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2년 08월 31일 |
---|---|
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62g | 153*224*30mm |
ISBN13 | 9788972911166 |
ISBN10 | 897291116X |
발행일 | 2002년 08월 31일 |
---|---|
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62g | 153*224*30mm |
ISBN13 | 9788972911166 |
ISBN10 | 897291116X |
1. 서론:위대한 약속, 이행되지 않은 약속과 새로운 선택 2.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일반적 고찰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에크하르트 수사의 저술에 나타난 소유와 존재 3. 두 실존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소유적 실존양식 존재적 실존양식 소유와 존재의 그밖의 측면 4.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종교, 성격, 그리고 사회 인간의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본질적 특성 새로운 사회의 특성 |
나에게 있어 좋은 책이란 책을 읽고 난 뒤에 사고의 변화나 더 나아가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아무리 이름난 책이라 할지라도 읽을 당시에 받는 감동 이상의 것을 내게 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나의 삶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나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좋은 책이 되지 못한다.
몇 년 전에 1년 동안 작정을 하고 채식을 한 적이 있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을 읽고 나서 결심하게 되었다. 책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육식을 하는 것이 지구 반대편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든다면, 그리고 육식을 금하는 것이 그들을 가난에서 풀어내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고기를 먹지 않고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소비욕과 소유욕에 대항하여 웬만하면 소비를 하거나 소유하지 않고 사는 연습을 했었다. 음식은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해 먹고, 짧은 거리는 직접 걸어가고, 꼭 필요한 것 이외는 사지 않고, 서로 빌려 쓰고, 특히 책도 사지 않고 도서관을 이용하기로 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돈에 매이지 않은 자유와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소비를 줄이면 그만큼 생활에 필요한 돈이 줄어들고 따라서 그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도 줄어든다. 따라서 일에 매이지 않는 자유의 시간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연습을 함에 있어서 확실히 느꼈던 것은 이것 또한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이 워낙 소비생활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는 나 혼자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이번에 다시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면서 그 때 생각이 났다. 그리고 현재의 나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며, 현대 ‘잉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소비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존재를 철저히 다른 것으로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 이러한 소유와 존재의 상반된 모습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방면에서 체험할 수 있다. 특히 지금 공부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학습에 관한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다. 저자에 따르면 소유적 실존양식에 길든 학생들과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살고 있는 학생들은 학습과정에서 전혀 다른 특질을 보인다고 한다. 배우는 사람이나 또는 가르치는 사람이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소유형 인간은 학습할 때 오직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학습한 것’을 기억 속에 새기거나 기록을 잘 보관함으로써 굳게 지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강의를 들을 때 놓치지 않고 어휘들을 경청한 뒤에 그 논리적 연관과 의미를 파악하여 가능한 한 모조리 노트에 기록한다. 그래서 필기한 것을 나중에 암기하여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거나 폭넓게 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체계를 깨는 새로운 사상을 두려워한다. 이에 반해 존재형 학생들은 강의에서 다루는 주제를 미리 고찰하고 그와 관련된 특정한 문제와 의문에 대해서 골몰한다. 그들은 이미 강의 주제에 대해 고민하였기 때문에 강의를 들을 때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그냥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하여 그들 고유의 사유과정을 자극한다. 이 차이를 보고 나서 과연 나는 어떤 유형의 학생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대원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나는 각 강의들을 어떤 식으로 반응하며 듣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단순히 주어지는 내용을 머리속에 입력하고 저장하는 것에서 그치는지 아니면 강의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그로 인해 나의 사고의 폭을 넓히고 있는지.... 적극적인 학습을 위해서는 미리 강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의문을 가지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다. 존재적 실존방식을 가지고 살기 위해 필요한 점이다. 이러한 소유와 존재에 있어서의 서로 다른 특질은 학습뿐만 아니라 대화할 때, 독서할 때 더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거나 사랑할 때에도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 「사랑의 기술」도 꼭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내 관심을 끌었던 것 중의 하나는 소유와 존재의 시각에서 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재해석이다. 내게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준 통찰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구약성서의 주요 주제 중 하나를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떠나라, 모든 속박으로부터 너 자신을 풀어라, 존재하라!’로 보았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그리고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에 순종했을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이집트의 안락한 생활을 그리워했다. 고정된 주거지와 보장된 음식과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들의 이러한 소유적 성향은 만나에 대한 명령에 대해서도 역시 불순종으로 대응하게 했다. 만나를 거둘 때 내일을 위해 남겨 놓지 말라는 경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안락함과 탐욕, 소유지향의 습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 소유하지 않은 삶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신약성서도 소유지향적 삶에 대한 구약성서의 반론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팔복 중 제일 첫 번째의 복은 바로 ‘가난한 자’에게 주어진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도 소유욕과 권력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이에 단호히 대응한다.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본을 보이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마귀는 존재와 소유의 두 원칙을 대표한다. 마귀는 물질적 소비와 자연 및 인간을 지배하는 힘의 대표자로, 반면 예수는 존재의 구현이며, 소유하지 않는 것이 존재양식의 전제라는 이념의 구현이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은 이런 전제의 이해와 수용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앞에서 말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소유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이 도전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유형의 인간인지 성찰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소비를 자극하고 많이 소유하는 것을 성공한 삶으로 치부하는 세상에 당당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어디에서 발견하며 진정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제대로 알면서 사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늘 깨어있는 삶’이 아닐지...
