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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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34쪽 | 186g | 120*200mm |
ISBN13 | 9791190999014 |
ISBN10 | 1190999013 |
발행일 | 2020년 0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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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134쪽 | 186g | 120*200mm |
ISBN13 | 9791190999014 |
ISBN10 | 1190999013 |
1장 인간 2장 자연 |
책이 나를 설득해 믿도록 한,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고 새기는데, 실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래, 결심했어! 했더라도 잊어 버린 나와의 약속들이 숱하게 많다. 그나마 잊고 새기기를 반복한 것들은 가끔이라도 머리를 흔들며 제 정신을 차릴 때 살짝 수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일상의 분주함을 잠시 멈췄을 때만 떠올리게 되는. 가장 자주 떠올리는 가치는 '사랑', 그 다음이 '배움과 성장'이다.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사랑하고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나이를 먹어가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것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에 힘을 실어준다. 요즘은 '별이 되기 전에'를 자주 떠올린다. '죽기 전에'란 말이다.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라는 의미다. 살아 있는 동안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금방 떠올리게 된다. 정신 없이 살다가도 이런 생각과 연결되는 태도와 행동을 선택하게 해준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자주 바꿀 수 있어, 무의식에 의지해 반복하는 일상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다. 다른 행동이나 말로 일상과 사람을 대하게 된다.
책이 내게 심어준 믿음 중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있다. 조금 유별나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얘기하기 힘든 이야기.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시련은 태어나기 전 내가 계획한 것이고, 이런 시련을 겪기로 계획한 이유는, 영혼이 이 생의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라는, 누가 들어도 황당할 것 같은 이야기다. 사후 세계와 연결되는 이야기라 증명할 길은 없지만 이런 생각을 자주 반복해 내 안에 심어놓으려 악착같이 애를 쓰고 있다. 지금 삶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방법 중 이만한 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나는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은 삶이 보잘 것 없어서였다. 삶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빠와 신을 사랑하는 엄마와 사랑이 무언지 모르는 나와 궁핍한 생활이 싫어서 나는 오랫동안 살아가는 일을 언제든 그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89쪽)
여기 이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죽지 않고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 내 안에 뿌리내려 있다. 책이 강제로 심어준 믿음이다. 이런 믿음을 준 책을 만난 게 절대 우연이라 생각지 않는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믿음도 내 안에 있기 때문. 삶은 우리가 잠시 거쳐가는 여정이지만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우리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선택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아무리 가혹한 시련이라도 좀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나는 심신이 힘들어 질 때마다 그렇게 의미부여를 한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읽은지 한참 됐다. 작가의 생각과 문장이 좋아 다시 읽다가, 이어진 책 <산책과 연애>를 찾아보게 됐다. 마침 유진목 시인 책이라 호기심에 구입. 작가를 알게 된 건, 이슬아의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에서 시집 <식물원>을 소개했기 때문. <식물원>도 미루다 이번에 <연애의 책>과 같이 구입했다. 낭만적인 연애,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없고, 씁쓸한 뒷맛을 남겼던 연애 경험,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 특유의 생각을 담은 <산책과 연애> 덕분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작가의 책들을 읽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가 했던 모든 연애는 나를 혼자서 걷게 했다. 걷는 것말고 다른 좋은 방법을 알지 못했다. 걷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 걸음을 멈추는 순간 나는 그를 죽이러 가고 말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조건 걸었다.(70쪽)
누군가는 생각하기 위해 걷고, 누군가는 잊기 위해 걷는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지인에게 의사가 그랬단다. 천천히 걸으면 잡념에 괴롭힘을 당하니 힘든 산행 같은 걸 해보라고. 평소 생각 없이 살았다면 생각하기 위해 걸어야 하고, 너무 많은 생각에 힘들다면 생각을 멈추기 위해 걸어야 한다. 연애와 사랑 모두 감정에 너무 치우치면 안 될 일. 타인을 대할 때는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그러니 산책은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좋은 습관이 될 수 있다. 철학자까지는 아니라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끼리 연애할 때 종종 자신이 하는 연애에 도취되는 사람이 있다. 방금 쓴 이 문장은 복수의 문장이다. 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연애를 통해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과 감정을 음미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달콤하게 여기는 듯하다. 자신이 쾌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매번 놀란다. (53쪽)
존중받지 못하고 상처받은 이야기를 읽을 때, 에고 에고(ego ego)하고 책 여백에 끼적였다. 요즘 나에게 또 다른 믿음을 심어주고 있는 책이 <에고라는 적>이라 그렇다. 덕분에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마음을 감지하고 내려놓으려는 노력을 일상에 더하게 됐다. 나로 살면서 내 입장을 내려놓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게 안 되는 사람은 타인에게 쉽게 상처주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런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우리는 거울 삼아 자신을 먼저 돌아볼 일이다.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인간은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에 유해하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인간이 타인과의 거리 두기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맺어온 관계들에서 다만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배운 것이다. (76쪽)
“이쯤에서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점이 있다. 이 책은 수기로 쓴 것을 타이핑해 정리한 것이다. 무분별하게 쓰여진 뒤에 나름 의도를 가지고 재구성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노트를 준다면 전혀 다른 형식의 책으로 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씨를 알아볼 수 있다면 말이다.” (p.30)
산책을 좋아하는, 어쩌면 산책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알뜰히 살펴보고 싶은 선배가 한 명 있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세 정거장이던가) 살고 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 같은 행정구역에 살고 있는 탓에, 내게 확진자 발생 문자가 날아오면 선배에게도 날아갔겠구나, 여기게 된다. 산책을 좋아하고, 산책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선배가 쉬이 돌아다니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품은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거의 매번 지고 만다. 사실이 그렇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내버려둔다. 사랑이 결여된 세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방치되어 무능력한 존재로 낙오한다. 낙오자는 사랑을 품은 채로 병든다. 먼저 마음이 병들고 병든 마음이 몸을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 많이 반성한다. 사랑하는 자신과 사랑이 없는 세계를 반성하면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진단한다. 하지만 세계를 바꿀 힘은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하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힘이 넘친다. 사랑이 없는 사람의 정력적인 얼굴과 힘찬 걸음걸이를 우리는 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병들고 무기력한 사람이다.” (pp.63~64)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어떻게든 제목에 사용된 두 개의 단어를 골고루 이용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면 《산책과 연애》에는 ‘산책’이 현저히 부족하다. 로버트 발저가 잠시 등장할 뿐이다. 로버트 발저는 《산책자》의 저자이고, 나는 이 책을 한 소설가로부터 추천을 받아 오래 전에 샀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 앞의 사분의 일쯤을 읽다가 멈춘 상태이다.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겠지...
