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 담론을 통해본 지용과 구보문학의 존재방식
1. 머리말
1930년대의 가장 중요한 두 예술가인 정지용과 박태원은 1933년 구인회를 통해 만나게 된다. 물론 나이는 1902년생인 지용이 일곱 살이 많아서 선배의 위치에 있었다. 구보는 1909년생이라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24세로 약관의 나이였다. 지용은 구인회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상허 이태준과의 친교 관계로 구인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구보는 경성고보 동창이었던 조용만의 천거로 가입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인회는 애초 당시 신문사 기자들을 주축으로 하여 이종명?김유영?조용만 등이 모여서 카프에 맞서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단체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태준과 정지용이 좌장과 사회를 맡으면서 회칙도 강령도 없는 순수한 친목단체로 방향을 설정하자 이종명과 김유영이 슬그머니 탈퇴하고 그 자리에 조용만의 천거로 박태원과 이상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지용과 구보의 친교 관계에 대한 것은 기록이 많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지용이 이태준?이병기?김용준 등 『문장』파 문인들과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던 것에 비해 구보는 이상?김유정?김기림?정인택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용이 술을 즐겼고 고집이 상당히 센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지용은 시를 암송하는 것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지용이 천향원이라는 요릿집에서 기생의 머리채를 잡고 호통을 치다가 요릿집 남자주인공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최재서가 택시를 잡아서 모윤숙과 최정희를 밀어 넣고 도망간 후에 다음날 최정희가 지용에게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었다는 사건은 당시의 문인들 사이에 회자된다. 최정희는 지용이 북아현동에 살 때 바로 옆에 살아서 자주 만나고 술을 함께 하기도 했는데, 지용은 술에 취하면 “좋아 죽겠다”라고 두 팔을 위로 치켰다 내렸다 하면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당시 별명으로 소형차인 ‘다또상’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구보도 음주를 즐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외국을 갔다가 돌아온 김기림에게 “돌아오셨으니 반갑소. 오랜만에 서울거리를 함께 거닙시다. 술은 배우셨소? …(중략)… 그 뒤로 다시 창작 활동이 없는 것은 도시 술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인가 하오. 우리, 같이 술 좀 자시고, 누구 꺼릴 것 없이 죽은 이상이의 욕이나 한바탕 합시다.”라는 글을 『여성』에 실은 것에서 확인이 된다. 또 『삼천리』의 기자였던 최정희는 구보에 대한 추억으로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구보가 하도 자랑을 해서 둘이서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노래경연대회를 해서 그를 눌렀던 것을 기록에 남기고 있다. 구보가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그가 그치면 최정희가 부르는 식으로 반복을 해서 수 시간 뒤에 구보가 패배를 자인했다는 것이다. 지용이 시를 암송하기를 좋아했고, 구보가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는 사실을 보면 두 사람이 모두 리듬을 타면서 풍류를 즐겼던 동질성이 있다. 이러한 취향 이외에도 두 사람은 초기에 서정시를 창작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일제 강점기에 모더니스트로서 문명을 휘날리다가, 군국주의가 말기 증세를 보이던 1930년대 말부터 자신의 문학적 흐름을 변화시켜 동양적 은일의 세계로 옮겨간 것도 대동소이한 양상으로 생각된다. 또 해방 이후 한국전쟁의 시기에 두 사람 모두 자의반 타의반으로 평양으로 가게 된 것도 공통점이다.
이렇게 지용과 구보의 삶과 문학은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요즈음 탈식민주의 담론으로 근대문학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 몽고족에 의해 복속을 당한 시기에 창작된 고려가요까지도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근대 시기의 문학을 분석하는 데에는 좋은 비평의 잣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지용과 구보 두 사람 모두 거의 같은 궤도의 문학적 흐름을 보여주게 된 것은 작가 개인의 개성보다는 시대적 환경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탈식민주의 담론에 따른 분석이 상당한 유효성을 띠게 될 가능성을 높여준다.
2. ‘흉내 내기’로서의 모더니즘과 그 미학적 가치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우리나라에서 다양한 용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냥 포스트식민주의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고, 후기 식민주의나, 신 식민주의로 나름대로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즈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역시 ‘탈식민주의’라는 용어이다. 이 말에는 식민지 유산의 지속과 청산의 양가적 속성을 내포한 개념이 될 것이다.
식민지인 입장에서 지배 권력에 맞서는 저항은 중요한 전략이다. 식민지배자는 식민지인의 욕망과 저항을 위험한 것으로 보고 이를 항상 통제하고 억압하고 단죄하려 한다. 질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일종의 ‘코드화’ 혹은 ‘영토화’이다. 들뢰즈에게는 지배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개개인의 욕망 특유의 분열적인 흐름을 ‘탈 코드화’ 혹은 ‘탈영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탈주(선 긋기)의 흐름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을 ‘재코드화’ 혹은 ‘재영토화’라 부른다. 예를 들면,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개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탈주 욕망의 지속적 생성(과정)이 창조적이며 전복적인 삶을 지속시키는 자양분이 된다. 들뢰즈의 이런 개념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을 설명 박종성,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찰』, 살림, 2006, 7~9쪽.