이 책 「소유냐 존재냐」도 좋은 책임에 분명하다. 이미 나의 사고에 자극을 주며 도전을 주고 있다.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민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앞으로 사역을 하게 될 때에도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행하느냐’보다는 ‘선하게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 이 책을 덮으면서 항상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해본다.
기왕 한 번 태어났으니 제대로 살아보고, 사랑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집어 들었던 '사랑의 기술'. 그 책은 나와 에리히 프롬이 처음으로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주제를 그처럼 딱딱하게 다룰 수 있는 저자의 '학자스러움'에 한 번 놀라고, 최고로 이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두 번 놀란다. 특히 두 번째 놀라움은 인간에 대한 고찰과 진한 인류애가 바탕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 1900~1980)
이후 '에리히 프롬 세계(The World of Erich Fromm)'로의 짧은 여행을 시작,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지나 드디어 '소유냐 존재냐'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비로소 프롬의 영원한 팬이 되고야 말았다. 지금껏 내 정신세계에서 부동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던 내 마음의 바이블 '데미안'이 그 위치의 위태로움을 절실하게 느꼈지만, 난 이 두 작품-'데미안'과 '소유냐 존재냐'-과 두 사람-'헤르만 헤세'와 '에리히 프롬'-을 공동의 위치에 올려놓고 내 멘토로 삶기로 결정했다.(이미 둘 다 고인이므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는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어릴 적 '데미안'에 빠졌었는지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 어린시절, '데미안' 중의 '막스 데미안'이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었는지 분석할 수 있었다. 그건 '막스 데미안' 이야 말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삶을 제대로 사는 사람, 주인공 '싱클레어'의 멘토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 역시 '소유냐 존재냐'에서 같은 맥락의 철학을 전파한다. 모든 사람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어야 하며, '단지 존재함'으로써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존재한다'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삶을 말한다.
20세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공통적 가치관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는 것과, 제대로 살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이 말인 즉슨,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나 믿음의 가치는 전락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이야 말로 우리의 인생을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며 안락한 삶을 꿈꾸게 해준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존재가치와 동일시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내가 가진 집, 차, 돈, 직장 등이 사회 속에서 나의 위상과 권위를 표현하는 기이한 구조로 변질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 자신일 수는 없다. 내가 소유한 것이 나 자신이라면, 그것들을 한 순간이 잃어버렸을 때 '나'도 함께 없어진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내가 한순간에 집, 차, 돈, 직장을 모두 다 잃었다 한들 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큰 충격을 받기는 하겠지만 '나'라는 존재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없어지지 않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은 수도 없이 많지만 아마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소유를 추구하는 삶으로 변질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특유의 인류애를 그의 전 저술에 나타내고 있는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도 당연히 인간의 존재를 설파한다. 우리는 '소유적 실존양식'에 따라 살지 말고, '존재적 실존양식'에 따라 살아야 한다. 이것의 차이를 일상적 경험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의 차이점]
소유 |
존재 | |
학습 |
학생들은 남이 확인해놓은 주장들을 소유하기 위해 머리에 집어 넣음으로써 소유함. |
남들의 사상을 경청한 수 그들 고유의 사유과정을 통해 자기것으로 만듬. |
기억 |
기억해야 할 것을 메모한 후, 메모지를 소유함. |
기억해야 할 것을 나름의 정신적 규칙에 의해 기억하여 필요할 때 언제든 환기시킴. |
대화 |
해야 할 말을 미리 적은 후, 그것만 읽거나, 자기의 사상만을 고집함. 승자와 패자만 존재할 뿐. |
미리 대비하거나 무장하지 않고 자발적이고 생산적으로 반응함. 자기의 고집이 없으므로 분쟁이 발생하지 않음. |
독서 |
단순한 줄거리의 파악 및 암기. 읽었다는 사실이 중요. |
심층적 사상 파악. 생산적 독서.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판. |
지식 |
보다 많이 아는 것. |
보다 깊이 아는 것. |
신앙 |
스스로 모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확신을 원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 |
일차적 특정한 이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닌, 내적인 성향, 일종의 마음가짐. 신앙의 안에 있는 믿음. |
사랑 |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 |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상대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상대의 생동감을 증대. |
이렇게 분류한 것만 봐도 프롬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소유적'인 삶이 아닌 '존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존재는 체험과 관계한다. 여기서 무엇을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 시대 사람들은 진정 모두 '노블레스 노마드'적인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형적 가치에 연연하지 않고, 체험, 경험, 교육 등을 중요시 하며 자신 내부에 보다 큰 가치를 쌓는 삶. 이 방식이야말로 진정 인간이 '존재'로서 살 수 있는 길 아닐까 싶다. 유대인이 전 세계적으로 무척 적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이 추구했던 삶이 바로 진정한 노블레스 노마드의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도 없이 항상 쫓겨다니고 약탈당했던 그들의 긴 민족적 역사를 볼 때, 머릿 속에 든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산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던 그들의 삶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진정 '존재적'인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현대판 노블레스 노마드의 교과서'를 쓴 에리히 프롬이 이 책을 저술한 때는 1976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3년이나 더 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프롬의 사상이(이 책뿐 아니라 다른 저서들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것은 급격히 바뀌지 않는 사람 심리의 특성 덕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이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이미 30여년 전 프롬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아 존재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더라면 그의 저서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말년의 프롬
비록 책의 결론이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모범답안이긴 하지만,(좀 더 획기적인 결론 도출을 바랐기 때문에 조금 실망감도 컸다) '소유냐 존재냐'야 말로 '진정 제대로 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근본적 구조조정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임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상을 담은 책 치고는 쉬운 편이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조금의 도전정신만 있으면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