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4년 05월 22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442g | 140*210*20mm |
ISBN13 | 9788950955779 |
ISBN10 | 8950955776 |
발행일 | 2014년 05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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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08쪽 | 442g | 140*210*20mm |
ISBN13 | 9788950955779 |
ISBN10 | 8950955776 |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10만부 돌파 기념 스페셜 에디션)
16,020원 (10%)
서문 chapter 1. 행복은 생각인가 chapter 2. 인간은 100% 동물이다 chapter 3. 다윈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행복 chapter 4.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chapter 5. 결국은 사람이다 chapter 6.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chapter 7. ‘사람쟁이’ 성격 chapter 8. 한국인의 행복 chapter 9.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참고문헌 |
당신이 알고 있던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 열렬히 사랑한 두 사람이 있었다. 둘은 결국 헤어졌고, 남은 것은 실연의 아픔이었다. 울며 지새는 밤이 얼마나 흘러야 가슴속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이별에는 ‘시간이 약’이라지만 그보다 빠른 약이 있다. ‘타이레놀’이다. 돌팔이 처방 같겠지만, 과학적 근거가 있는 얘기다. 진통제로 마음의 아픔을 줄일 수 있다는 논문이 최근 발표됐다. 심리학자 네이든 드왈은 심적 고통을 겪는 62명을 대상으로 21일간 실험을 했다. 한 그룹에게는 매일 타이레놀을 2알씩 복용하도록 했고, 또 한 그룹에게는 아무 약효가 없는 약을 처방했다(물론 양쪽의 약 성분은 미리 공개하지 않았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타이레놀 그룹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아픔을 느끼는 정도가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이다. 인간은 왜 행복을 느끼는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우리 뇌는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똑같이 받아들인다. 몸과 마음의 고통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생존, 그리고 번식.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인간 역시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별의 고통을 알지만 다시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아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얻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인생은 계속된다. 꿈을 위해, 사랑을 위해, 결국 행복을 위해 우리는 살아간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삶의 최종 목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인간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이 확고한 신념이 만약 허상에 불과하다면? 꿀벌은 꿀을 모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벌도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 법칙의 유일한 주제는 생존이다. 꿀과 행복, 그 자체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둘 다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서문 발췌) 행복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키는, 행복의 진실에 대한 역설이자 반기다. 저자가 그 근거로 삼은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다. 행복 분야의 권위자 에드 디너 교수(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지도 아래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인용되는 행복 심리학자 중 한 명이다. 저자 역시 ‘인간은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고차원적인 존재’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20년을 연구해왔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다. 깊은 고민과 연구 끝에 얻은 결론은, 인간은 지능이 높을 뿐 타조나 숭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100% 동물이라는 것. 이 새로운 시각은 행복에 대한 근본적 생각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리고 저자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인간도 동물인데, 이 동물은 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행복의 기원』은 이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결론이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수단 왜 인간은 행복을 느끼는가? 저자는 난데없이 개 한 마리를 등장시킨다.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인 개. 인간은 야생의 개를 집안으로 들이면서 교육과 훈련을 시키기 시작한다. 개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무척 이기적이다. 눈썰매를 끌라 하고, 마약 탐지를 시키고, 집 지키는 것도 모자라 온갖 쓸데없는 개인기까지 보여달라고 조른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주인을 만나면 서핑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이건 뭐,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철없는 개 주인의 입장은 이렇다. 공놀이도 하루 이틀이고, 뭔가 기막힌 재주를 가르치고 싶다. 미개척 분야인 서핑을 택한다. 문제는, 어떻게? 서핑은커녕 바다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리는 개를 어떻게 서퍼로 만들 수 있을까? 다행히 주인은 자기 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것은 새우깡이다. 갑자기 희망이 생긴다. (본문 65~67쪽) 자, 이제부터는 조련이 시작된다. 개가 물가로 오면 새우깡을 하나 준다. 그리고 물에 발을 담그면, 서핑보드에 한 발짝 올라오면, 또 새우깡을 준다. 한 단계씩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상을 주는 것이다. 결국 개는 서핑을 하게 된다. 서핑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서핑을 하고 있다. 개는 단지 새우깡이 먹고 싶었을 뿐이다. 저자는 개가 서핑에 성공한 이유가 ‘새우깡을 먹을 때 뇌에서 유발되는 쾌감’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 쾌감을 계속 느끼기 위해 개는 새우깡을 자꾸 먹으려 했던 것이며, 그 결과가 서핑의 성공이라고 말이다.