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개 수십 마리를 겪어본 경험에 따르면 정말 그렇다. 짖는 놈은 깡깡대며 신경질만 내지 차마 물지 못한다. 무는 놈은 짖는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동작 없이 덥석 물어버린다. 그동안 돌보았던 녀석 중에 검둥이란 놈이 딱 그랬다.
휴가철에 해수욕장에 놀러 온 사람이 버리고 간 이 녀석은 푸들이지만 푸들이 지닌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점은 그다지 없다. 그래서인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이 녀석을 주저 없이 버리고 갔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결코 개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용한 시골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라고 말한다. … 손, 앉아, 일어서, 엎드려 정도를 할 수 있는데,
내가 가르친 건 아니고 주웠을 당시 이미 기능이 입력되어 있었다. 신기해서 가끔 시켜보는데 별로 잘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다. 자기에게 시키는 게 뭔지 헷갈리면 그냥 찍는다. 아무거나 걸려라, 하는 얼굴을 하고 앞발도 내밀었다가 주섬주섬 앉아도 보았다가 일어나도 보았다가 풀썩 엎드리기도 하면서 음주운전으로 걸린 아저씨가 경찰에게 대충 봐달라고 할 때 지을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간절히 쳐다본다. 말을 할 수만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만 같다. ‘어이, 거 대강 봐주슈, 이거 아뉴?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지. 보쇼, 우리 편하게 삽시다.’
---「눈치보지 않아 사랑스런, 유기견 ‘검둥이’」중에서
아뿔싸, 웬 강아지가 차에 치이려다 가게로 기어들었다가 다시 쫓겨나는 게 보였다. 어디를 굴러다녔는지 배와 다리에 온통 흙이 자글자글했다. 말이 강아지지 덩치는 웬만한 진돗개와 같고 둥글둥글한 얼굴과 발이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크게 될 성싶었다. 목걸이는 하고 있는데 연락처는 적혀 있지 않고, ‘언니, 나 힘들어’ 하는 얼굴로 계속 올려다보기에 어쩔 수 없이 안아 올렸는데 벽돌이 들었는지 엄청 무거웠다. 7킬로그램은 족히 되겠다 싶었다.
이럴 때는 근처 동물병원에 물어보는 게 수다. “혹시 얘 아세요?” 하자 애견 미용사 아가씨는 “어머 장래가 촉망되는 사이즈네” 한다. 이런 애들이야말로 절대 입양되지 않는 바로 그런 개다. 짐끈을 주워 묶어줘도 도무지 걸으려 하지 않고 계속 어리광을 부리며 치대기만 하는 바람에 별수 없이 안아 올리고는 끙끙대며 동물병원을 돌며 한두 시간을
헤맸을까.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뚱순아!” 하고 부른다. 설마 날 부르는 건 아니겠지 싶어 움찔 돌아보니 아저씨는 “뚱순이 너 언제 나갔어!” 하고 야단친다. 어쩐지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더라니, 역시 뚱순이였다.
---「뚱순아, 또 집 나오지 마라」중에서
신자유주의는 특히 똥개들의 천적이다. 푸들이나 요크셔 말고 종자가 불분명한 개가 옛날에는 그토록 흔하더니 이제는 서울특별시에 특별하지 않은 개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도 없다. 특별히 박멸 계획을 세우지 않았는데도 서울특별시에서 똥개는 멸종된 것이다. 개체의 경쟁력을 강조하고, 이 사회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자기계발을 통해 그 자유와
특권을 획득하라고 외치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애초에 잡종으로 타고난 것들은 도무지 설 곳이 없다. 이 안에서는 당연히 개도 소비재가 되었기에 옆에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폼 나는 개를 키워야 하는 것이다. …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동네 재래시장 할머니가 키우는 흰둥이다. 늙고 뚱뚱하고 못생기고 건방진데다 족보도 없는 이 흰둥이는 할머니가 시장에 나갈 때 손수레에 올라앉아 함께 가고, 저녁에는 같이 퇴근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할머니는 온돌바닥에 앉은 흰둥이 등에 담요를 둘러준 다음 난로를 켜주고, 여름에는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부채질도 해준다. 흰둥이는 공작부인처럼 오만하게 앉아 있는데, 종자가 좋은 개였으면 얄미웠을 것 같지만 그래도 흰둥이를 보면 웃지 않을 수 없다. 녀석아, 난로 뜨뜻하냐?
---「똥개들의 천적, 신자유주의」중에서
특별히 개보다 사람에게 잘해줘야 할 이유가 있는지 나는 아직도 도통 모르겠다. 사람이 개보다 중하냐고 물으면 덜 중할 건 뭐냐 싶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를 들으면 꽃을 모욕하지 말라며 화가 나는 못된 성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다만 인간이 지금까지 지구에서 제일 강한 종족으로 살아오면서 동물에게 한 온갖 못된 짓을 떠올리면 동물에게 좀더 잘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번번이 생각한다. 택시에 치여 앞다리가 잘려나간 모란이, 누가 쏜 엽총 탄이 척추에 박혀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었지만 앞다리로 몸을 끌고 다니며 씩씩하게 컹컹거리던 로렌초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개들은 사람처럼 나에게 뭔가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쳤다. 개들은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된다. 고양이처럼 도도한 매력은 없지만, 그렇게 사람에게 치이고도 또 사람을 믿고 어리석게 다시 사랑하는 근성을 사람도 배울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조금 덜 괴물이 될 것이다.
---「사람이 개보다 나은 게 뭔데?」중에서
“저 뒤에 있응게, 가봐. 고양이가 귀엽지?”
“네!” 하고 소리치고 따라 들어간 나는 고양이의 이름이 궁금했다. 할머니가 알려준 고양이 이름은 샛별이. 여고생인 손녀가 평소 할머니가 심심하겠다며 새끼 때 얻어다 준 고양이였다.
그 이후 우리는 어르신의 허락 아래 당당히 교제를 시작했는데, 점점 애틋해지면서 샛별이는 내가 가려고 하면 번개같이 달려들어 내 다리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 모습이 귀엽고 깜찍했지만 청승맞게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까지 누가 이렇게
간절히 나를 붙들어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도로 주저앉아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샛별이는 붙들고 있던 내 다리를 풀어주었지만 여전히 앞발 하나를 얹어 내 신발을 꼭 잡고 있었다. 아, 누가 이렇게 나를 잡아준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짠하게 잡아주기만 하면 뭐든 다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졌지만 나는 이 비취색 눈동자를 가진 오동통한 고양이를 떠날 수 없었다. 풀벌레가 밤을 맞아 찍찍 울 때까지 나는 샛별이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를 잡아줘, 샛별이처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