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나는 그토록 슬프고 아름답고 강렬한. 그 어떤 단어를.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누군가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잊지 않기 위해서. 잃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기억하기 위해서. 무언가 간직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에 새겨놓은 간절하고도 간절한 모국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 먼 이국의 땅으로 밀려가. 기어이 보려고 했던. 보아야만 했던. 단 하나의 낱말이었다.
--- p.17
밤의 대기 속으로 스미듯 번지고 있는 〈아베 마리아〉는 영적인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렇게. 가만히 돌아앉아 흐느끼는 울음 같았고. 누군가 대신해서 울어주는 말 없는 위로 같았고. 음과 음 사이의 휴지기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구원받기를 체념하는 순간에 돌연 다가오는 초탈한 마음처럼. 희망의 여지없음을 생의 헌사로 받아들이기로 한 불구자의 내면처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음과 음 속에서. 순간이나마 통증을 잊을 수 있었고. 아니. 천상의 그물처럼 드리워진 그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의 비통함이 곱절로 육박해 들어와서. 순간이나마 잊고 있었던 몸의 통증은 더욱 극심하게 몰려들었고.
--- p.15
어떤 음악은 눈물처럼 쏟아진다. 군더더기가 될 것이 뻔한 수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불과 몇 줄 읽어 내려가는 것만으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처럼. 그러나 문자가 전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물성으로. 이 추상적인 물성에 대해, 언어화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해 늘 명확한 언어로 쓰고 싶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일은 매번 실패로 귀결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는 음악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 마음속에서 배음으로 흐르는 음과 색을 언어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 p.23
오늘의 내가 오늘의 모습일 수 있었던 것도 많은 부분 음악에 빚졌다고 생각한다. 오랜 은신처가 되어주었고 말 없는 대화를 나누는 친구가 되어주었으며 내 속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영매로서, 네 속에 이렇게 타오르는 불꽃이 있다고, 출렁이는 춤이 있다고, 터져 나오는 울음이 있다고, 음악은 내게 나도 모르는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언제나 나는 음악 속에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감정적 경험을, 무한히 날아오를 것 같은 고양감을 얻기를 기대해왔고.
--- p.57
어느 새벽 너는 조금 외롭고 지치고 힘든 것 같다. 너는 그만 생을 놓고 싶은 것 같고,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표류하는 마음으로 너는 살아왔다. 너는 네 마음을 물들이는 어둡고 무거운 기운에 맞서 은밀히 분투해왔고 그것에 함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것. 삶의 의미 없음. 단순히 무의미함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너는 허상과 허망함 속에서. 사소하고도 거대한 존재들이 네 곁에서 네가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이 음악 속에서 느낀다.
--- p.58
느릅나무에 익숙한 눈만이 느릅나무의 부재를 본다는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도 겹쳐서 생각했다. To a person chained in a cave, the shadows on the wall are reality. 하나 허상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전적으로 온전히 허상일 것인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그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 그와 같은 무게로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을 믿고 받아들이고 나아간다는 것.
--- p.95
그래. 사람들은 모두 다 조금씩은 미쳐 있고, 이상한 구석이 있고,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고, 그런 나쁜 습관과 반복되는 자기 교정의 실패 사이에서 제 삶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렇게 모두들 어딘가 웃기고도 슬픈 구석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너와 나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범주 속에 가둬질 수 없는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 p.99
어느 날 너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어느 복잡한 사거리의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선다.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더는 네 의지대로 걸어나갈 수 없는 채로. 그때. 너무 많은 소음과 너무 많은 사람과 너무 많은 살아 있음 속에서. 너는 홀로 소외되어 죽어 있는 너 자신을 목격하였고. 순간 더할 수 없는 슬픔이 더할 수 없는 슬픔을 집어삼켰으므로. 너는 슬픔을 벗어난 무엇이 되어 거리 한가운데 버려졌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비밀스러운 마음으로 인해 돌연 너는 이 세계의 통속으로부터 벗어난다.
--- p.105
언제나 나는 나를 사로잡는 낱말의 신비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나아가 그 낱말에 덧입혀져 있는 신비를 기어이 만나게 되는 알 수 없는 우연의 인과에 대해서도. 아주 어릴 적 소원 그대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는데. 글을 쓰는 깊은 새벽. 아픈 허리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면서 책상을 붙들고 있을 때면. 나는 자진해서 벌을 받는 사람이 되었구나 생각하곤 했고. 어떤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왜 고통이라는 마음의 낱말 대신 통증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몸의 낱말을 가져와 현실의 곤고함을 지우고 누르려고 하는 것인지 생각했고.
--- p.126
글쓰기는 개인의 고독과 병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글쓰기는 한 개인 내부의 가장 허약한 지점에서 떠오른다. 백지 위로. 불쑥. 하나의 신음처럼. 어떤 고통들, 어떤 결핍들, 어떤 상처들. 그 글쓰기가 나아가는 지점은 개인의 더 큰 고독과 병증,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아직 자신에게조차 밝혀지지 않은 심연의 저 밑바닥이다.
--- p.145
제 존재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게 될 때 우리에게로 찾아오는 그것. 아픈 말인 동시에 무한히 날아오르는 말인 무엇. 한 편의 시가, 지금 나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말을, 없는 나의 입을 대신해 그 행간의 침묵으로 말해줄 때. 당신이 그 가득한 공백과 여백을 읽고 또 읽고, 찾아내고 또 찾아내게 될 때. 당신은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언어가 있었음을, 그리하여 말하지 못한 그 말을 어느 깊은 새벽 홀로 깨어나 백지 위로 옮기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 p.168
인간은 가장 어둡고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나의 자리를 넘어 너의 자리로, 생 이전과 이후의 어두운 빛을 발견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의도도 과장도 없이 그저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얼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살아났고 살아냈고 다시 살아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문장의 걸음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결엔가 삶 쪽으로 바짝 붙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p.171
어떤 주제나 소재를 찾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으면서, 무엇을 쓰는지 모르는 채로 써 내려가는 것. 삶에 대한 애정을 견지하면서. 재능과 용기를 끝없이 불러내면서. 지속적으로 규칙적으로 조금씩 써 나간다는 것.
---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