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누구의 것이냐는 소유권 문제뿐만 아니라, 누가 경작하며, 그 형태는 농가 단위인가, 협업 방식인가, 혹은 협동조합이나 집단영농 단위의 경작 방식인가,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 방식인가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 농지제도가 변천해 온 역사를 한마디로 단순화하자면 ‘공유’ 형태에서 ‘사유’ 형태로 변화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사유’에서 다른 형태로 바꾸는 돌파구를 찾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 pp.31-32
토지를 누가 소유하느냐보다 누가 어떻게 경작할 수 있게 하느냐의 문제에 중점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현재의 농민은 농지 가격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미래의 농민은 농지 가격 떨어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둘 사이의 갈등인데, 미래의 농민은 아직 농민이 아니고 현재의 농민은 투표로 자신들의 의사를 나타내니까 정치는 현재의 농민 편을 들게 됩니다. ― 박석두, 「한국 근현대 농지제도의 변천과 농업의 미래」 --- p.43
토지로 인한 부의 편중이나 세습은 그만큼 사회에 불로소득자를 양산하여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명백히 사회정의나 평등사상에도 어긋납니다. 사람이 만들거나 생산하거나 가치를 창출하지 아니한 공기, 물, 토지, 길가의 꽃 같은 자연 자원은 만인의 것입니다. 소수인이 재주를 부려서 “이것은 내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깡패의 억지입니다. ― 홍순명, 「지속가능한 농지 공유화와 보전」 --- pp.66-6
결국 농민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이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농민의 저항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지만, 그중에 우리가 나중에 ‘다기능 농업’이라고 부른 현상이 다양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몇 가지 활동을 하는 창의적인 농민들이 이런 식으로 자꾸 등장한 것입니다. ― 황수철, 「다기능 농업과 새로운 농민」 --- p.154
동네일도 하면서 농사도 짓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친구들이 있어야 합니다. (...) 면 단위 정도의 마을 농업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를 함께 논의하는 세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없다면 키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농업과 농촌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하는 것이죠. ― 정민철, 「다기능 농업과 새로운 농민」 --- pp.173-174
다기능 농업이라는 것은 농업생산 활동 그 자체로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시도하는 실천입니다. 개인 수준에서 보자면, 결국은 농사짓는 것에 더하여 다른 활동을 붙이는 것이죠. 그렇지만 농민들이 각자 그런 식으로 한다고 다기능 농업이 되는 게 아니고 지역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 김정섭, 「다기능 농업과 새로운 농민」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억울하다. 그동안 약효도 별 없는 유기농 약제로 애벌레를 잡느라 고생하고, 무거운 퇴비도 뿌리고 유기물 공급을 위해 토양에 잘 섞이지도 않는 볏짚을 갈아 넣느라 고생한 시간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 인증 사고 이후에 주변 분들의 조언과 몇몇 자료를 통해 현재의 잔류 농약 검출 위주의 인증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조대성, 「나의 유기인증 취소 체험기」 --- pp.202-203
『인류세』의 지은이(클라이브 해밀턴)가 (...) 인류세의 해결 주체로 인류세를 초래한 인간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많은 종류의 생물을 포함해 전체 행성의 미래가 이제 의식적인 힘의 결정”에 달렸으며, 인간만이 행위성agency, 즉 사회적 세계를 생산하고 재현하며,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 신인간중심주의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터전인 지구를 훼손하고 파괴함으로써 인간에게 부여된 특별한 선물인 행위성을 남용한 것이 바로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아가 “인류가 최종적으로 지구의 중심에 있는 존재”임을 수락하는 것이다. 그래야 ”책임감을 갖고 지구와의 관계를 가꿔 나간다“는 책임의식이 생겨나게 된다. ― 장정일, 「인간은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 --- pp.250-251
풍류는 그 시원부터 항상 우리 곁에 있어왔다. 풍월주의 모습으로, 원화의 모습으로, 화랑의 모습으로, 원림 속에서, 풍수의 모습으로, 음악으로, 조선집의 원리로 작동하며, 드디어 19세기에는 동학으로 나타났다. 문자 없이 하나의 사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풍류는 첨언되고, 과장되고, 뒤틀렸을지 모른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몸이 절로 가는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 함성호, 「풍류와 공부」 --- p.277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살던 어린 시절에는 명절이 되면 풍물패를 조직해 동네를 돌았고, 추석 달밤이면 소금을 내지 않는 염전의 빈 염판에 모여 마을 아낙네와 처녀들이 모여 강강술래를 했다. 돌아가며 소리를 매기고 뜀박질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으면 신이 났고 끼어들고 싶기도 했다. 가끔은 동네 총각들이 가짜 댕기를 드리고 슬쩍 강강술래 판에 끼었다 들통이 나 구박을 받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 강홍구, 「어의도―기억과 소멸」 --- p.284
사라진 마을의 기억을 소환하는 마을사진가들의 마을아카이브작업 ‘냉정골프로젝트’는 근대의 기록관리 시스템과 작가 시스템, 그리고 공식 역사 담론에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사진의 사회성, 즉 한 개인의 것으로 독점될 수 없는 ‘공유자산으로서의 기록성’을 발견하고, 집단 연구와 작업을 통해 공식적 기록방식을 전유하며 사진적 기록과 또 다른 역사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 박영선, 「마을의 삶을 소환하는 마을사진가들」
---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