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인간이 음식을 먹을 때, 데이트를 할 때, 얼어붙은 손을 녹일 때 ‘아 좋아, 행복해’라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또다시 사냥을 나가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본문 68~69쪽) 먹고 자고 사랑할 때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 결국은 생존을 위해서다. 행복, 즉 쾌감을 느껴야만, 혹은 쾌감을 느끼기 위해 인간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데 몰두한다. 이 관점으로 보자면 행복은 삶의 최종 이유도 목적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게 우리의 현실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어쨌든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대학 간판을 위해, 연봉을 위해, 집 평수를 위해 분투한다. 아마 많은 이들의 소원이 ‘로또 1등’일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실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1년 뒤 느끼는 행복감이 보통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인간의 감정은 어떤 자극이나 변화에도 ‘적응’을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저자의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의 한 구절이다. 저자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이라고 강조한다. 살아가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민이 ‘어떻게?’에 그치는 삶과 ‘왜?’를 고민하는 삶은 분명 다를 것이다. 이 책에 대해 사회심리학자 허태균 교수가 쓴 추천의 말이 그 의미를 요약한다. “이 책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왜 행복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
이 시대 최고의 행복심리학자가 다윈을 만났다. 결국 그의 위험한 생각에 세례를 받았고, 급기야 행복 연구의 방향을 180도 틀었다. 이 변곡점에서 저자는 외친다. ‘행복이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틀렸고, ‘모든 것은 생존과 번식의 수단’이라는 다윈이 옳았다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고 생존하기 위해 행복한 거라고. 이 책은 온갖 행복 테크닉에 중독된 우리 사회를 향한 광야의 외침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위험한 진실을 말하는 저자의 방식은 세례 요한의 비장함보다는 우디 앨런의 지적 익살에 가깝다. 학자의 지적 성실함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심지어 너무 재밌다. 이제 행복에 대해서도 ‘왜?’를 물을 때! 장대익(진화학자, 서울대 교수, 『다윈의 식탁』저자)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행복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을 외워도, 이해해도, 따라 해도 전혀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 답이 바로 이 책에 있다. 뻔한 교훈들로 채워진 행복에 대한 오해와 착각들을 한 방에 날려버릴, 행복에 대한 가슴 아픈 진실이다. 이 책으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왜 행복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행복이라는 전설의 용을 멋지게 그린 동화를 원하는 어린이가 아니라, 행복이라는 동물을 조각조각 해부한 과학적 보고서가 필요한 지성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책이다. 허태균(사회심리학자, 고려대 교수, 『가끔은 제정신』저자) |
일상적 삶이 균열되어 머릿속이 복잡하고 지칠 때면 뒷산으로 걸음을 옮긴다. 더 이상 불행의 늪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걸음을 떼면서 복잡한 머리를 식힌다. 냉정하게 현상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해 놓은 글은 직관적으로 행복해지려는 삶에 제동을 걸어준다. 행복한 삶을 갈망하는 이들이 늘어난 만큼 행복을 소재로 한 글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 있지만 추상적인 말들의 향연으로 공허함만 남기는 경우가 있어 씁쓸해질 때가 있다. 어떻게 하변 행복해질 수 있을지 고민하며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찾았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왜 인간은 행복하다는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조명하며 살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고 밝히는 <<행복의 기원>>은 종전의 책과는 다른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지금의 상황이 힘들지만 생각을 고쳐먹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여기며 긍정의 힘을 남발할수록 행복과는 멀어지는 경험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행복은 사람 안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한 경험이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행복해지지 않음을 각인하게 된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삶이 안쓰러울 때가 있지만 승부욕 있는 이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될 때면 행복이 생존과도 직결됨을 알아차리게 된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한 삶에 있다고 단언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간다. 목적론적 사고에 사로잡혀 행복과는 거리 있는 일상을 걸으면서도 머지않아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처진 어깨가 연상된다.
저자는 목적론적 관점과는 달리 인간의 모든 특성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도구로 정신적인 특성까지도 생존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진화론적 관점에 힘을 실어 긍정적인 정서 경험이 주는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좌우한다고 보았다. 짝짓기를 통해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뿐 아니라 절대적 생존을 위해서도 타인은 필요하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 살다보면 크고 작은 고통이 엄습하여 생존을 위협할 때가 있지만 고통 같은 부정적인 경험은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게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따라서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고, 개인이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이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니 성공적인 삶의 요건으로 정해 둔 잣대가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배금주의가 고착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돈을 위시한 재물을 축적하는 일을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는 경향이 많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가 있다.
