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07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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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52쪽 | 184g | 128*188*10mm |
ISBN13 | 9788936424466 |
ISBN10 | 8936424467 |
포함 국내도서 2만원 이상 구매 시, 창비 시선 북파우치 증정(포인트 차감)
발행일 | 2020년 07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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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52쪽 | 184g | 128*188*10mm |
ISBN13 | 9788936424466 |
ISBN10 | 8936424467 |
MD 한마디
[마주한 슬픔의 끝에 희망이 맺힌다] 안희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길 위에 선 우리, 뜨거운 땀이 흐르고 숨은 거칠어져도 그 뒤에는 분명 반가운 바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의 시를 읽으면 믿게 된다. 힘겹게 오르는 언덕길에서 기꺼이 손을 맞잡을 친구가 될, 무거운 걸음 쉬어갈 그늘이 될 책이다. -소설MD 박형욱
제1부 불이 있었다 소동 굴뚝의 기분 업힌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면벽의 유령 오후에 망종 선잠 미동 마중 연루 알라메다 사랑의 형태 추리극 제2부 자이언트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빛의 산 역광의 세계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거짓을 말한 사람은 없었다 불씨 표적 지배인 단란 폭풍우 치는 밤에 가끔의 정원 에프트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거야 시 영혼 없이 풍선 장수의 노래 생선 장수의 노래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실감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제3부 반려조(伴侶鳥) 그의 작은 개는 너무 작아서 덧칠 앵무는 앵무의 말을 하고 검침원 양 기르기 캐치볼 태풍의 눈 측량 묵상 스페어 몫 호두에게 알혼에서 만나 나의 규모 나의 투쟁 구르는 돌 슈톨렌 톱 열과(裂果) 해설|양경언 시인의 말 |
표지가 눈에 띄는 시집이다. 창비시선 표지가 언제 이렇게 다아나믹하게 바뀌었는지 궁금하다. 제목도 마음에 든다. 여름 언덕에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우리 마을 저수지에 가려면 언덕을 올라야 한다. 개를 데리고 자주 산책을 가는 곳이지만 언덕 끝까지 가진 못한다. 저수지 건너편 집에는 작은 개들이 여러 마리 살고 있어 제 집 근처를 지나는 누구든 조용히 보내주는 법이 없다. 그 개들이 부담스러워 언덕 중간쯤 가다 되돌아오곤 한다. 시인은 언덕에 올라갔다오면 위로 받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기분을 이 시집을 통해 독자들도 느끼기를 바란다고 했다.
(……)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2020년 7월 안희연
시집을 읽고 소감을 쓰는 일은 어렵다. 짧아서 금방 읽지만 그걸 읽었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고, 이 짧은 시를 쓰기 위한 시인의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생각하다보면 더 할 말이 없다. 친구들을 만나 얘기하다보면 좋아하는 노래 장르가 다 다르다. 요즘 대세인 트로트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기타에 푹 빠져 사는 친구는 포크음악이 좋다고 하고, 민요를 배우는 친구는 '성주풀이'를 기가 막히게 불러 민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소설처럼 서사가 있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리듬감이 있어 낭송하기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모르는 세계를 알려주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시에 대해 말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래도 읽었으니 시 한 편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나는 이렇게 천천히 시인이 본 세계로 나를 데려가는 시에 끌린다.
사랑의 형태
버리려고 던진 원반을 기어코 물어온다
쓰다듬어달라는 눈빛으로
숨을 헐떡이며 꼬리를 흔드는
저것은 개가 아니다
개의 형상을 하고 있대도 개는 아니다
자주 물가에 있다
때로는 덤불 속에서 발견된다
작고 노란 꽃 앞에 쪼그려 앉아
다신 그러지 않을게, 다신 그러지 않을게
울먹이며 돌아보는
슬픔에 가까워 보이지만 슬픔은 아니다
온몸이 잠길 때도 있지만
겨우 발목을 찰랑거리다 돌아갈 때도 있다
물풀 사이에 숨은 물고기처럼
도망쳤어도 어쩔 수 없이 은빛 비늘을 들키는
풀리지 않는 매듭이라 자신했는데
이름을 듣는 순간 그대로 풀려버리는
깊은 바닷속 잠수함의 모터가 멈추고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냄비 바닥이 까맣게 타도록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등 뒤에 있는
이 모든 것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빠지는 두 가지의 경우. 온전한 시 한 편을 마음에 들어하거나 각 시들 속 몇몇 구절을 마음에 들어하거나. 다 마음에 들면 무엇보다 내가 좋겠지만 그건 또 다른 바람이 되고. 이 시집에서는 구절들을 얻는다. 앞뒤 맥락이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한 행씩 적다 보면 이것대로 울림이 나온다.
시는 대체로 내게 막막했다. 여름의 열기는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듯했는데 나는 시인이 초대하는 언덕으로 오르지 못했다. 이만큼 떨어진 평지에서 흔들리는 마음 없이 바라보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하나.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감정들을 굳이 빼앗듯이 가져오고 싶지는 않아서 허술하게 읽어 넘겼다. 그러다가도 눈이 멎는 구절들은 꼭꼭 챙기고.
