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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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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140*212*20mm
ISBN13 979116861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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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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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공통점이 하나 더 늘었구려.”
“예?”
회상에 젖은 홍설의 얼굴이 단박에 현실로 돌아왔다.
“가배를 좋아하고, 덜 익은 고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 말이오.”
‘이 자는 상대가 미소를 잃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홍설은 입가에 번지는 웃음만큼이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홍설 씨는 좋아하는 이성상이 어떻게 되오?”
“친일파만 아니면 됩니다.”
“케켁...”
미스터 리는 갑자기 목에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홍설은 못 본 척 태연하게 접시를 비워나갔다.
--- p.79

미스터 리는 전속력을 다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조여오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전차에 올라탄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드니 원 지사가 옆에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옆에도, 또 그 옆에도 수십 명의 원 지사가 자신을 노려보았다. 천하의 매국노. 더러운 피. 욕설과 함께 돌팔매질이 날아왔다. 미스터 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전차에서 굴러 떨어진 그는 동경 거리 한복판에서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억겁의 원죄는 조금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 p.139

“내가 경솔했소. 죽을 목숨인데 술도 마음대로 못 마시나 싶어 그런 것이니 부디 용서해주시오.”
요한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명화는 그런 그를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요한은 항상 결단력 있고 거침없는 사내였다. 그런 그가 동요하고 있었다.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김구 선생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을 들었으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생전 보지도 않던 신수를 보고 왔으리라. 그러나 혼란만 가중될 뿐, 무엇으로 그의 마음을 달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그의 마음을 추슬러줄 것인가. 그때 명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고개를 들었다.
“술이 아닌 다른 음료를... 드시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 p.210

“다가오는 21일 저녁 7시, 친일파 대신들을 동반한 영친왕 부부가 경부선을 타고 떠날 것이다.”
황제는 이완용에게 들은 그대로 홍설에게 전했다.
“예상대로 야간에 움직일 모양이군요.”
관부연락선을 타본 경험이 있는 홍설은 승객들이 주간보다 야간을 선호한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2시간 가까이 걸리는 여정이니만큼 지루함을 견디기에는 잠만큼 좋은 게 없기도 했다. 특히나 1등실은 휴게실과 식당까지 완비되어 있어 행장을 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세간의 이목이 거기로 쏠리는 그날이야말로 짐이 움직이기에 적기 아니겠느냐.”
홍설의 낯빛이 단박에 급물살을 탔다. 황제는 ‘소낙비’를 실행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 p.228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제국만세 등 제각기 부르던 구호는 곧 하나로 통일되었다. 누군가 흰 천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붓으로 써내린 독립기를 꺼냈다. 미처 준비 못 한 이들은 모자를 흔들었다. 붉고 퍼런 태극기가 등장하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까막눈인 아이도, 허리가 굽은 노인도, 젖먹이를 업은 아녀자도, 한복 차림의 기생도, 단발머리의 신여성도, 몰락한 양반도, 지게에 놋그릇을 진 장사꾼도, 땅뙈기 없는 소작농도 하나가 되어 같은 말을 원 없이 부르짖었다. 대한독립만세라는 단어가 입에서 발음되는 순간 이들이 느끼는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여섯 음절을 외친 것뿐인데 자신의 정체성이 절로 증명되었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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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브라운』은 경쾌하게 시작한다. 산미가 살짝 도는 연한 커피에 비유해도 될까? 주인공 네 사람은 모두 젊고, 매력적이고, 요령이 좋으며, 어디 가서 말로 질 사람들이 아니다. 일제라는 상황이 그들의 머리 위를 짓누르고는 있으나 작가는 신문물이 주는 활기와 격동기의 에너지, 바로 그 순간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품었을 당대에 대한 평가와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실존했던 역사 속 인물들이 픽션 캐릭터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논쟁을 벌인다. 초반 몇몇 장면들은 꽤 유쾌하기까지 하다. 소설은 독자들을 그렇게 끌어들인 뒤에야 네 남녀의 어두운 사연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휘말리게 되는 두 가지 음모를 풀어놓는다. 이야기는 얽히고 꼬이고 흥미진진해지면서 점점 무거워진다. 실제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아는데도 결말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들도, 독자들도 어려운 질문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필로그에서는 어떤 커피 향보다 진한 여운이 독자들을 기다린다.
-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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