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17년 09월 15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16쪽 | 332g | 127*188*20mm |
ISBN13 | 9788937473173 |
ISBN10 | 8937473178 |
출간일 | 2017년 09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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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16쪽 | 332g | 127*188*20mm |
ISBN13 | 9788937473173 |
ISBN10 | 8937473178 |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레즈비언 딸의 부모이자 무연고 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로 혐오와 배제의 세계와 마주한 엄마의 성장소설 김혜진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가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딸에 대하여』는 혐오와 배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인 ‘나’와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이 경제적 이유로 동거를 시작한다. 못내 외면하고 싶은 딸애의 사생활 앞에 ‘노출’된 엄마와 세상과 불화하는 삶이 일상이 되어 버린 딸. 이들의 불편한 동거가 이어지며 엄마의 일상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김혜진은 힘없는 이들의 소리 없는 고통을 ‘대상화하는 바깥의 시선이 아니라 직시하는 내부의 시선’으로, ‘무뚝뚝한 뚝심의 언어’로 그린다는 평가를 받으며 개성을 인정받아 온 작가다. 홈리스 연인의 사랑을 그린 『중앙역』은 바닥없는 밑바닥 인생의 고달픔을 건조하고 미니멀한 문장으로 표현해 새로운 감각의 ‘가난한 노래’를 완성했고, 소외된 청춘들의 출구 없는 인생을 다룬 소설집 『어비』는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하는 단단한 마음”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김준성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신작 『딸에 대하여』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들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하지만 성소수자, 무연고자 등 우리 사회 약한 고리를 타깃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날선 언어와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구현하며 우리 내면의 이중 잣대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한편 ‘퀴어 딸’을 바라보는 엄마가 ‘최선의 이해’에 도달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타인을 이해하는 행위의 한계와 가능성이 서로 갈등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는 타인을 향한 시선을 다루는 김혜진만의 성과라 할 만하다. |
딸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 작가의 말 작품 해설_실은, 어머니에 대하여 /김신현경(여성학자) |
김혜진 작가님의 <딸에 대하여> 리뷰입니다
예전에 SNS에서 책 내용을 요약한 만화...? 일러스트......? 같은 홍보물을 보고 재미있겠다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구매해서 보게 된 소설이에요 그 홍보물의 내용이 강력해서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책도 역시 재미있네요
대한민국에서 먼저 여성으로써의 삶을 경험해본 엄마가 여자, 그리고 동성애자인 딸을 보며 그 세상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에 걱정되고 조금이라도 편한 세상이길 바라는 마음에 내뱉은 말이지만 그 말은 이미 그 세상에 살고 있는 딸에게는 상처로 다가오게 됩니다 엄마와 레즈비언 딸에 대한 소설이에요 재미있습니다
처음엔 세대 간 갈등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읽다 보니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 차이의 문제다. 그런데 좀 더 읽고 나니 다시 세대 간 갈등이다. 얽히고설켜 있다. 마침내 다 읽고 나니 세대 간의 갈등도 다가 아니다. 사회 참여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 같다.
다시 정리를 해보아야겠다.
세대 간 갈등
어머니인 ‘나’는 딸의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집 딸처럼 직장에 충실하고 결혼 잘해서 자식 낳고 알콩달콩 살았으면 좋겠는데 딸은 그렇지 못한 것이 속상하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도 반듯한 직장 하나 가지지 못한다. 결혼은 하지 않고 애꿎은 사회단체 활동을 한다. 소설의 첫 부분은 어머니가 지닌 기존의 가치와 이를 무시하는 딸의 태도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시작된다. 이것은 우리가 흔하게 보는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다. 다시 말해 세대 간 갈등인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걱정된다. 세상이 네가 생각하는 만큼 녹록지 않으니 다 살아본 내 말 듣고 따라라. 그러나 자식은 부모가 잔소리하면 말이 안 통한다고 문을 닫아 버린다. 세대 간 갈등은 인류사회가 시작할 때부터 생겨난 뿌리 깊은 것이다. 부모의 생각과 자식의 생각이 일치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신기한 일이다. 세대 간 갈등은 인류사회가 지속하는 한 영원히 윤회할 것이다.
그럼 이 소설은 그런 불가피한, 운명 같은 세대 간 갈등을 다루고자 하는 것인가?
세대 간 갈등을 다룬 소설 중에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소설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나’의 가치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나’는 끊임없이 심리적 갈등만 겪고 감정적으로 호불호만 이야기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건강한 지식이나 사회 참여에 대한 진지한 판단을 해보지 못한다. 그저 어머니의 자잘한 걱정, 소심한 생각뿐이다. 이에 반해 딸은 명확한 가치관과 사회의식을 지녔다. 그러니 이 갈등은 처음부터 불공평하게 시작되었다.
