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7년 0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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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안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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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10.25MB ? |
ISBN13 | 9788937473579 |
KC인증 |
발행일 | 2017년 09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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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10.25MB ? |
ISBN13 | 97889374735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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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작가의 말 작품 해설_실은, 어머니에 대하여 /김신현경(여성학자) |
소설을 나타내는 문장들을 보고 이 소설 또한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궁금했던 건 민음사에서 나온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의 시선이 궁금해 자주 찾아 읽게 되는 시리즈 중의 하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역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소설을 읽어야 우리가 처한 현실을, 우리의 미래를 미리 엿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팠다.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을 말하는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남자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의 여자들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 엄마가 돌보는 여자 환자 젠, 엄마의 딸, 딸과 함께 사는 여자. 작가는 여자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돌보는 환자의 이름도 이제희 이건만 미국식 이름으로 젠이라 부르고, 딸과 딸의 동성 연인도 서로 그린과 레인이라 불린다. 자기 딸이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지만 그들만의 애칭이므로 그녀가 관여할 수가 없다.
소설에서 엄마는 딸의 여자 친구 레인을 인정할 수가 없다. 공부도 많이 해 대학 강사로 일하는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도 낳고 살았으면 싶다. 딸은 왜 남자가 아닌 여자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저 레인이 눈에 안보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딸과 그 여자애는 몇 달 분의 집세와 생활비 명목으로 엄마에게 돈을 주었고, 그걸로 2층의 누수 문제를 해결했다. 꼼짝없이 그들을 보아야 했다.
엄마는 요양원의 젠을 보며 딸의 미래를 염려한다. 미국 유학까지 갔던 젠. 한국계 입양아인 한 아이를 오래도록 후원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도 없다. 그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고 있을 뿐. 젠의 모습이 마치 미래의 자신과 딸 모습인 것만 같다. 요양병원 측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기저귀 하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요양원에 들어온 젠에게 더이상의 돈을 지출하기 싫어 그녀를 갋싼 다른 시설로 보내게 한다. 엄마는 다만 사람을 사람답게 대했으면 했다.
나는 엄마의 염려가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았다. 엄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가족이 없으면 어때,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젊은 날의 패기일 수도 있다는 걸. 노년이 되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 가족이 커다란 버팀목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생각에 조금쯤은 동의하는 바다. 젠에게서 떠올리는 딸의 미래, 혹은 자신의 미래. 엄마는 그렇게 안타까워했다.
우리의 미래 이야기 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한 단면들을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성소주자라는 이유로 대학 시간 강사에서 쫓겨난 사람들,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취급하는 요양원 관계자들. 우리 사회의 병폐를 바라 보는 느낌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그 사람들을 대한다면 우리 또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다만, 그게 염려스럽다. 다만,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철학 소설 3부작 중 <평범한 인생>이라는 작품이 있다. 단순하고 뻔하게까지 느껴지는 삶에도 의미가 있다는 내용인데,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그 평범성에 대해 떠올렸다. 이 책의 주인공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 평범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냥 남들처럼 사는 것, 일 년에 한두 번은 여행도 가고 남들한테 자식 자랑, 손주 자랑도 하고 그런 삶. 주인공 '나'는 결혼하기 전 교사였다. 아이가 생기고 육아를 위해 퇴직하였다가 생계를 위해 도배, 교습소, 운전 기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지금은 요양 보호사로 일한다. 사별한 남편은 해외파견 건설노동자였다. 남은 재산은 낡은 2층집 주택. 가방 끈이 긴 딸은 시간 강사로 일하는데 밑 빠진 독처럼, 계속 손을 벌린다. 이제는 주택을 저당잡아 돈을 융통해달라길래 들어와 살라고 했다. 함께 온 그 애는 딸의 오랜 동성 연인이다. 나는 그 애가 싫지만 못 본 체 한다. 딸과 그 애가 점령한 주방과 거실에서 밀려나듯, 나는 내 방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다음 날, 그 애에게 집에서 마주치지 말자고 한다. 그 애는 넉달 치 집세를 냈으니 권리가 있지 않느냐 당돌하게 반문한다. 그 애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딸의 모습에 불편해진 나는 일찍 집을 나선다. 내가 돌보는 환자 젠은 젊어서 성공한 사업가였고 많은 사람들을 후원했지만... 젠을 보며 나는 나의 미래를, 딸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섬찟하다. 요양원에서 아무리 눈총을 받아도 젠을 정성껏 돌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나. 이제 그녀는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딸 대신 그 애를 붙들고 묻는다. 딸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직된 동료들을 돕는 시위를 한다고 한다. 퍼런 멍을 달고 들어오고, 집은 행동가들이라는 사람들과 피켓으로 가득하고. 왜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지 않느냐 원망하는 나에게 그 애가 말한다. 자신이 딸의 생계를 책임진지 벌써 몇 년 째라고. 이 관계가 의미가 없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윤택한 삶을 물려주지 못하고 경제적인 책임을 지지 못한 죄로 나는 할 말이 없다. 이게 부모로서 지은 죄일까.
