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좋네, 자식……!”
뒤에서 또 다른 놈이 수작을 걸어왔다. 헤수스였다. 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놈은 그 뭔가로 내 옆구리를 찌르더니 허리를 굽히려 들었다. 순간 돌려차기를 해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근데 이 촉감은? 뒤돌아보니 놈이 물건을 꺼내서 내 엉덩이에 박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난 놈의 샅을 쥐었다. 한주먹이었다. 놈은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앞뒤에서 날아드는 발길질. 최소한 네댓 명은 됐을 것이다. 상체를 낮춘 뒤 발목 후려치기로 원을 그리며 쳐나갔다. 녀석들이 낫에 볏단 베어지듯 나가떨어졌다. 상체를 일으켜 바지를 올리려는 순간, 머리 위로 모포 몇 장이 날아들었다. 다시 엄청난 발들이 날아들고 모포에 감긴 채 난, 쓰러지고 말았다. --- pp.62-63
죽도록 달려왔건만 막차가 떠나버린 느낌. 아니, 숫제 있지도 않을 차를 타기 위해 숨이 끊어져라 달려온 느낌. 난, 비어 있는 판사석을 향해 밤새 외운 문장들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죄가 없다! 자백하지 않았다! 내 변호인, 세르히오는 어디에 있느냐!” --- p.92
이렇게 힘들 땐, 당신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손이 약손이다, 그 약손 살다 보면 못 살게도 그리워, 많은 순간 캥거루 새끼처럼 폴짝 뛰어들고 싶다. --- p.153
안녕! 동음이의어지만 우리 만났을 때 나누었던 낱말로 헤어진다. 평소에도 서로 다른 억양으로 숱한 이별 연습을 하지 않았더냐. 만날 때 이별이 정해진다 하여도, 이별 또한 만남의 일부라 하여도,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이별이 아닌 한, 그 이별 착할 것 같지 않구나. --- p.140
뜬금없이 첼탈족 전설에 나오는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치첸이야기를 했다. 열두 여자를 만나 열두 여자의 수명을 살게 된 첼탈의 전사는 만년에는 ‘빨리 죽었으면’ 하곤 ‘죽음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 p.161
“3,000만 명이면 히틀러가 죽인 유대인 수보다 다섯 배나 많군요.”
“지금도 죽어나가니 훨씬 더 많겠죠. 굶주려 죽고, 린치당해 죽고, 원통해서 죽고, 살아 있다 해도 죽지 못해 사는 이들이 많으니…… 무엇보다 왜곡된 시선과 편견에 내몰리다가 죽죠.”
스키 마스크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의 말은 비교적 또렷했다. 말할 때마다 검은 마스크의 가운데가 벌렁거렸다.
“복면은 언제 벗을 겁니까?”
“멕시코가 가면을 벗는 날에요!” --- p.173
“1492년부터 계산한 겁니다.”
억압받아온 멕시코 원주민 역사를 상징하는 뜻에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딘 날로부터 기산한 것이라고 했다.
“백인 놈들, 특히 미국 놈들은 10월 12일을 신대륙 발견일이라며 축제를 벌이지요. 하지만 그건 발견이 아니라, 침략입니다. 엄연한 침략, 아주 잔인한……. 발견이란 남이 미처 보지 못한 사물 등을 찾아냄을 뜻하는데, 이 땅에는 2~3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요. 이 땅의 원주민들, 아니 원주인들 말입니다. 어디 그들이 개돼지였습니까, 발견이라 말하게? 마야, 아즈테카, 잉카……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어떤 문명보다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오란 말 잘못됐어요. 콜럼버스 놈이 이곳을 인도인 줄 착각하고 여기 원주민들을 인도 사람이란 뜻으로 인디오라 불렀잖아요? 고쳐야지요, 당연히…….” --- pp.172-173
인도 대마초인 하시시를 즐겨 하면 청각과 시각이 예민해지는데, 하시시가 술과 다른 점은 흡연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이완과 긴장, 그 어느 쪽에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음료수에 타서 마시면 자칫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어 담배처럼 흡입하는데, 이때 긴장을 하고 피우면 집중력이 높아져, 옛날부터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기능공 양성을 위해 사용되었다. 암살자를 뜻하는 아사신은 바로 하시신에서 유래한 단어로 ‘하시시를 들이켜는 사람’이란 뜻이다. 지금도 많은 저격수들이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하시시를 피운다. 케찰 대원 중, 레오넬이 바로 하시신이라 했다. --- p.215
“오 하나님, 피 좀 봐!”
그래, 의지대로 되는 게 있더냐. 끝으로 내 목숨만은 의지대로 하마.
물고 있던 하시시를 삼킨 뒤, 주머니에서 그 옛날 산드라의 총 데린저를 꺼냈다.?멕시코 혁명의 상징, 레포르마대로에서 머리에 총구를 박곤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날기 시작해 내 머리에 박히기까지……. 찰나에 가까울 것이건만, 나 살아온 31년보다 더 길게 느껴짐은…….
세상은 마지막 조명이 꺼져버린 무대처럼 어두웠다. --- pp.235-236
영의 개념을 최초로 고안한 마야인들은 죽음을 영에 이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영은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연결점이니, 이승과 저승의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음은 영이 되는 것이고, 영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연장점이니, 인생은 그 영을 기다리는 즐거움만으로도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 p.241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어온 미국은 과연 평등한 국가일까?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언급했을 때 그는 백인국인 벨기에의 권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나 제3세계의 유색인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굴의 백인우월주의자’였던 그는 각료회의에서 ‘검둥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뱉었으며, 흑인에게 주어졌던 관리직마저 빼앗았다. 미합중국이 정착한 해는 언젠가? 미국 역사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당연히 1620년이라 답할 것이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몰살시키고 정착했던 버지니아 지역의 역사는 지워버리고, 평화적 정착에 성공한 뉴잉글랜드 지방을 최초 정착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천연두 등 악성 전염병이 신대륙에 번져 면역력이 전혀 없는 인디언들이 힘없이 죽어감에도, 백인 식자층들은 이러한 천연두 같은 역병을 두고 야만인 제거를 위한 ‘신의 놀라운 기적이자 은총’이라고 했다. 콜럼버스 일행이 도착했을 무렵 아메리카 대륙에는 적게는 800만, 많게는 1,600만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백 개의 부족국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중에서 멕시코에 터를 잡은 마야와 아즈테카, 페루 지역에 터를 잡은 잉카족은 그 당시 유럽 문명과 궤를 달리하였을 뿐, 지구상 그 어떤 민족보다 훌륭한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륙의 정복자들은 진보와 문명의 이름으로 불과 십여 년 만에 절반 이상의 원주민을 학살하고 말았다.
리카르도의 강의는 날 변화시켰다. 체 게바라 이야기에선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 그렇다. 그의 말처럼 역사는 승리자가 쓴다. 콜럼버스 데이를 경축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삿날 혹은 망국일로 슬퍼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이 역사를 쓴 자들과 그대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자들 간의 현실적 간극이다.
--- pp.2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