불공평한 다툼의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부모 세대가 딸 세대의 행동을 이해하고 보조를 맞추어가야 한다. 쉽게 말해서 부모 세대의 항복 선언, 혹은 대오각성이다. 원래 출발점부터 부모 세대인 ‘나’는 부당한 쪽에 서 있었다. 그래서 소설이 말하는 정의는 ‘나’가 생각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동성애.
동성애
동성애라니? 딸의 동성애는 모녀간 갈등의 정점이다. 그러나 이 갈등은 세대 간 갈등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동성애를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세대 간 갈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모든 딸은 다 동성애를 지지하고, 모든 어머니는 그걸 못 봐주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성애에 대한 논란은 세대 간 갈등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작가는 이것을 세대 간 갈등처럼 포장한 꼴이 되었다. 동성애에 대해 몰이해 하는 어머니를 내세워 마치 부모 세대들은 모두 동성애 반대론자인 양 비치게 했다. 부모 세대이지만 동성애자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식이 레즈비언으로 살아도, 아니면 독신으로 살아도 그 애 자신의 삶을 지지한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삶이니까. 그러므로 이 소설이 동성애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세대 간 갈등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동성애에 대한 담론을 주제로 삼고 있지 않다. 읽어갈수록 동성애라는 문제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은 하나의 소재일 뿐이다. ‘나’와 딸의 갈등을 한층 조장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동성애에 대한 담론은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는다.
대신에 중요한 다른 문제에 목소리를 높인다. 그것은 사회 참여의 문제이다.
사회 참여
사회적 저항운동, 혹은 사회 참여 의식이라고 할까? 나는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사회적 연대감이 부족하다고 본다. 그들은 개인적인 세계를 매우 존중하고 침해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함께하기보다는 혼자 개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딸은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동성애자 옹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투쟁하고 있다. 그러한 딸을 어머니는 못마땅해한다.
딸과 어머니의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난 일화가 있다. 이층집 남자가 가정폭력을 행사할 때 이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태도 차이를 표현한 장면이다. 딸은 경찰까지 부르면서 부당한 폭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저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를 바란다.
이 애들은 세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 책에나 나올 법한 근사하고 멋진 어떤 거라고 믿는 걸까. 몇 사람이 힘을 합치면 번쩍 들어 뒤집을 수 있는 어떤 거라고 여기는 걸까.
어머니가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은 불만이다. 작가에게 부모 세대에 대한 편견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1983년생, 서른다섯 살의 딸 세대이다. 실제로는 딸 세대인 작가가 소설에서는 어머니 세대의 화자가 되어 이렇게 독백한 것이다. 이 독백은 삶을 더욱 많이 살아온 사람들의 판단이 오히려 비겁하고 왜소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부모 세대들은 정의로운 죽음보다 비겁한 연명만을 추구하는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쥘리앵 소렐은 썩어빠진 기성 사회를 비웃고 조롱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젊은 세대인 쥘리앵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러나 ‘나’의 이 독백은 부모 세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정의롭지 못한 훈계를 젊은 세대에게 하는 꼴이다. 그녀의 말은 결국 이런 말이다. “너희들도 살아봐. 세상은 비겁하게 사는 게 제일이야.”
아, 이것은 젊은 작가의 부모 세대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김혜진 작가가 부모 세대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아니, 내가 잘못 보았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한낱 소설의 장치일 뿐 작가의 편견과는 상관없다고 말이다.
딸이 함께 사회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던 날에도 어머니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 사람들은 지금, 다만 이 순간에만 서로 좋은 친구들이고 동료들일 뿐이다. 언제든 돌아서면 그만일 사람들에 불과하다. 지금 내 집에 필요한 건 언제든 가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족이다. 딸애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도대체 이런 너무도 분명하고 명백한 것들을 딸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걱정하고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지는 논리가 따로 있다. 그것은 사회적 정의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집단의 목표는 반사회적인 것인가? 사회공동체의 선을 위하여, 혹은 이익을 위하여 애쓰는 것은 가족에게는 악이 되고, 손실이 되는가?
가족과 사회
이제 소설의 의도가 분명해지려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딸의 사회 운동에 심한 거부감을 보였던 ‘나’가 딸처럼 사회적 저항운동을 하는 것이다. 상사의 지시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젠의 다른 요양소 강제 퇴거에 항거한다. 이런 ‘나’는 일반적인 피고용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 점에서 ‘나’는 딸과 드디어 일치한다.
결국은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일 거다.