“...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인간은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에 유해하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인간이 타인과의 거리 두기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것. 그것이 내가 살면서 맺어온 관계들에서 다만 인간으로 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배운 것이다.” (p.76)
그렇게 연애에 보다 한정되어 있는 산문인데, 그게 또 유독 우울하기 그지없다. 작가가 지금 남편과 함께 부산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안다. 책에 그 남편을 실명으로 그러나 가명인 것처럼 종종 등장시킨다. 그럼에도 우울하다. 나는 그렇게 투명하게 전시되고 있는 작가의 우울을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실상을 바라본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서점의 이름은 손목서가이다.
“’지금 죽는 것‘에 실패한 나는 대신에 ’언제든 사는 일을 그만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삶의 동력으로 삼았다. 언제든 그만 살면 되니까. 생각하면 희한하게 조금 더 살 수 있었다. 정말로 그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p.92)
기획으로 끌어올려진 단어가 왜 ’사랑‘이 아니고 ’연애‘인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생각했다. ’사랑‘이 어떤 완성된 형태를 지칭하는 것 같다면, ’연애‘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진행을 지시하는 것 같다. ’사랑‘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느낌이라면 ’연애‘는 거스를 필요가 없는 운명이라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연애‘는 왠지 허상인 듯한 ’사랑‘에 부여된 몸뚱이 같다.
“한번은 찻집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이제 막 찻집으로 들어오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내가 걸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 것을 보았다. 맞은편의 나는 나를 보고도 알지 못하고... 내가 나를 본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당신도 그런가? ... 당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나?” (p.127)
몸뚱이를 부여잡고 이리저리 보채는 글들이 책에는 가득하다. 징징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사랑‘이 아니라 ’연애‘여서 가능한 글이겠구나 여겨지기도 한다. 글을 통하여 자신을 전시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그리고 어쨌든 산문은 그런 전시에 유리한 장르이다. 《산책과 연애》는 온전히 사실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도 없고 온전히 허구의 영역에서 안심할 수도 없는 어떤 경계에 서 있는 글들의 모음이다.
산책과 연애 / 유진목 / 시간의흐름 / 133쪽 / 2020 (2020)
산책하다 연애한 이야기 또는 연애하며 산책한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더 좋았던 책이다.
저자는 평소에 산책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연애할 때는 종종 산책을 했는데, 애인과 다정히 손을 잡고 산책한 게 아니라 애인과 싸우거나 애인 때문에 속상할 때, 애인을 죽이지 않기 위해, 차오르는 살의를 억누르기 위해 산책을 했다. "나는 (인간에게 살의를) 연애에 환멸을 느낄 때마다 혼자서 걸었다. 산책이 나를 (살인자가 되지 않게) 미치지 않게 했다." 이런 솔직함이 미치도록 좋았다. 돌이켜보면 나도 애인과 다정히 산책한 기억보다는 애인을 이해하고 싶을 때, 이해하고 싶은데 실패할 때 산책한 기억이 더 많다. 그래도 살의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는데, 얼마나 독한 연애를 하셨기에...
저자는 말한다. 헤어진 애인들은 나를 "무언가의 대체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고. 이런 사람을 상대할 때 얼마나 우울하고 힘든 지는 나도 잘 안다. 나를 나로 보지 않는 애인들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저자는 감정에 침잠하는 대신 산책을 했다. 사랑 없는 사람에게 매번 지더라도 사랑이 결여된 세계에선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결국 쿠바의 어느 해변에서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다. 이렇게 쓰고 나니 무슨 로맨스 드라마 줄거리 같은데, 이 책의 문장이나 분위기는 로맨스 드라마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더 좋았다. 저자의 다른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