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사실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원칙들이 초고를 쓰는 데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초고를 고치는 데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글을 쓰는 부담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초고를 쓸 때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은,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조언을 모조리 잊으라는 것이다.
--- p.9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숨기며 글을 쓰는 사람 에게 명확하게 글을 쓰라는 조언은 버거울지도 모른다. 정부에서 작성한 공문서, 법조인들이 작성한 법률문서, 작은 아이디어를 추상적인 말로 부풀린 학술문서에 난해한 문장들이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러 썼든 무심코 썼든, 난해한 글들은 기본적으로 차단과 배제를 추구한다. 민주적 소통의 가치를 부정하는 글이다.
--- p.21
지금도 무수한 학생들이 [이처럼] 의미가 응축되어 있는 글을 읽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저자의 심오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물론 정말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 글을 쓰는 사람이 명확하게 쓰지 못한 (또는 의도적으로 명확하게 쓰지 않은) 탓이 크다.
이로써, 안타깝게도 많은 학생들이 글 읽는 것을 포기한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난해한 글을 읽어내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또 그렇게 글을 써낸다는 사실이다. 결국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을 또다시 그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이 굳건한 전통처럼 세워진다.
--- p.25
우리가 글을 명확하게 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독자가 어떤 부분을 모호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은 남이 쓴 글보다 명확한 듯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글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읽어주기 바라는 대로 읽기 때문이다. 자기 눈에는 이상하지 않으니,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수정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 다른 이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글을 읽고서, 그러한 난해함이 심오한 사상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것을 모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 않아도 혼미한 세상이 더욱 혼미해진다.
--- p.26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체로서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상황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가독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더 나아가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는 철학만의 문제도 아니다. 어떠한 선택이든 윤리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 p.283
독자가 이해하는 데 들이는 노력만큼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저자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여겨질 경우, 더 나아가 훨씬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글을 이해하기 어렵게 썼다고 여겨질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성의도 없이 나태하게 자기 멋대로 쓴 것으로 여겨지는 글, 독자의 욕구에 무관심한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p.284
저자는 독자를 위해서 정확하고 뉘앙스가 살아있는 글을 써야 할 의무가 있지만, 독자는 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무한한 시간을 쏟을 의무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물론 독자가 읽기 힘들게 글을 쓴다고 잡아가지는 않는다. 온갖 아이디어가 서로 경쟁하는 시장에서 ‘진심’은 가장 주된 가치이긴 하지만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진심을 알아내기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노력도 고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생각이 새롭고 복잡하기 때문에 난해하게 글을 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 그것이 정당하기보다는 잘못된 변명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점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언어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다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쓸 수 있다면 명확하게 쓸 수 있다.”
나는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훨씬 명확하게 쓸 수 있다.”
--- p.294
글을 대충 쓴다고 해도 별로 손해 볼 것도 없고 또 그렇게 쓴 글도 흔한데, 명확하게 글을 쓰는 법을 왜 힘들게 배워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글을 많이 읽어본 사람은 이미 알고 있으며 우리도 곧 알게 될 사실이 하나 있다. 명확하고 우아하게 글을 쓰는 사람은 실제로 너무 적기 때문에 그런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지극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노력은 분명히 보상으로 돌아온다
--- p.314
이러한 연구를 통해 조셉 윌리엄스가 얻은 결론은 ‘단순함이란 흉내낼 수 없는 복잡한 실천’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규칙이 자명한 문법이나 짧고 간결하고 평이하게 글을 쓰라는 있으나마나 한 문체규범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치열한 전망이다. 조셉 윌리엄스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진정한 기교는 기교를 숨기는 것이다Ars Est Celare Artem’라는 문장을 평생 즐겨 인용했다. 이 위대한 로마시인의 목소리를 빌어, 윌리엄스는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는 글은 작가의 힘겨운 고통 속에서만 탄생한다고 믿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모든 행위의 이면에는 탁월함을 동경하는 독자의 열망과 복잡함을 감내하는 작가의 노고가 늘 날카롭게 맞부딪힌다. 정직한 문법에는 기교가 부재하고, 평이한 문체에는 기교가 부족하다. 여성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폄하되던 아시아스타일의 가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심하게 아파본 사람만이 세련될 수 있다고 고백한다. 《스타일레슨》의 소중한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 번역가들은 기꺼이 경험하고, 모방하고, 아파했으니, 독자들은 우리를 대신해 평안한 독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 p.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