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탈식민주의란 억압과 착취를 낳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해체 혹은 전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식민화를 지지하는 인종차별의 부당성을 알리고 지배 권력의 횡포에 제동을 걸어 종주국과 식민국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형태의 불평등을 해소 박종성, 위의 책, 7쪽.
하고자 한다. 최근 모더니스트로서의 지용과 구보문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봇물 터지듯 이루어지고 있다. 소장학자로부터 제기되는 대체적인 흐름은 지용이나 구보문학을 초기의 모더니즘문학과 후기의 전통성에 근거를 둔 문학으로 획일적으로 이원화해서 구분하는 것을 비판 권정우, 「정지용 시론 연구-전통과 근대의 대립에 대한 지용의 입장」, 『개신어문연구』 제25집, 개신어문학회, 2007, 221쪽.
권정우는 “정지용은 전통과 근대를 대립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분법적 인식태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그것은 시인으로서 구체적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김겸향, 「박태원 소설에 나타난 이중적 목소리-삼인칭소설을 중심으로」,구보학회, 『박태원과 모더니즘』, 깊은샘, 2007, 70쪽.
김겸향은 “박태원 문학에 대한 그간의 연구 결과, 박태원 소설의 모더니즘적인 성향과 리얼리즘적인 성향의 혼재, 혹은 주관적 보편성과 객관적 총체성의 공존, 문학의 자율성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이질적인 세계의 착종성이 문제되어 왔다.”라는 정현숙교수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1930년대에 당대 최고의 모더니스트로 활동한 박태원은 이러한 서술자의 존재를 누구보다도 확연히 인식한 작가였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성향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부터 리얼리즘 성향의 소설 『천변풍경』에 이르기까지 이중적 목소리를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이렇듯 작가가 일관되지 않고 독자가 신뢰할 수 없는 이중적 목소리를 구사하는 이유는 일종의 미학적 장치, 독자를 향한 고도의 제스처라고 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하고 있다. 두 사람의 문학에는 근대성과 전통성이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온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조선이 처한 현실이 심각하며,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근대성의 표피적인 효과보다는 잠재되어 있는 문제점이 간단하지 않음을 인식한데서 비롯된다.
지용은 1920년대 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근대 도시풍경을 노래하는 모더니즘 시를 많이 창작하여 발표한다. 이 시기는 지용이 일본 유학생활을 떠나고, 일본 교토에 머물던 시기와 귀국 후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를 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1925년에 교토에서 「샛밝안 기관차」, 「황마차」를 써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했다.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던 1926년에는 유학생 회지인 『학조』에 「카페 프란스」, 「슬픈 인상화」, 「파충류동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7년 2월 『근대풍경』 제2권 2호에 일본어로 표기된 시 「고아의 꿈」을 투고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인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관심을 받게 된다. 1930년에는 『시문학』에 「바다1」을 발표하고, 『조선지광』에 「아츰」을 게재한다. 1933년에는 『가톨릭청년』에 「시계를 죽임」, 「해협」 등을 발표하고, 1934년에는 구인회가 펴낸 순문예잡지 『시와 소설』(창문사)에 「유선애상」을 싣는다. 『시와 소설』에 이태준은 수필 「설중방란기」를 발표하고, 구보 박태원은 실험적 단편소설 「방란장주인」을 게재했다. 1935년에는 『조선문단』에 「다시 해협」과 「지도」를 발표한다.
이 시기에 발표한 지용의 시에는 공간으로서 바다가 많이 등장하고, 새로운 근대문물로 기차 ? 선박 ? 비행기가 시의 중요한 소재로 활용된다. 공간으로서 ‘바다’는 일본 근대시에도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며, 일본 식민지 확대 정책의 부산물 사나다 히로코(眞田博子),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역락, 2002, 146~47쪽.
사나다 히로코는 “여하간 어느 나라의 경우에도 ‘바다’는 넓은 세계를 향하는 젊은이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용의 시는 이미지즘이나 모더니즘으로 평가받아왔다. 이미지즘은 에즈라 파운드(E. Pound, 1885~1972)와 그의 옛 애인 H. 두리틀 그리고 그녀의 약혼녀 리처드 올딩톤(R. Aldington)과 함께 셋이서 1912년에 런던에서 시작한 현대시의 변혁운동이다. 이미지즘이란 말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흄이지만, 이미지즘의 시는 작품 수도 적고, 볼 만한 수준의 작품도 많지 않다. 사나다 히로코, 위의 책, 77쪽.
또 파운드의 이미지즘 운동도 길게 잡아서 불과 2~3년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미지즘은 영미 모더니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