부모의 유전자를 받은 자녀는 조금씩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는 일련의 경험 속에 구체적인 틀을 잡아 성격을 형성한다. 동물 연구를 통해 저자는 성격의 특질 중에서도 행복은 외향성과 관련이 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가는 사회성이 행복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결론 내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소비하는 뮤지컬 관람 같은 경험 구매는 혼자 사용하기 위해 구매하는 경우보다 행복과 관련이 깊다는 연구는 함께 하는 사람으로 귀결된다. 배우자의 죽음은 홀로 남은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실증적 연구가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이 행복과 관련 있음을 드러낸다. 저자는 집단주의적 문화가 지배적인 우리나라의 경우 서열을 세우고 조직의 연대를 중시하여 구성원들이 만성적 피로에 시달릴 수 있음에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짐을 주시하고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국가들이 더 행복하다고 보았다.
물량적인 잣대로 행복과 불행을 나누기 전에 지금 자신은 행복한지 반문해 본다. 얼굴 맞대고 사는 식구들에게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다고 그들을 타박하면서 수월성을 추구할 때가 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러 경험 속에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에 놓여 있을 수도 있는데 원칙을 따르지 않고 본능대로 행동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그들이 행복하다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도 한 방편일 테다. 일반인의 합리주의를 들어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타인에게 정당화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본다. 저자는 구체적인 경험을 통한 쾌락에 뿌리를 둔 긍정적인 정서들로 생물학적 논리로 행복의 요소를 찾았지만 그 역시 절대적인 기준은 아닌 듯하다. 사람들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양한 경험 속 소소한 감정에서 발현될 수 있는 만큼 개인의 세부적인 행복 요소를 찾아보는 것도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의 시발점으로 인식될 수 있을 듯하다.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
자이언티(Zion. T)의 노래 <양화대교>에는
“~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라는 후렴구가 있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이 가사에는 행복을 위해 우리가 살아간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하지만 <행복의 기원>의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상식’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즉, ‘행복’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인류라는 종(種)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가진 모든 생김새와 습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도구1)”라는 것이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술자리에서 나왔다면, 피식 웃으며 농담으로 간주하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진통제로 마음의 아픔을 줄일 수 있다는 네이든 드왈(C. Nathan DeWall)의 논문을 제시하면서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심리학자 네이든 드왈(C. Nathan DeWall)과 동료들은 대학생 62명을 모집해 그들이 느낀 사회적 고통의 정도를 21일 동안 기록하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한 그룹은 매일 타이레놀을 2알씩 복용했고, 통제 집단은 아무런 약효가 없는 흰 알약을 복용했다. 참가자들은 약의 성분을 연구가 종결된 뒤 알게 된다.
놀라운 결과가 나온다. 연구자들의 예상대로 매일 타이레놀을 복용한 집단은 통제 집단에 비해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사회적 상처를 덜 느꼈다. 마치 두통을 없애주듯, 진통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사회적 고통도 덜어준다는 것이다.2)”
이 논문대로라면, 믿기 어렵지만, 인간의 뇌는 심리적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것도 양쪽 다 인류의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요소라는 이유로.
앞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생존과 짝짓기가 모든 생명체의 목적이라면, ‘고통’이라는 채찍만으로 목적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내세운 것이 ‘행복’이라는 당근일 것이다.
행복은 ‘강도’보다 ‘빈도’가 중요하다!
저자의 주장대로 인간이 생존과 짝짓기를 위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목적으로 알았던 행복이 수단이라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행복이 수단이라면 일발역전을 노리고 자신의 삶을 투자하여 큰 행복을 누리기 보다는, 작은 행복을 자주 맛보는 쪽을 택하고 싶다.
왜냐하면, 저자가 대학생의 행복감을 2년간 추적한 결과가 “대학생들이 일상에서 겪은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약 3개월3)”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짧은 유통기간을 가진 행복이라면, 큰 행복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는 것은 비(非)효율적이다.
게다가 큰 행복을 맛보게 되면, 일종의 내성(耐性)이 생겨 사소한 행복은 더 이상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으니...
우리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야 할까?