주인공에게 평범한 삶이란 무난하고 안정된 삶이다. 최선을 다해 키운 딸은 똑똑하지만 사회와 타협하는 법을 모르며 제가 믿는 정의를 위해 어머니와 연인을 희생시키고 있다. 주인공은 어떤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삶이 괜찮은 삶인지는 안다. 평범한 삶. 대부분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범한 삶.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그런 평범한 삶, 엄마는 자식이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딸의 동성 연인을 못 본 체하는데 그 삶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피하고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인정하면, 딸이 앞으로 살아갈 삶은 젠의 삶과 다름없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결혼을 하면 남편도 있고, 자식도 생길 것이다. 늙고 아파도 돌봐 줄 사람이 생긴다. 엄마가 아는 평범한 삶, 젠과는 다른 삶이다. 동성애자로 설정되어 있으나 이 소설의 딸은 부재하는 아들처럼 느껴진다.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지 못해서일까? 함께 실린 평을 보면 자궁가족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 연장선 같기도 했다. 딸의 연인은 며느리이자 또 다른 딸이고.
우리 딸은 평범하게 살 수 있었는데 왜 너를 만나서라는 원망, 딸이 이야기해주지 않는 사정에 대한 해설을 해줄 사람, 딸의 빈 자리를 채우고 나와 잘 지내보려는 끊임없는 노력. 전통적인 가족에서 며느리 포지션이 아닌가. 게다가 가장이 큰 일, 바깥 일을 하는 동안 부모와 아내의 희생은 당연시되는 것도 은근히 겹쳐진다. 연인의 엄마와 잘 지내보려는 그 수많은 노력들과 밀어냄이 맘에 차지 않는 며느리를 보는 시모 같았다. 부모가 자식을 어떤 소유물처럼 느낀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사위라면 그런 말을 안 할 가능성이 있어서? 모르겠다. 경제적 불안정성에 관하여서는 언젠가 비혼을 다짐하는 글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렸다. 다는 기억이 안 나고 평범한 남자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다보면 당신이 생계를 책임지게 될 시기가 온다. 남자가 퇴직해서 집에 있으면 당신은 애들 키우고 마트 캐셔, 파출부로 일하게 된다. 그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경력이 단절됐기 때문이라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글이었다. 주인공의 삶이고 우리네 삶이다.
<딸에 대하여>는 주인공, 젠, 딸, 딸의 연인, 요양 보호사 동료 등- 등장하는, 세대를 넘은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어떤 안전망 바깥에 있는 삶. 그런 삶에 대한 글이다. 신념을 지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평범한 삶을 살아욌지만 여전히 평범한 그룹에 속하지 못한 '나'의 바람은 내일로 미뤄진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세계에서 그의 세계를 이해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삶인지도 모른다. 정의와 윤리를 찾는 딸과 딸의 연인의 열정이 때론 가리워진 세상의 고독을 보지 못한 것처럼. 모나지 않고 평범한 삶이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하는 엄마가 세상에 맞서는 딸과 딸의 연인을 젊은 날의 치기라고 짐짓 외면하는 것처럼. 겹치지 않는 세계에 몸을 담그고 상대의 일방적인 이해를 바라는 것은 평행선을 걷는 것... 그렇다면 세계를 넓혀서 겹치는 부분을 만드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삶이 고단하더라도 조금씩, 할 수 있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루를 살기도 힘겨워서 평범함이 사치가 되는 세계를 옮긴 글이다. 외롭고 서늘하고 지쳐서 놓아버리고 싶지만 놓을 수 없는, 그런 삶. 초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대사가 마지막에 몸을 뉘이는 장면 위로 맴돈다.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8페이지)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엄마가 바라보는 딸에 대한 내용이 아닐까 추측했다. 내 딸을 이야기하는 엄마의 시선으로 더 가깝고 애틋한 느낌이 이 소설을 가득 채웠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한없이 따뜻한 애틋함과는 거리가 있다. 딸이 아니라, 여자의 삶을 말하는 느낌이 더 큰 소설이다. 하지만 '여자 이야기'라고만 하기에는 뭔가 더 많이 얹어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 속 여자의 삶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소설이다. 동성애자 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는 자기가 배워온 대로, 살아왔던 대로 딸이 따라와 주기를 바라지만, 어디 자식이 내 맘대로 되는 존재였던가.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엄마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소설이 풀어갈, 결국 다다를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화자인 '나'는 노인 요양보호사로 요양원에서 일한다. 어느 날, 딸이 부탁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영부영 딸과 딸의 파트너와의 동거가 시작된다. 자기가 사는 집으로 들어온 딸과 딸의 파트너가 못마땅하지만, 몇 달 치의 생활비를 미리 받은 상태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여유 있는 삶이 아니었던 '나'는 미리 받은 월세 겸 생활비로 위층을 수리하는 데 다 썼다. 하지만 이 이상한 동거가 단지 딸에게 내줄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서로 이해 못 하는 상대의 마음을 가끔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면서 이들의 동거는 계속된다.
