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내게 시간과 열정, 지혜를 투자했고 그 결과 나는 사회가 강요하는 남성성의 정의를 돌이켜볼 수 있었다. 학생이 된 것처럼 배울 게 태산이었다. 이런 나조차 여성을 무시하고 억압해온 남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나야말로 ‘선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을 때리거나 의도적으로 상처 주지 않는 착하고 평범한 남자 말이다. 우리 선한 남자들은 자신이 여성 폭력을 조장하는 문화에 어떻게 기여한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실제로 나도 그 가르침에 반발한 적이 있다. (이런 반발은 인종, 사회 계급 등 사회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이들이 자주 보이는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나를 인내해준 그 여성들 덕분에 여성 폭력을 멈추고 바람직한 남성상을 알리는 데 왜 남성들의 참여가 필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 p.10
하지만 이런 ‘착한 남자’들도 인지하지 못하는 게 있다. 그것은 남자들만의 특권과 그릇된 남성성의 사회적 학습이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내 목적은 착한 남성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을 공격한다고 해서 여성에 대한 학대가 멈추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남성들이 지금껏 어떤 식으로 문제의 원인이 되어 왔는지를 알리고 싶다. 대부분의 남성이 착한 심성을 갖고 있다 해도 이들 또한 일련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결과 사회적 교육의 가르침대로 남성 중심주의, 여성의 비인격화, 여성 학대의 주범이 되고 만다. 이런 사회적 학습 과정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조금씩 그리고 꾸준하게 이뤄진다. 이렇게 학습된 행동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파고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널리 용납되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 p.15
남성들은 남자다움을 집단적으로 배워왔다. 이를테면 남자는 여자와는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거나,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은 몇몇 여성을 제외하고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교육받아 왔다. 이는 남자가 악하거나 매정해서가 아니다. 모든 남성들이 이런 남자다움의 정의에 일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대다수의 남성들이 이처럼 집단적인 강요를 통해 남자다움의 정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 p.17
나의 남동생 헨리는 고작 십대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헨리의 장례식은 뉴욕 시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가량 떨어진 롱아일랜드에서 진행되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슬픈 순간이었다. 헨리를 땅에 묻고 우리 가족은 리무진 운구차에 올랐다. 도시로 되돌아가는 긴 여정을 앞두고 운전사는 우리 가족이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도록 잠시 멈춰 섰다. 어머니와 누이들이 차에서 내리고 나와 아버지만 리무진에 남았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당시 나는 스물한 살이었는데 그때까지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걸 싫어하셨지만 그렇다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아내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차라리 어린 아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게 여자들 앞에서 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아버지는 고작 10분 전에 어린 아들을 땅에 묻었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 아버지는 곧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에 대해 사과하셨다. 그리고 울음을 참아낸 내가 자랑스럽다고 칭찬하셨다. --- p.20~21
남성들이 ‘나는 여성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놈들과 다르다’고 애써 자신을 차별화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남자들은 스스로를 선한 남성이라 여기고 여성을 학대하는 이들은 마치 짐승인 양 취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을 비방함으로써 자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우리는 가해 남성의 폭력성을 정신병이나 가족력 탓으로 돌리고, 약물중독이나 분노조절장애의 결과로 치부함으로써 ‘일부 문제적 남성’들을 교화시킬 방법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남자들이 꾸준히 이런 이유를 강조하는 것은 ‘선한 남성’은 ‘나쁜 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량하다 믿는 남성들의 입지를 굳히는 방편이랄까? 하지만 이런 차별화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 폭력 문제가 일부 ‘나쁜 놈’들만의 문제가 아닌, 폭넓은 남성 중심주의와 성차별이 빚어낸 현상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만다. 남성들의 성차별적인 발상이 폭력 문제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모든 남성들이 이 문제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 p.24
폭력적인 남성은 우리 같은 평범한 남성들로부터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받는다. 남자들이 ‘나쁜 놈’들을 용서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간섭하지 않고 자기 일에나 신경 쓰는 것이 이에 속한다. 남자들이 남의 가정 폭력 문제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저변에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 (그 사람의 아내 혹은 여자 친구)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남성들이 침묵을 지킬 때 그 침묵은 폭력적인 남성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하고 결과적으로는 남성들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방해물로 작용한다. --- p.25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성 경험이 없다는 건 절대 인정하거나 자발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만약 용감하게 그 사실을 입 밖에 낸다고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말하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평생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우리 ‘남자’들은 마치 첫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우리들은 마치 두 살 때부터 섹스를 해온 것처럼 행동했다. --- p.32
동지애 또는 형제애라고 하는 남자들끼리의 동맹은 구성원 중 누군가가 부적절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잘못을 묻지 않는다. 나 역시 이 동맹의 일부였다. 구성원의 지인 여성 몇몇만 신사적으로 대한다면 얼마든 동맹을 유지할 수 있다. 가족과 친구에 해당하는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 여성들은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성적 대상물일 뿐이다. 이처럼 동지애에 기반을 둔 남성들의 문화는 폭력적인 남성과 선한 남성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그리고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들이 맨박스 안에 엉켜 있다. --- p.40~41
문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못 하다는 사고 패턴이 이어지다 보면 점차 다른 분야에서도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메시지로 증폭된다는 점이다. 남자아이에게 “여자애처럼 그게 뭐냐”고 말해보면 아이의 행동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 이론에 따르면 이르면 세 살, 늦어도 다섯 살쯤 되면 이미 아이들은 사회화 교육에 따라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된다. 여성과 여자아이에 관련된 말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엄마를 따라다니는 남자아이들에게 ‘마마보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는데, 알다시피 이건 달갑지 않은 말이다. 반면에 아빠를 잘 따르는 남자아이에게는 “다 큰 사나이”라면서 대견하게 여기는데 이는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된다. 최근 어떤 세 살배기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엄마는 오지 마. 나랑 아빠만 갈 거야”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언뜻 듣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말이지만 혹시 벌써 엄마와 여성에 대한 편견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건 사실이다.
