주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몰라도 본사 위주의 정책 때문에 결국 한국 직원과 한국 고객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러면 결국 한국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것이다.
본사 위주의 시스템이 안착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를 계속 고민했다. 게임을 출시하고 플레이어들과 소통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것보다 본사 직원들에게 보고하고 비위를 맞추는 데 시간과 신경을 쓰게 될 것이었다. 잘못된 방식이다. 처음부터 틀린 구조로 세팅하면 그 방식대로 지속될 것이다. 한국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열정 가득한 능력 있는 직원들은 회사를 떠날 것이다. 결국은 본사에 비위를 맞추는 직원들만 남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라이엇 게임즈도 기존에 진출했던 수많은 외국계 회사처럼 실패하거나 그저 그런 평범한 회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실패하려고, 남의 비위를 맞추려고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라이엇 게임즈로 이직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성공하려고 왔다.” 그에 대한 나의 철학은 뚜렷했다. 지금은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가 힘들 수 있지만 성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성공하려고 왔다」중에서
2011년 12월 12일 오전에 서버를 오픈했다. 클로즈 베타가 끝나고 오픈 베타를 준비하면서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지사 설립, 채용, 본사와 협업 업무를 하며 6개월을 보냈다.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오픈 베타 전날에도 한숨도 못 자고 출근했다.
운명의 시간이 되었다. 조금씩 플레이어들의 접속이 늘었다. 잘 버텨주던 서버는 저녁이 되면서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접속하자 불안정해졌다. 래그가 생긴다는 글이 일제히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첫인상이 중요한데 문제가 지속되었다. 아무리 게임이 좋아도 서버에 문제가 생기고 게임하기 어려운 환경이면 플레이어들이 발길을 돌릴 수 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굳이 서버 접속도 안 되는 게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몇 백 개의 게임이 서비스 중이었다. 잠시 발길 돌린 플레이어를 많은 어벤저급 경쟁 게임들이 서버를 팽팽 돌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러다 허무하게 무너지겠어.' 식은땀이 흘렀다. 서버는 본사 직원들이 몇 달 동안 한국에 체류하면서 설치했다. 계획대로라면 출시 후에 바로 본국으로 출국해야 했다. 오랫동안 집과 가족을 떠나 타지에서 밤낮 없이 일해온 탓에 그들도 지칠 대로 지쳤다. 뒷일을 맡을 로컬팀이 있었지만 아직은 본사팀에 비해 경험을 비롯해 대응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안정화 작업을 마무리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다행히 그 며칠 사이 서버는 눈에 띄게 안정화되었다. 이 정도면 당장의 서비스 운영에 큰 차질은 없어보였지만 근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오픈 베타 서비스」중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출시를 준비하면서 국내 PC방에 대한 전략을 마련할 목적으로 PC방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FGI 소비자 심층 조사 등을 시행했다. 그 결과 PC방 영업에서 제일 가치로 '상생의 경제학'을 도출했다. 이어서 '영업망이 아니라 파트너다'라는 실천 원칙도 세웠다. PC방 성과가 〈리그 오브 레전드〉 성패를 가를 거라 생각했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집이 아니라 PC방에서 더 재미있게 〈리그 오브 레전드〉를 플레이할 프로모션이 필요했다. 전략이 성공한다면 PC방에 플레이어들이 몰려갈 것이고, PC방 점유율도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윈윈, 상생의 경제학이다.