엄마는 바란다. 자신의 부족한 삶에 빗대어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조금은 부유하고 여유 있게 살기를, 혼자가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을 가진 평범하고 보편적인 삶을 만들어가기를, 사랑 하나에 목숨 거는 게 아니라 평온한 일상을 만들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통 '정상'이라고 부르는 삶을 만들어야 할 텐데, 딸의 동성애는 그런 의미로 엄마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다. 자기 일을 신경 쓰고 사는 것도 힘들고 팍팍한데 다른 이의 삶을 위해 같이 나서서 싸우는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고요하고 안전하게 사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오지랖 부리지 말고 자신만을 위한 선택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딸은 번번이 엄마의 그런 바람을 벗어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겪는 불합리한 일 처리를 보면서, 을의 처지로 별다른 항의조차 못 하는 자신의 인생이 비루해서, 딸은 자신과 다른 생활을 영위하기 바라는 엄마였다. 그런데 딸이 동성애자로 살면서 겪는 불합리한 일들을 보며 엄마의 불안과 불만은 커진다. 내 딸이, 내 자식이 왜...
단순하게 생각하면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한숨과 욕심처럼 보이는 이 소설은, 속내를 들여다볼수록 커다란 그림이 다시 그려진다. 요양보호사인 엄마가 돌보는 '젠'은 아이들의 입양과 후원으로 평생을 바친 여자다. 훌륭하다고 칭송받고 존경받았던 여자의 현재는 치매 걸린 노인,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움뿐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바쳐 봉사의 삶을 걸었던 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요양원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누워 지내는, 먹을 것을 탐내는 치매 노인으로 남았을 뿐이다. 젠을 돌보면서 엄마는 당신 딸의 인생을 겹쳐봤을지도 모른다. 내 딸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동성의 애인과 평생 살아갈지도 모르는데. 누군가 가족이라고 할 사람도 없고 힘이 되어주지도 못하는 노년의 삶을 맞이할 거로 생각하면, 딸의 현재를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던 거다. 그러니까 엄마가 걸어온 보통이고 정상이라 여기는 여자의 삶은 남편과 아이가 존재하는, 누군가 의지가 되고 돌봐줄 나중이 그려지는 거였다. 불합리함을 위해 싸우며 온몸에 멍이 들고 다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보호 아래 든든한 일상을 누리는 것. 그런 인생을 위해서는 동성애가 아니라 이성애로 만들어진 가족이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겪어온 인생에서 서글펐던, 중심에서 밀려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들 그대로 목격했는데, 딸이 그 대상이 되어가려는 걸 막을 수는 없을까, 하는 고민과 걱정. 엄마의 바람을 모르는 건 아닐 테지만, 딸이 가고자 하는 세상은 또 다른 곳이었으니... 그렇게 이해의 선을 넘지 못하고 싸움의 연속인 일상에서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여성의 삶이 이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그렇게 계속 흘러가도록 둘 수 없는 대책을 위해 온몸으로 말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세상에 스미지 못하고 소수자의 삶을 이어가려는 딸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내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딸의 외침을 이해하고 싶기도 한 엄마의 마음과 시선을 그대로 담은 소설이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서 변하는 건 오히려 엄마였다. 딸의 선택과 행동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의문 '왜?'를 찾아가는 길.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면서 그 안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현실적인 장면들을 그대로 고발한다. 이해가 아닌 다름을 인정하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많은 일을 엄마가 확인한다. '내 딸이 이런 세상을, 이런 마음으로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이해의 언저리쯤 닿았을까? 사실 이해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일지도, 타인의 이해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재어볼 필요가 없는 일은 아니었을까. 각자의 시선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다르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는 시간에 애타게 바라는 건 역시 그 이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늘 그 시간이 닿으려 애쓰는 곳은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가장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내가 하는 최선의 이해가 상대에게 닿는 지점.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딸이, 딸의 파트너가, 젠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삶의 최선이었을 테지.
이 애들이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그곳에 서서 이 애들이 무엇을 보는지, 보려고 하는지, 보게 될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밥알은 좀처럼 삼켜지지 않고 나는 울컥거리며 치솟는 뜨거운 것들을 계속 삼킨다. (149~150페이지)
노년에 다다른 여자의 삶은 어떨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왔어도, 세상을 위해 애쓴다고 살아왔어도 우리를 기다리는 노년은 소설에서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딸의 태도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읽을수록 엄마의 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세상 좀 살아본 여자의 한숨 섞인 목소리는 현실이었으니... 페이지를 넘길수록 세상이 혐오하고 배제했던 딸의 인생을 엄마가 품어주는 게 눈에 보인다.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엄마가 보듬고 배려해주는 시간으로 거듭난다. 엄마라는 존재가 그런 것일까. 소설의 제목과는 다르게, 결국 엄마를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