맨박스는 남자가 남자다울 것을 강요한다. 남자다움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면 병신, 또라이, 고자 그리고 그중 최악인 ‘계집애’라 는 소리를 각오해야 한다. 이런 말들이 여성에게 어떻게 들릴까? 이처럼 여성에 빗대어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전반적인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 p.42~43
‘여자다운’ 행동과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남성들의 경향은 굉장히 우려스럽다. 남자는 절대 여자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하며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그릇된 믿음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여성보다 우월하므로 여성들을 리드하고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여지를 준다. 이는 여성에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도 된다는 허락과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맨박스는 이런 문화를 지속시키고, 우리 사회 남성들은 이를 답습한다. 폭력적인 남성이든 평범한 남성이든 가릴 것 없이 누구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p.54~55
남자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자동주행 모드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적 사고를 하겠지만, 웬만해서는 평소 하던 대로 남들이 하는 대로 큰 의심 없이 살아가는 걸 선호한다. 신입 여학생을 동물에 비유하는 여성의 비인격화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그래 왔으므로 별다른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비인격화의 대상이 추상적인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의심 없이 내뱉던 표현에 180도 바뀐 반응을 보이게 된다. --- p.72
한 여성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럼 왜 남자들이 하는 기분 나쁜 행동이나 말에 대해 바로바로 지적하지 않는 거죠” 그녀의 답변은 이랬다. “말하기 시작하면 남자들은 못 버텨요.” 그 답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정말 맞는 말이었다. … 여성들은 이걸 안다. 그래서 당신과 다른 남성들을 보호하고자 아무 말도 않기로 결심한다. 여성들은 맨박스에서 비롯된 남자들의 허세가 이런 갈등 상황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안전과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들이 겪은 상황들을 말하지 않고 속에 담아둔다. 심지어 여성들이 내게 털어놓기로는 만약 자신들이 성적 대상으로 취급된 경험을 전부 다 고백하면 자신의 남자 친구나 남편의 절친한 친구들조차 이에 포함될 것이라고 한다. --- p.75~77
나는 성인 남성들에게 어린 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애정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런 메시지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거부 반응이 있을 수 있으므로 최대한 애정을 담아서 전달해야만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조건 없는 애정을 담아 가르침을 전해주어야 한다. 남성들이 당장 삶의 방식을 바꿀 의지가 있는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남성들이 열린 자세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이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된다. 한번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다. 의식 없이 행동하던 자동주행 모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p.145
맨박스에 대해 거센 반발과 반박이 몰려오는 예외적인 장소가 있는데 바로 온라인에서다. … 남성들의 마음속에는 ‘어디서 여자가 자꾸 이런 시비를 걸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는 내용을 여성 강연자가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나보다 더 상냥하게 전달한다고 해도 결국 남성들은 같은 남성이 가르치는 것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건 남성들이 착하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남성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착한 남성들도 다른 남성들만큼이나 성차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그 어떤 남성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 p.154~156
한 명의 착한 남성이 있다. 남자는 집 벽에 구멍이 생긴 것을 보고 보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방으로 들어와서 구멍을 보고 말한다. “내가 전에 봐둔 새로 나온 연장이 하나 있는데 그걸 쓰면 구멍을 메우는 데 딱 좋을 것 같아요.” 남자(다시 말하지만 이 남자는 착한 남자다)는 아내가 하는 말을 들으며 생각한다. ‘이걸 메우는 데 어떤 연장을 어떻게 쓸지는 나도 이미 알고 있어. 구멍 하나 메우는 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반대로 어떤 이웃집 남자가 들렀다 치자. 벽에 있는 구멍을 보고 그가 말한다. “어쩌다 벽에 이렇게 구멍이 뚫렸어요? 제가 전에 봐 둔 새로 나온 연장이 하나 있는데요.” 솔직하게 인정하자. 이 남성은 이웃집 남자가 말하는 연장이 무슨 종류인지, 어떻게 사용하면 될지를 집중해서 들을 것이다. 아내 즉 여성이 구멍을 메우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이웃집 남자의 열 배쯤 갖고 있다고 해도 소용없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웃집 남자의 말이 아내의 말보다 훨씬 가치 있게 여겨진다. 아내의 말에는 주목하지 않으면서 이웃집 남자의 말에는 집중한다. 일부 남성들에게는 실제보다 과장된 듯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남성은 집단 사회화를 통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배워온 게 사실이다. --- p.156~157
중요한 점은 지배 집단인 남성들이 인간애의 큰 부분을 상실하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 집단에게 인간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채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이 결핍된 인간애를 되찾는 첫 계기가 바로 딸을 낳고 ‘우리 공주님’과 처음 눈을 맞추는 시점이다. 그 순간 남성은 자신의 세계가 변화함을 느낀다. 자신이 지금껏 주변 여성들에게 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자신의 딸에게 주어지길 바라게 된다. 이게 바로 딸을 둔 아버지들이 겪는 내부적 갈등이다. 딸을 둔 남성들은 자문해야 한다. “나는 내 딸이 나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달가울까?”
---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