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자(driver)는 말 그대로 내부 추진체다. “빨리 빨리! 제대로 해! 남자답게 받아들여! 뭐라도 좀 해!” 조종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강요된 자아 개념에 근거해 있다. 조종자는 우리에게 “완벽해라, 서둘러라, 다른 사람을 만족시켜라, 열심히 노력해라, 강해져라.”라고 명령한다. 조종자는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기어를 고속으로 넣는다. 자연스러운 속도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더 나아져야 하고, 더 빠르고 더 강해져야 한다. 조종자라는 용어는 의욕(drive)이나 동기(motivation)와 같은 심리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의욕이나 동기는 에너지나 열정처럼 내재된 자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조종자는 사람 내부의 생동감이나 에너지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일종의 강요된 자아의 압력과 동기 위에 떠 있다. 예를 들어 의욕이 넘치는 작가가 창의적인 글쓰기 자체를 즐기며,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원고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너는 글을 써야 해. 완벽하게 해야 해. 그것을 끝내려면 열심히 노력해.”라고 명령하는 심판자의 강요 때문에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 p.22
조종자에게 복종한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처음 조종자를 존중함으로써 얻고 싶었던 것과 정반대다. 바로 성취와 유연성 부족, 대인관계의 어려움이다. 조종자는 우리 삶 전반에 해로운 발자국을 남긴다. 조종자는 우리 행동에, 감정에, 스트레스에, 대인관계에, 자기존중감에 대가를 지불하게 한다. ‘서둘러’ 조종자의 지배를 받는 에일린은 직장에서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하면, 일곱 시에 잠자리에 들어 다음 날 아침까지 잔다. 일에서 오는 피로와 긴장 때문에 생기는 내부 신호를 무시해 교대가 끝나면 완전히 녹초가 된다. 그 결과 행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인 사교활동이 줄어들었다. 에일린은 심신이 고갈되고 공허해졌고, 그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술을 마신다. 또한 지쳐서 요리를 못할 경우를 대비해 패스트푸드 같은 고지방 식품을 잔뜩 사들고 퇴근한다. 결국 살이 찌고 옷이 맞지 않아 자존감이 떨어져, 일에 대한 에너지와 열정을 잃는다. 이 내리막 악순환은 더 가파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 --- p.50~51
두 번째 혼란자인 책임전가는 비난이나 책임을 진짜 원인이 아닌 다른 것,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을 뜻한다. 감정의 책임전가는 특히 해롭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감정의 책임이 다른 사람이나 외부에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너는 날 화나게 했어.” “내 친구의 말이 날 우울하게 했어.”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어떤 부정적인 시스템이나 어떤 사람이 기분을 나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저엥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감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아이나 감옥에 갇힌 죄수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나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직 내부 장애물이 저지할 때만 탈출이 불가능하다. 행동에 대한 책임전가도 있다. 학대행동(아동 학대, 배우자 학대, 자기 학대)을 한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며 외부의 어떤 것에 책임을 전가한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요.” “너무 시끄러워서 화가 났어요.” “더이상 ‘그것’을 참을 수 없었어요.” --- p.90~91
자기대화에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여보자. 이것이 변화를 향한 첫 번째 단계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자동 테이프를 잘 모른다. 우리가 운전을 배우거나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배울 때, 점차 배경으로 흡수되어 인지되지 않는 자기교수(self-instruction)처럼 우리의 자기대화는 내부에 깊숙이 감춰져 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뿐이지 그것을 유발하는 내부 결정에 대한 자각이 없다. 다행히 자기대화로 접근할 수 있는 지대가 있다. 바로 찬사, 비난, 새로운 프로젝트나 활동, 친밀한 공유의 기간 같은 외부유인 요인이다. 내부유인 요인 또한 내면의 풍경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 바로 감정, 신체적 증상, 회피 경향인데 한 마디로 부정적인 자기대화를 미리 알려주는 것들이다. 내면의 언어를 발견하려면 외적 요소와 내적인 요소, 둘 다 이용하면 된다. --- p.111~112
자아확인(자기긍정)은 자아에 대한 긍정의 선언이다. 그것의 초점은 성장에 맞춰져 있다. 자아확인은 내재된 자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다. ‘서둘러라, 열심히 노력해라’ 조종자의 압력을 받는 여성이 권위 있고 성과급이 있는 프로젝트를 수락하지 않고 자기 시간을 더 많이 가지는 것을 택함으로써 자아확인을 할지 모른다. 당연히 그녀의 친구들은 놀랄 수밖에 없다. ‘강해져라’ 조종자의 압력을 받는 남자는 지난날 ‘남자답게 받아들여라.’라는 숨 막히는 메시지와 정반대로 울 수 있게 된 것을 큰 성장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자아확인을 한다는 것은 자기 내부의 중심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지지할지 결정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제이미는 자아확인을 두 번 시도했다. 첫 번째는 제이미가 다섯 단계의 마지막 단계를 완료했을 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이 증발해버리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 p.153~154