게임 서비스를 오픈하면서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리미엄 PC방 가맹 혜택을 발표했다. 유료 프리미엄 PC방 서비스에 가맹한 PC방에는 모든 챔피언을 사용할 수 있는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맹 PC방에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에게 보너스 IP(Influence Points) 20퍼센트를 추가로 제공하기로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모든 챔피언을 플레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출시 직전, 적정 가격 등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던 당시에 PC방 사장님들을 모시고 FGI를 진행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PC방 붐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시점에 사장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서비스 가격이 아니었다. “정말 게임 플레이어들이 PC방에 올 만한 의미 있는 혜택을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MMORPG처럼 집에서 혼자 즐기기 좋은 게임이 많은 시기였고, 각 게임사별로 PC방 프리미엄 혜택을 제공하긴 했지만 집으로 향하는 발길을 바꾸기에는 불충분했다. 정말 임팩트 있는 꾸준한 혜택이 제공된다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PC방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심사숙고해 만든 대안이 PC방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모든 챔피언을 무료로 선택,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혜택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본사를 설득해야 했다. 사실 〈리그 오브 레전드 〉는 무료로 누구나 이용 가능한 게임이고, 당시 게임 내에서 로테이션 방식으로 7종의 챔피언이 무료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랜덤 7종'에 국한된 것이었다. 한국 서비스 시작 당시 게임 내 챔피언은 아리를 포함해 88종이었다. 이 챔피언들을 PC방만 가면 모두 무료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큰 결정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것이 매출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 오피스에서는 이 방법이 친구 · 지인과 함께 플레이할 때 더욱 재미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특성에 맞는 방법이며, 또 PC방과 함께 상생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이라 확신했다. 결국 본사 경영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지속적으로 챔피언을 기획하고 추가하면서 게임의 재미를 더하는 구조다. 그랬던 만큼 신규 챔피언이 출시될 때마다 PC방에서 이 챔피언을 플레이해볼 수 있다는 것은 실제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라이엇 게임즈와 PC방 그리고 플레이어 3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생이었다.
PC방 상생 작전의 일환으로 'PC방 토너먼트'도 기획했다. 2012년 여름 처음 시행한 'PC방 토너먼트'는 e스포츠의 저변 확대를 통해 플레이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도록 준비한 아마추어 이벤트였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으며, 토너먼트 행사가 열리는 곳도 별도의 행사장이 아니라 참여 의사를 밝힌 동네 PC방이었다.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리그 오브 레전드〉의 기세를 확인할 수 있는 풀뿌리 동네 리그로서 소임을 다했다.
PC방 토너먼트 2년째가 되던 2014년 6월에는 참가 경쟁률이 310퍼센트로, 매 대회마다 실제 참가 가능한 인원의 3배 이상이 몰려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PC방 사장님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PC방 토너먼트는 유저들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PC방 사장님들에게는 매출 향상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PC방과 이를 찾는 고객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매장 홍보와 손님에 대한 서비스 향상에 도움이 됐다”, “손님들도 좋아하고 PC방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다”, “비수기에 이러한 대회가 영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사장님들의 말이다.
---「PC방 상생 작전」중에서
많은 기업의 궁극적 목표가 그렇듯 라이엇 게임즈 역시 〈리그 오브 레전드〉를 출시하기 전부터 글로벌 시장 진출을 계획했다. 라이엇 게임즈는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플레이어들은 세계 여기저기 모든 곳에 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의 문화와 니즈가 다르고 독특하므로 라이엇 게임즈는 각 지역에 적합한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접근하고 만족을 선사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대흥행을 이루며 성공적으로 세계 시장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처음에는 지역별 게임 퍼블리셔들과 제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휴를 맺은 퍼블리셔들이 플레이어에게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라이엇 게임즈가 직접 퍼블리싱을 하기로 결정했다.