책 표지가 신선하고 예쁘다.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시의 제목도 산뜻하다. 이게 또 어떤 이에게는 구매의 조건이 되기도 하나 보다. 시인의 이름과 출판사만 고려하여 시집을 구입하거나 읽는 나로서는 다른 차원의 취향을 인정하게 된다. 이런 즐거움을 만나는 일도 반가운 시절이다.
13 어긋나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 15 돌이켜보면 주저앉는 것도 지겨워서 16 생각으로 짓는 죄가 사람을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18 허물 수 없다면 세계가 아니란다 21 나는 흰 벽에 빛이 가득한 창문을 그렸다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7 낮게 나는 새들이 있고 그보다 낮을 수 없는 마음이 있고 46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88 구름이 아름다운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91 알고 보면 모두가 여행자 너도 나도 찰나의 힘으로 떠돌겠지 107 내 마음이 던진 공을 내가 받으며 노는 시간 135 눈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언덕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시인은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라는 시구로 시를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나’를 잃어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먼저 시인이 말하는 ‘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시인은 ‘나’를 일상적 자아로 생각하는 듯싶다. 일상적인 자아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욕망은 늘 무언가를 향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욕망하는 자아=나는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연을 파괴한 자리에 문명을 건설한 근대인들을 떠올려 보라. 근대인이 설정한 ‘나’와 자연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나’는 자연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사물이 정말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근대인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물을 온전히 지배하려고 한다.
어찌 보면 시적 사유란 근대인의 사물 인식을 내부로부터 해체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보이는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보이는 사물 너머에서 빛나는 ‘흔적’에 시인은 주목한다. 그 흔적에 이르려면 시인은 사물을 지배하려는 헛된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시의 문맥을 따르자면,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야 한다. 시인이 특정한 장소를 걷는 것은 아니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이라는 시구에 주목해 보자. 시인은 상상의 장소로 길을 떠난다. 하긴, 상상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나를 잃어버리기 위한 여행이라면 시인은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져도 기꺼이 여행을 떠날 마음을 먹고 있다. 한마디로 시인은 어떻게든 ‘나’를 잃어버리려고 한다.
그날도 시인은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의 언덕에는 적당한 햇살이 내리비쳤다.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찰나, 갑자기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사방이 물웅덩이로 뒤덮여 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에 암시된 대로, 여기저기에 생긴 물웅덩이는 언덕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에둘러 보여준다. 시인은 묻는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 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흰토끼가 사라지면서 언덕에는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언덕은 흰토끼를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얘기리라. 흰토끼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후로 언덕의 삶은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상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와서 언덕을 옥죄었다.
이상한 점은 아직 언덕 곁에는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언덕도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흰토끼와 토끼는 다른 것일까? 언덕 입장에서 보면 흰토끼는 그저 토끼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직 하나의 흰토끼가 있을 뿐이다. 언덕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흰토끼를 잃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언덕은 왜 이리 흰토끼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을 언덕은 잘 알았고,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흰토끼에 매여 울상이 된 자기 얼굴을 볼 때마다 언덕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 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아는데도 언덕은 도무지 흰토끼로부터 놓여날 수 없다. 놓아버리려는 마음을 먹을수록 흰토끼는 더욱 더 언덕에게 들러붙는다.
언덕은 왜 이런 곤경에 빠진 것일까? 흰토끼를 찾으면 언덕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게 될까? 시인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토끼일까”라고 묻고 있다. 토끼를 잃어버렸으면 토끼를 찾으면 된다. 한데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흰토끼를 쫓는 사람이 도리어 흰토끼에게 쫓기는 격이라고나 할까? 흰토끼에 집착하면 흰토끼 너머로 나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언덕은 흰토끼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라고 시인은 적는다. ‘나’를 온전히 잃으려는 상상의 여행길에서 시인은 왜 멜랑콜리에 빠진 언덕을 상상한 것일까? 멜랑콜리에 빠진 주체는 죽은 사물에 집착한다. 죽은 사물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언덕이 지금 그렇다. 언덕은 사라진 흰토끼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시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라는 시구의 의미는 정확히 이 맥락에 걸려 있다. 가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 속에서 변하는 모든 사물을 가리킬 것이다. 변하지 않고 어떻게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까?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하고, 잊을 것은 잊어야 한다. 반으로 접히는 어떤 시간은 이리 보면 기억으로 주름진 시간을 나타낸다고 봐야 하겠다. 하지만 그 기억 자체가 삶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시인의 말마따나 “펼쳐 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에 빠진 언덕은 바로 시간 속에서 다른 풍경이 될 수밖에 없는 ‘흰토끼’에 집착하고 있다. 시인은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이 점을 깨닫는다. 시간을 견뎌내는 사물은 없다는 것. 그러므로 보낼 것은 보내야 한다는 것. ‘나’라고 해서 다를까? 끊임없이 변하는 ‘나’를 시인은 여름 언덕에서 배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