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불안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흔히 겪으며, 마음에 딱 달라붙어서 떨쳐내기 어렵고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우울과 불안을 일시적으로 느낀다고 해서 병으로 취급되지는 않습니다. 생활사건에 따라서 다양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친구가 세상을 떠났는데 우울함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전혀 불안해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요? 이렇듯 제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모든 감정은 경험에 대한 반응의 지표이자 적응적 행동을 동기화하는 나름의 기능성을 지녔습니다.
--- p.21~22
우리는 종종 문제를 해결하고자 반추를 한다고 믿습니다. 과거의 실수를 잘 되짚어보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과거를 반성함으로써 좀더 성숙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반추와 반성(reflection)은 다릅니다. 둘 다 문제의 발생원인을 되짚어보는 사고 활동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반추는 의식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동으로 과거의 잘못을 파헤치는 사고 유형입니다. 반면에 반성은 의식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해결책을 모색하는 능동적 사고입니다. 반추는 기대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자신을 직면하기가 두려워 ‘그때 그랬더라면’ 하고 과거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반성은 과거를 점검하고 더 나은 미래를 비추기 위해 거울 앞에 당당히 서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 p.32~33
일상에서 흔히 ‘신경이 예민하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신경성이 높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경성은 유전적 소인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에게 유전되는 특성은 뇌 기저핵 부위의 과민 반응성과 이러한 과민 반응을 억제해주는 전두엽 기능의 감소입니다. 따라서 의식적인 노력으로 뇌 심층부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과민 반응을 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신경성이 높은 사람들은 이러한 유전적 취약성뿐 아니라 일반적인 심리적 취약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에 만성적으로 시달립니다.
--- p.50~51
기술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 살던 원시인들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보라가 치면 치는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주어진 여건을 견디는 삶을 당연시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본적인 냉난방이 되지 않는 환경에 거주하는 것은 비인간적 처사가 됩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은 놀라울 정도로 커졌고, 이 통제력을 발휘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당연히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실 인간의 통제가 가미된 살기 좋은 세상은 당연히 주어지는 기본이 아니라 엄청나게 발전된 문명의 산물이라는 것을 간과합니다.
--- p.70~71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자신과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감정, 욕구 등 내 내면세계에서 벌어지는 경험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만 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경험들은 물론 내 일부이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에 대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으면 그 경험이 내 전부이고, 나는 여기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같이 느껴집니다. 우울할 때는 이 우울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고 나라는 인간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내 경험의 일부로 우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울에 빠진 상태에서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 p.99
인지적 탈융합은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벌어지는 생각과 현실을 구분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생각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리를 둔 그대로 관찰하는 과정을 일컫습니다. ‘나는 우울해’라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우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탈융합으로 ‘우울’이라는 말과 연합된 온갖 과거 기억과 부정적 이미지, 자기 비난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됩니다. 그것들을 현실처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마음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시적 해프닝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 p.102~103
신체의 크고 작은 병들이 심리적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울 것 없는 사실입니다. 신체적 질병은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는 단지 정서적 문제일 뿐 아니라 다양한 신체적 증상을 포함합니다. 우울장애는 피로감, 신체 활력 및 면역력 저하, 체중 변화가 동반될 수 있고, 불안장애는 근육의 경직과 긴장, 심계항진, 손발 저림, 두통, 복통 같은 다양한 신체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편, 신체 건강의 악화가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신체 손상, 만성 통증은 삶에 대한 비관적 예상을 야기하고, 예기치 못한 몸의 변화는 우울과 불안으로 이어집니다.
--- p.125~126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 내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로 여겨지며, ‘너 자신을 알라’는 모든 심리치료의 기본 명제이기도 합니다. 정신분석치료는 자신의 무의식적 갈등을 의식함으로써 무의식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추구하며, 행동치료는 자기 행동을 이끌어낸 선행 요인과 그 행동의 결과를 이해함으로써 부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을 줄이고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을 늘리고자 합니다. 인지치료는 자신의 역기능적 신념, 부정적인 자동적 사고를 파악함으로써 좀더 긍정적이고 기능적인 생각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p.140
우울과 불안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뇌는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이러한 화학작용을 거슬러 증상에 역행하는 행동을 수행하기는 무척 어렵고, 가라앉는 배에서 손을 떼는 것에 맞먹을 만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난간에서 손을 떼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행동입니다. 그저 손의 힘을 살짝 풀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시도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아주 복잡한 고난도 동작이라서가 아니라 내게 익숙하지 않고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시도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 p.154~155
거시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강박적 물음은 우울과 불안에 취약한 사람들의 인지적 특징입니다. 이들은 현실에 발을 담그고 살아가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경험하기보다 삶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동기는 삶에 대한 비관여적 태도를 강화합니다. 한 발 빼고 인생을 살려는 자세는 자꾸만 거시적 관점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고, 근원적인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만 이 삶이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이 강박적 시도는 삶의 무의미함을 재차 확인해줄 뿐입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특별하고 거창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p.163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아이가 울며불며 생떼를 부릴 때 아이로 하여금 올바른 정서조절의 기술을 습득하게 하려면 부모의 단호한 인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하고 무엇이 불편한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말해봐.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어” 하고 말입니다. 그러한 인도 속에 아이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자각하게 되고, 타인의 마음과 내 마음은 똑같지 않다는 것과 똑같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 p.193
수용전념치료에서 ‘가치(value)’는 목표(goal)처럼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목표는 달성될 수 있는 특정한 지점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가치는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치는 우리에게 ‘내 삶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선택하게 합니다.
--- p.202
처음 심리상담을 받게 되면 지나간 상처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회한과 원망, 분노가 뒤섞인 혼돈의 시간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꾹꾹 눌러왔던 부정적 기억과 감정을 끄집어내면서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심리상담은 나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를 찾아내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내가 상처받았을지라도 현재를 살아갈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갈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의 책임을 오롯이 짊어지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에 고루 주의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 p.220
불안장애를 처음 배울 때 가장 먼저 다루는 내용은 불안의 적응적 가치입니다. 이를테면, 불안은 위험한 상황에서 느끼는 정상적인 정서적 반응으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원치 않는 부정적 결과에 대비하도록 동기화하는 유용한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적 불안과 달리 현실적 위험이 없는데도 불안을 느끼거나, 위험의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과도하거나, 위험 요인이 사라지고 나서도 지속된다면 병적 불안으로 간주됩니다. 즉 과도한 불안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사소한 위협의 단서를 침소봉대하는 격입니다.
--- p.254~255
즐거운 순간을 향유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들을 관통하는 인지적 특징 중 하나는 이분법적 사고(dichotomous thinking)입니다. 이들에게는 생각과 판단의 회색지대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선 아니면 악, 성공 아니면 실패, 사랑 아니면 미움, 행복 아니면 불행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흑백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이 흑백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해 보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언제나 이 선명함을 흐리는 흙탕물이 일어납니다. 행복한 한때에 끼어든 불순물 같은 불쾌함이 모든 순간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