가족의 행복을 비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가족의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사회 참여로부터 온다. 부당한 사회를 그대로 두고는 가족의 행복을 장담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가 세대 간 갈등을 겪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사실은 둘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는 딸이나, 요양보호소의 폭거에 맞서 저항하는 어머니나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가족의 행복이 지켜지고 얻을 수 있다.
P.S.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은 남자가 철저히 배제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남편은 이미 죽었고, 아들은 없다. 이 소설에서 남자 인물로 등장하는 이는 ‘나’의 직장 상사인 권 과장, 젠이 돌보아 키운 베트남 청년 띠팟, 그리고 가끔 곤란할 때 집 앞에서 만나는 이웃 남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이들 세 사람도 주요 인물은 아니다. 권 과장은 기성 사회의 완고한 비인간성을 보여주기 위한 전형으로 등장시킨 것이고, 띠팟은 자기를 도와준 이에 대해 무관심한 남자로서 등장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웃집 남자는 쓸데없이 ‘나’의 심리적 상태와는 관계없이 관심을 보이는 등 주책을 떤다. 작가 김혜진에게, 아니면 적어도 이 소설에서 남자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조롱당한다. 남자들은 권 과장과 같은 나쁜 남자, 띠팟 같은 무관심한 남자, 이웃 남자처럼 멍청한 남자들뿐이다.
나는 김혜진 작가에게 비친 남자들의 초상을 안타깝게 본다. 작가는 오랜 여성 핍박의 역사를 말하면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주먹을 불끈 쥐고 저항하는 이른바 깬 여성임이 틀림없다. 그녀의 눈앞에 그려지는 남자들의 초상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다. 그녀의 시선이 그런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녀의 마음이 각박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른바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양성 간의 존중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가혹한 심정을 갖는다면 불행한 일이다. 만약에 그녀가 세운 새로운 남녀평등의 공화국이 세워진다면 나는 그곳에 동참하지 않을 듯싶다. 왜냐면 그곳에서 남자는 너무 초라해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집에 있는 엄마를 떠올린다. 우리 엄마는 나이 마흔에 여전히 미덥지 않은 삶을 사는 막내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실까. 결혼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고, 모아놓은 돈도 얼마 없이 엄마와 오빠에게 기대 사는 이 막내딸에 대하여 우리 엄마가 드는 생각은 무엇이려나..
이 책의 화자는 딸에 대하여, 딸의 연인에 대하여, 젠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살아온 삶은 읽은 듯하다. 교사였지만 딸을 키우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포기해야 했던 그녀. 딸을 조금 더 잘 돌보고 키우기 위해 여러 직장을 전전했지만 딸은 그녀의 기대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영 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엄마라서 딸을 가슴으로 안는 그녀를, 그런 그녀를 보는데.. 도저히 울 엄마를 도저히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마..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감사한.. 우리들의 어머니들.. '엄마'라는 단어 하나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부터 붉어지는 건 아마도 머리는 모르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당연함 때문일 것이다.
엄마..
늘 분주하게 움직이는 울 최 여사님을 바라보며 울 엄마는 왜 이렇게 매일 할 일이 많을까, 왜 일을 만들어서 할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문득 내가 근무하는 카페에서 한시도 쉬는 의자에 앉지 않는 나를 보며 어린 25세 동료도 내가 울 엄마를 바라보며 하는 생각 비슷한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싶어 웃음이 났다.
p.22
고요하고 어두운 방에 누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은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
p.83
정말 속이 상해요. 그 애는 왜 평범하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그런 노력조차 안 하는 걸까요. 나는 왜 그런 애를 낳았을까요. 그 애를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보고 있으면 놀랍고 신기하고 잠든 그 애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사랑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어요.
나는 잠시 말을 그치고, 하고 싶은 말을 자르듯 어금니를 부딪으며 딱딱 소리를 내 본다. 어떤 말들은 도저히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쇠못처럼 단단히 박혀서 결코 뽑아낼 수 없을 것 같다. 내 딸은 하필이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요.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한번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p.97
엄마가 세상의 전부라고 알던 아이. 내 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한 아이. 아니다, 하면 아니라고 이해하고 옳다, 하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던 아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금세 내가 원하던 자리로 되돌아오던 아이. 이제 아이는 나를 앞지르고 저만큼 가 버렸다. 이제는 회초리를 들고 아무리 엄한 얼굴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 딸애의 세계는 나로부터 너무 멀다. 딸애는 다시는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p.164
딸애는 지금 길 위에 있다.
지금의 나로선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무시로 오가는 길 위에 서 있다. 사방으로 뻗은 길 끝에서 자신을 조준하고 달려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엔 아무것도 삼킬 수가 없다. 삼켜지지가 않는다.
2020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