타 지역에서 퍼블리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무척 힘들고 성공 사례가 많지 않다. 제일 큰 이슈는 운영적인 측면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본사와 지사 간의 혼란 및 갈등이 심해지기 십상이다. 본사 직원들은 직접 글로벌 차원에서 결정하고 리드하기를 원하고 지사 직원들은 본인들이 지역 전문가로서 권한을 갖길 원한다. 게임 자체가 워낙 훌륭해 플레이어에게 외면받을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면 단기적으로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내부 이슈가 대외적인 타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본사가 오너십를 갖고 있는 분야와 지사가 오너십을 가진 분야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라이엇 게임즈는 처음부터 본사와 지사 간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초기에는 센트럴(central)과 로컬(local)이라는 프레임워크를 사용했다. 센트럴은 글로벌 일을 하는 로스엔젤레스 본사에 있는 팀을 의미하고 로컬은 각 지사를 의미했다(로컬에는 북미 퍼블리싱팀도 포함된다). 센트럴은 글로벌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는 부분을 책임졌고 로컬은 지역별로 달라야 하는 부분을 책임졌다. 예를 들어 캐릭터, 스킨, 맵, 게임 플레이는 어디서나 동일해야 한다. 이처럼 글로벌하게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게임 내의 콘텐츠(in-game content)'는 본사 개발팀이 담당한다. 그리고 각 캐릭터의 포지셔닝 및 에셋asset도 세계적으로 동일해야 했다. 이 영역은 본사에 위치한 글로벌 마케팅팀이 책임졌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여전히 같은 게임을 한다고 느끼길 원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e스포츠 대회를 진행하려면 세계 모든 플레이어들이 같은 게임을 해야 했다. 만약 지역별로 게임, 캐릭터, 맵 등이 다르면 글로벌 대회에서 고려할 사항이 훨씬 많아진다.
지사는 현지화해야 할 것 그리고 각 지역별로 달라야 할 것을 책임졌다. 예를 들어 지사는 본사에서 만든 마케팅 가이드와 에셋을 활용해서 각 지역에 맞는 마케팅을 진행할 수 있다. 가령 서울 오피스는 한국 인플루언서와 함께 새 캐릭터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제작할 수 있고, 멕시코시티 오피스는 스킨 세일 이벤트를 할 수 있고, 파리 사무실은 플레이어 토너먼트를 개최할 수 있을 것이다.
---「'센트럴과 로컬' 프레임워크」중에서
초창기 롤드컵 챔피언은 시즌마다 달라질 정도로 혼전이었다. 그런 혼전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프로게이머가 나타났다. 롤드컵 3회 우승,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id Season Invitational, MSI) 2회 우승, LCK 10회 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리그 오브 레전드〉 e스포츠 프로게이머 누적 상금 전 세계 1위. 바로 페이커다.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 치고 페이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이 마찬가지다. 전 세계에서 롤을 플레이하는 2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페이커를 세계 1위로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월드클래스라고 말할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신인이던 페이커가 처음으로 해외까지 이름을 날린 경기는 잠실 올림픽 보조 경기장에서 있었던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서머 2013' 결승전이다. 당시 KT와 2:2로 막상막하가 된 상황에서 5세트에 블라인드 픽이 되었다. 관객 대부분은 당시 OP(over power)인 제드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고, 역시나 양 팀의 최고 선수가 제드 대 제드로 붙으면서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여기서 페이커가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며 상대 제드를 킬하는 영상이 전 세계로 퍼지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한 페이커는 그 뒤로 10년 동안 승승장구하면서 '프로게이머 중 최고의 프로게이머'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해외에서 페이커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로 뉴욕에서 있었던 월드 챔피언십 예선전을 들 수 있다. 관중이 잔뜩 몰려든 가운데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뉴욕 경찰 몇 명이 경기장에 들어왔다. 미국 경찰은 문제가 생기면 물리적으로 단호하게 제압하고 필요하다 판단하면 얼마든지 경기를 중단시킬 수도 있었기에 라이어터 모두 겁이 났다. 결국 현장 책임자가 쭈뼛쭈뼛 나서서 “무슨 문제가 있나요”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러자 경찰이 '페이커 보러 왔어요(I'm here to see Faker)'라고 신이 나서 대답했다. 뉴욕에서 월드 챔피언십이 벌어졌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근무복을 입은 채 들렀던 것이다.
또 2014년 파리 올스타전에서도 진귀한 장면이 벌어졌다. 그날이 마침 페이커의 생일이었는데, 누군가가 “Happy birthday to Faker”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든 관중이 따라 부르며 페이커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가 온 경기장을 메웠다.
---「페이커, 레전드 오브 LoL의 탄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