저자는 여기에 대해 찰스 다윈(Charles R.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B.C. 322)의 행복론을 바탕으로 하는 거창한 이론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남을 위해 사는 ‘가치 있는 삶(good life)’과 나를 위해 사는 ‘행복한 삶(happy life)’을 동일시하는 기존의 착각에 일침(一針)을 가할 뿐이다. 그리고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개내면 행복은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다. 행복과 불행은 이 장면이 가득한 인생 대 그렇지 않은 인생의 차이다.4)”라는 소박한 답변을 제출한다.
이 책을 읽는다고 우리가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지금까지 당연히 그렇다고 여겨왔던,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인식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의 기원이라길래 행복도 기원이 있는가 싶어서 읽어 보았는데, 행복의 기원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어서 잘 먹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라 한다. 역시 진리는 심플한 것인가 보다. 생각해 보니 역시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어었던 거 같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 역시 나쁠리 없지 않을까. 1+1=2라는 명제를 러셀이 증명하려고 그 난해한 수학원리를 썼다는 것을 보면, 이 행복의 기원의 저자도 먹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기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이 206쪽짜리 핸드북을 썼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가려 한다. 어쨋든 잘먹고 사랑 잘하면 그게 장땡이다. 그것도 아주 자주. 생존과 번식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존재 이유라는 관점에서.
그런데 말이다.
책읽기가 불편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읽다가 뚝뚝 끊기는 재주를 저자는 잘 알고 있는 듯이 책 내용의 괄호친 주석이 98개가 나온다(정확하지는 않다, 대충 세어 본 것이니). 그리고 외국인이든, (전문적이라는 듯한) 단어의 영어(잉글리쉬) 병기가 67개가 나오고 그중에 사람은 38명이 그렇다. 주석의 양으로 보면 일반적인 논문을 보는 듯 하다. 이 책은 보기에는 따라서 여러 논문을 짜집기 하였거나, 압축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사람이름이나 전문적이라는 듯한 단어를 영어로 병기하는 편집, 즉 '예를 들어 스탠포드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갓 마친 제프리 밀러 Gedffrey Miller라는 젊은 친구가'(56쪽)라든가, '문화에 대한 여러 학문적 정의가 있지만, 핵심적인 개념은 '공유된 이해shared understanding'다'(156쪽) 등과 같은 표현은 독자에 대한 지적 우월주의의 소산과 다름없다.
아니면 자신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편하게 책을 읽고 싶다. 학술논문읽자고 만오천을 지불한 게 아니다. 그깟 주석 좀 없으면 어떤가. 책 내용에 대해 나중에 누군가가 딴지를 건다면 그때 알려주면 될 것을 알고 싶지도 않는 주석, 별 의미도 없는 괄호주석때문에 책 내용이 뚝뚝 끊겨 읽을 맛이 정말 사라진다. 내용의 근거는 제발 학술지에 게재하는 논문에서나 밝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학자들이나 지명에 대해 쓸데없이 뭐하러 영어로 다시 쓰는 수고를 하는지, 할려면 다하든지,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Abraham Maslow라고 병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영문병기를 하지 않는지(46쪽) 그 기준은 모호하다. 미국 북동부의 파밍햄은 Farmingham이라고 병기하면서(176쪽), '1977년 스페인령 캐너리 군도'(24쪽)은 왜 영문병기를 하지 않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까탈스럽다고? 난 좀 책을 편하게 읽고 싶을 뿐이다. 난 행복의 기원이 알고 싶은데, 미국 동북부의 파밍햄의 영문표기가 행복의 기원에 무슨 보탬이 될 까 싶을 뿐이다.
오히려 짜증이 날 뿐이다.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과 번식의 진화론적 관점에 대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장은 언제나 흥미롭다. 예전에 인생이 무엇인가 갈구하던 유럽의 학자들에 티베트 어느 마을의 현자가 일러준 '인생이란 저 우물이다'라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정의 처럼 말이다.
끝으로, 고마은 마음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과 동료 선생님들(장대익 허태균 김상익 한동우 차명호 김민식 양재원 정경미 이석호 한소원 횽영오), 틀린 맞춤법들을 지적하며 즐거워하던 나의 제자들(신지은 최혜원 구자영 이지나 김동은 임낭연 손미나 김은비), 그리고 멋진 책을 만들어주신 한성근 팀장과 남연정 대리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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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