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9p
1년 이상을 준비했던 영화가 준비 단계에서 무너졌다. 순간 할리우드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준비는 치밀하지 않았다. 일단 돈이 될 물건을 팔고, 짊을 정리했다. 자전거를 구입하고 1,700달러가 남았다. 미국 지도를 구입해서 할리우드로 가는 과정에서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보니, 헤밍웨이의 키 웨스트(Key West)와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Fargo)는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시나리오와 카메라, 여행 물품들을 챙기고 2011년 10월 4일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 뉴욕을 벗어났다. 다가올 운명의 가혹한 시련에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무심한 마음이, 아무런 미련 없이 뉴욕을 떠날 수 있는 자신에게는 서러움이 느껴졌다.
빨래방 34p
나는 여정 동안 스스로 셀프 다큐를 찍고 있다. 찍은 영상은 맥 프로 컴퓨터로 편집을 해서 실시간으로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나는 뉴욕을 떠나기 전 ‘Be strong Be naked’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나의 미국 횡단 여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기 위해서였다. 별 다른 홍보는 하지 않았지만, 나의 사이트는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나는 많은 응원의 메시지들을 받았다. 나는 들떴고, 거대한 것을 상상하며 나가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더 좋은 장면, 더 극적인 장면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에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빗속을 뚫고 달리는 자전거와 한 인간의 인내의 모습을 담는다면 이 얼마나 극적인 연출인가. 그리고 버지니아에서 드디어 비를 만났다. 빗속을 달리며 미친 듯이 다양한 상황을 촬영하지만 항상 뒷수습이 남는다. 쫄딱 젖은 몸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광란에 휩싸인 나를 흔들어 깨웠다. 모텔을 들어갈 수도 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해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돈을 아껴야 한다. 나에게 돈은 곧 신의 현존이다.
맷집 62p
아무도 없는 들판에 돌돌 말린 볏짚들이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그 순간 아주 오래 전부터 폐부 어느 곳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폭발하면서 저 볏짚과 한판 싸우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볏짚에 달려가 드롭 킥을 날리고, 온몸을 다해 흔들어 쓰러뜨리고, 굴리고를 한 시간. 허기도 지고 머리도 어지러워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데 돈키호테의 구절이 생각이 났다. 여행 동안 읽을 책으로 돈키호테와 백년 동안의 고독을 가지고 갔더랬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돈키호테는 풍차를 향해 창을 꼬나들고 삐쩍 마른 로시난테와 함께 풍차를 향해 돌격한다. 하지만 풍차에 얻어맞은 돈키호테와 로시난테는 하늘로 솟구친 후 땅으로 곤두박질 쳐진다. 세르반테스는 어떻게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돈키호테라는 인물을 탄생시켰을까? 참으로 그 상상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머릿속에 그려졌다. 돈키호테가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로 돌격하는 모습이. 그 숭고한 용기와 정신이 보였다. 이제 내 자전거의 이름은 로시난테다. 로시난테! 몸을 던지러 가자! 맷집을 실험하자!
노동 138p
내가 추구하는 여행에서 노동은 절대 빠질 수 없는 키워드다. 노동은 인간의 가장 정직한 행위이고, 가치 있는 행위다. 인간과 우주와의 연결 관계를 이해하게 하며, 삶의 이유를 엿볼 수 있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재수없다. 내가 여행에서 노동을 즐기는 이유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질퍽하게 땀에 절인 상태가 되면 진짜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여행을 하면서 무작정 얼굴을 들이밀고 일을 시켜달라면, 이상한 동양청년이라 모두 의아해했다. 하지만 군 생활에서도 단련된 육체에서 예상 못한 엄청난 노동 능력을 선보이면 모두들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무엇이든 정확히 한 번만 가르쳐주면 실수 없이 오래 전부터 일했던 사람마냥 일 할 수 있는 능력은 내가 자랑하는 나의 고급 여행 기술이다. 이런 노동행위는 순전한 호기심과 경험의 욕구, 타인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과는 타인의 이해와 융화, 친구를 넘어서 가족으로 만들어주고, 덤으로 가끔씩 뜻밖의 돈과 음식도 준다.
혼자 154p
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생각에 잠겼다. 휴지를 들고 아무대로나 가서 바지를 벗고 대변을 남겼고, 발가벗고 돌아다니면서 소변을 봤다. 바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서 사방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라면을 부셔먹고, 홀짝홀짝 물을 마시면서 식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가까운 산에 올라도 보고,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도 보았다. 야생 가오리를 쫓고, 두더지에게 돌을 던졌다. 파리들을 죽이고, 모기를 쫓으면서, 광명과 함께 떨어지는 태양을 보았다. 밤새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두려워했고, 새벽에는 부들부들 떨면서 점퍼를 입고 지구 끝에서 솟아나는 태양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