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2년 08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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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62g | 153*224*30mm |
ISBN13 | 9788972911166 |
ISBN10 | 897291116X |
발행일 | 2002년 08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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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11쪽 | 462g | 153*224*30mm |
ISBN13 | 9788972911166 |
ISBN10 | 897291116X |
1. 서론:위대한 약속, 이행되지 않은 약속과 새로운 선택 2. 소유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이해 일반적 고찰 일상적 경험에서의 소유와 존재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에크하르트 수사의 저술에 나타난 소유와 존재 3. 두 실존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소유적 실존양식 존재적 실존양식 소유와 존재의 그밖의 측면 4.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종교, 성격, 그리고 사회 인간의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본질적 특성 새로운 사회의 특성 |
<소유냐 존재냐>는 오늘날 수많은 싱클레어(소설 ‘데미안’의 주인공)들을 위한 성서이다. 방황하는 현대인, 그들은 이기심과 탐욕으로 자신의 껍데기를 만들고, 그 안에서 권태와 허무 속에서 외로운 존재로 고통받고 있다.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로써 말한다. 이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구도자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이 헌신할 새로운 종교를 제시한다.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나면 세상이 새로워진다. 설명되지 않던 많은 현상들이 비로소 이해가 되고, 요원했던 문제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해석된다. 카인의 표식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늑대들 사이에 가려져 숨겨져 있을 뿐이다. 어쩐지 엄청난 강을 건너온 기분이다.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이제 우리는 알을 깨고 나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곳이 ‘압락사스’ 일지, 아니면 ‘나에게로 가는 길’ 일지를.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생각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실재론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저 잘 살고 싶을 뿐이다. 프롬은 현대인의 고통과 대안을 설명하기 위해 대립되는 2가지 인간 본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소유적 실존 양식’과 ‘존재적 실존 양식’이다.
내가 소유한 것을 모두 잃는다면 나는 인간으로서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을까? 내가 소유한 것을 빼고 나면 내가 아닌 삶. 오직 소유가 목적인 삶. 명함으로 나의 가치가 판단되는 삶. 프롬은 이것을 소유적 삶이라 정의한다. 존재적 삶은 물질은 물론 지식마저도 소유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한다. 체험이 영혼을 채우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도 그 향기가 저절로 주변으로 흐르는 삶을 말한다. 훌륭한 직업이 없어도 존재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상태를 존재론적 삶이라 정의한다. 프롬은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존재’는 체험과 관계한다고 하면서, 사회는 사물이 중심인지, 인간이 중심인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한다.
현대인이 고통받는 이유는 인간이 ‘소유적 존재양식’을 강조하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건의 사슬이 끊기고 산업시대가 도래하자, 사람들은 무제한적인 자유와 물질적 풍요, 그리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품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산업사회를 지탱해주는 ‘환상’이었음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프롬은 우리가 삶의 독자적인 주인이 되리라는 꿈은 관료주의 체제라는 기계의 톱니바퀴로 물려들었음을 인식함과 함께 깨져버렸으며, 우리의 사고, 감정, 취미는 미디어를 지배하는 자본 및 정치권력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고 규정한다. 게다가 욕망의 무제한적인 충족이 결코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음은 굳이 프롬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 낡은 환상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 속에 살아 있긴 하지만.
프롬의 말처럼 세기병을 느끼는 우리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고 있다. 우리는 한 푼 두 푼 모아 아파트를 사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고, 지식을 머릿속에 구겨 넣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하려고 한다. 나를 설명하는 것은 지갑 속 작은 명함이다. 손에 닿을 줄 알았던 행복은 점점 멀어지고, 우리는 황량한 고독감을, 어울림 속에서도 공허감을, 그리고 삶의 무력감과 무의미함을 느낀다.
프롬은 인간 해방을 위해 인간 본성에 따른 '존재론적 삶'을 영위할 것을 강조한다. 탐욕과 시기심이 강하게 노출되는 현상은 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화된 압력의 결과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일단 사회적 풍조가 바뀌면, 즉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가치관이 바뀌면,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이행하는 것도 한결 용이해지리라 주장한다. 즉, 존재적 실존 양식은 비록 억압되어 있을망정, 항상 현존하고 있다고 하면서, 새로운 인간이 되려면 새로운 사회, 즉 휴머니즘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기존의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부르주아적 소비’를 만인에게 적용시키려고 하는 욕망을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든 재산의 절대적 균등분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 지향성이 꺾이지 않았음을, 다른 누군가가 자기보다 한 푼이라도 더 가졌을 때 느낄 시기심에 대해 그런 식으로 연막을 치는 것이라 한다. 프롬에게 평등이란 그저 판이한 생활 경험을 가져올 정도의 극심한 소득 차이를 없애는 것뿐이다. 결국 문제는 ‘부’가 아니라 건전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있다고 본 것이다.
프롬은 이 책에서, 새로운 인간의 존재 양식과 구현될 새로운 사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만 사회의 변혁이 오기 전, 즉 오늘과 같은 산업사회, 혹은 새로운 사회로 가는 과도기에 인간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기술(방법)’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고 있다. 어쩌면 독자가 진정 필요한 부분, 즉 현실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다른 책에서 얻으라고 생략해버림으로써, 내용이 너무 이상적으로 남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인간성이 배제된 성장이 중심이 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존재적 삶의 양식’을 고수하는 것은, 예수나 석가모니여야 가능한 일로 비치고,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는 여전히 우리에게 천국의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프롬은 그의 제안이 너무 이상적으로 들려 구호에 그치는 것을 두려워한 듯하다. 그는 스스로 공상가가 아닌 냉철한 객관성을 지닌 이상주의자로 소개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는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간다. 그는 책 마지막 장에서 그가 제시하는 대안 사회를 매우 성심성의껏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물론 그가 제시한 많은 부분이 책이 저술된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거의 실현되지 않고 있음은 분명 안타까운 점이다(물론 근본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저생계비 등 일부 실현되고 있긴 하지만).
인간을 배제한 개발과 성장, 인간 생명을 경제적 논리에 묻어 버리는 정치적 구호, 그리고 그것이 만능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조직에 순응하며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산다.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해버린 우리는,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죽을 때까지 모르다가 죽는다. 삶은 원래 무의미하다는 자조로 서로 위로할 뿐이다. 꿈 속에서 해매는 그의 제안을 이제 우리의 실질적 삶 속으로 끌고 와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19세기 신을 죽였다. 프롬은 20세기 인간을 죽였다. 21세기 죽은 인간은 신이 되겠다고 아우성이다. 죽어야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듯 맹목적이다. 이미 초인이 되어버린 인간은, 동시에 비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은 ‘배부른 돼지’로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로도 살 수 없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는 이제, ‘배고프지 않은 소크라테스’로 살기를 희망한다. 프롬이 제안하는 대안만큼이나, 우리 사회가 정말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지에 대한 이견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모순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이 늘어가고 있음도 사실이다.
<소유냐 존재냐>를 극단적 인간 완성에 도달해야 하는 혁명서가 아닌 우리 삶, 순간순간에 적용할 수 있는 수많은 일상들에 우리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지침서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새로운 사회가 도래한다면 더 없이 기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재를 반여하고 있다고 상상하며, 그것은 우리 삶의 행로를 지시하는 지도가 된다. 이 그릇된 지도는 배척당하는 일이 없다. 배척받는 것은 실재에 관해서 아는 것, 무엇이 진실인가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무의식인가라고 물을 때, 그 해답은 불합리한 격정뿐만 아니라 실재에 관해서 아는 것 일체가 포함될 것이다.
무의식의 요소는 사회에 의해서 이중으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