만약 우리가 내재된 자아의 요구에 따라 행동한다면 언제나 막히지 않고 흘러가는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흥분, 행복, 에너지, 열정을 자주 느끼게 될 것이다. 분노, 슬픔, 피곤함 또한 경험할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 해도 이 감정들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고 지지할 것이다. 분노가 ‘분노 쌓아두기’ 과정으로 축적되지 않도록, 슬픔이 우울증 형태로 표출되지 않도록 표현하고 깔끔하게 끝난다. 한 마디로 자신과 싸우더라도 갈등은 없다. 우리는 내재된 자아의 흐름에 따라 행동할 때 감정이 어떤 신호를 보내더라도 귀를 기울이고 존중한다. 만약 햇볕을 쪼이며 긴장을 풀고 있으면, 자신에게 일어나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감정이 그렇게 하라고 신호를 보내면 따르면 된다. 연좌농성(자포자기)중에 있는 것이 아니기 대문에 관심을 끄는 생각이나 외부 이슈가 있을 대마다 기본적인 에너지가 요동치며 활동적이 된다. 또 비슷하게 슬픔과 분노 역시 강요된 자아에서 연료를 공급받거나 억눌려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치유할 수 있는 한시적인 감정에 불과하다. --- p.178~179
자기지지 발달의 마지막 장애물은 정신분석가 카렌 호니가 ‘헛된 자존심’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강요된 자아의 기대와 요구를 내려놓기를 거부한다. 기대만으로도 자기 증오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호니는 우리가 일찍부터 유명하고 성공하고 부유하고 박수받는 사람이 되려고 결심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진정한 바람과 잠재력을 외면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가치하고 부적절하고 살아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은 정도만큼 이상적인 이미지로 우리 자신을 재창조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에 있는 기본 믿음은 “내가 이런 존재, 혹은 저런 존재가 되어 이루고 성취할 수만 있다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다. 이것은 박사학위를 따는 것에서 연봉 5억 원을 버는 것까지, 또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서 괜찮은 사회적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신의 가치를 외적인 것에 두는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가 부족하다.--- p.211~212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 즉시 표현해야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친밀함을 증가시키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해준다. 만약 찰스가 더 높은 흥분을 느꼈을 때 모린이 남겨지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 순간에 모린이 느낀 고립감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에는 모린의 소외감을 되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남녀관계에서 성적 레벨과 정서적 레벨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성적 장벽이 정서적 장벽보다 더 쉽게 뚫린다. 그래서 남자와 밤을 보낸 여자가 다음날 그에게 전화하는 것을 어색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표준 방해자, 즉 최악의 상황을 예측하는 파국, 부정적인 자기낙인, 엄격한 요구는 때로 최소한의 주장조차 금지시킨다. 이런 위치에 있는 여성은 정서적으로는 남자와 피상적인 수준에 있지만 성적으로는 매우 친밀한 수준에 있다. 심지어 서로만을 바라보는 커플조차도 성과 관련해 친밀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 p.231~232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주장을 받아들일까? 왜 자유롭게 거부하지 못할까? 이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문제의 덫에 걸려 있다. 남편의 권리주장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혼의 두려움과 사우는 것이며 경제 문제와 싸우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권리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족 내에 혼란이 생기고 자녀가 그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주장을 완전히 거부하지 못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강요된 자아’가 요구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책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은 책임을 외부로 전가하는 사람이 비난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상대방의 비난이 사실적 근거가 있건 없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내부 조종자들 때문에 다른 사람의 권리주장에 더 취약한 상태가 되어 있다. 이런 내담자들은 타인의 부정적인 판단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상당히 향상된다. --- p.251~252
일단 내재된 자아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당신이 진짜 흥미로워하는 것이 현재 직업과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가장 즐기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친구와의 관계가 상호구조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연애가 내재된 자아에 거의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발견에 눈을 뜨면 당신은 내재된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 나중에 얼마나 비싼 비용을 치르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자신을 보호하고 돌보는 새로운 방식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치료한 적이 있다. 그 중 한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곳과 열배 이상 돈을 지불해야 하는 병원 사이에서 이곳을 선택했어요.” 생명을 위협하는 정신·신체질병들(암, 당뇨병, 관상동맥질환)은 삶을 바꾸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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