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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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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384g | 140*195*30mm
ISBN13 9788990028716
ISBN10 899002871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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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카만 어둠에 감싸인 살롱 안을 천둥이 관통했다.
잠깐 동안 다이고는 일어선 채 망설였지만 두꺼운 융단에 발을 끌다시피 하며 걷기 시작했다. 일대가 전부 정전되어 버렸는지 창문으로 흘러드는 빛도 없었다. 의자와 테이블 윤곽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암흑이었다.
손으로 더듬어 가며 여자 대각선 앞으로 짐작되는 의자에 앉았다. 막상 앉아 보니 상당히 가까운 위치인 것 같았다. 아까부터 은은하게 느껴지던 겔랑 향수가 근처에서 감돌았고, 여자의 숨이 다이고의 볼에 전해졌다. 그런 모든 것들에 달콤하고 왠지 쓸쓸한, 묘하게 고귀한 냄새가 담겨 있었다.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고서 잔을 두었을 때, 여자의 팔꿈치를 살짝 스쳤다. 얇은 천 안쪽의 가는 팔이 저릿한 감각을 다이고 안에 남겼다.
“우연이로군요.”---p.18

“그럼 당신도 이해해 주시겠죠. 제가 그 남자를 죽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는 심정을. 인간의 갖가지 죄 중에서도 어리고 귀여운 아이를 괴롭히는 죄만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없으니까요.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서 이반과 알료샤가 신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었지요. 경건한 수도사 알료사조차 순진무구한 아이를 괴롭히고 죽인 인간에게는 ‘총살해야 마땅합니다!’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그래요. 이 세상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인간도 존재하는 겁니다.”
“옳은 말씀이에요. 다만 용서하지 않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나요?”
용기……. 그거야말로 지금 다이고가 가장 두려워하는 말일지도 모른다.---p.25

갑자기 매섭게 차가운 공기 밑바닥에서 여자의 잔향이 감돌았다.
아까 그녀가 말한 ‘순수함과 용기’라는 말이 다이고의 의식에 길게 여운을 남겼다.
용기란 어떤 뜻이었을까……?
아득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다이고는 여전히 반쯤 넋이 빠져 있었다.---p.29

바르비종의 밤, 그 어둠의 감촉이 다시 생생하게 피부에 되살아났다.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셔도 저는 이미 누구보다 당신을 이해하고 있지 않나요?’ ……어린 아들을 깨우치듯 속삭이는 후미코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아아,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나고 싶다.
다시 그녀와 만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역시 자신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그녀에게 이르는 길이 없다. 후미코는 놀랄 만한 대담함과 용기로 다이고와 나눈 암묵의 약속을 지켰다.
요시미 교수의 튀어나온 눈이며 두꺼운 입술이 눈앞에 떠올랐다. 권력과 돈을 향한 끝없는 욕망.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약자의 생명과 생활도 벌레처럼 짓밟는 잔인한 정신. 포피코 분석에서 다이고를 뺐을 때의 뻔뻔한 표정. 알래스카 전출을 권하던 엷은 웃음. 쉴 새 없이 신음하던 어린 환자의 목소리며 다이고의 손목을 잡고 진실을 묻던 어머니의 눈빛이 차례차례 눈앞에 어른거렸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존재하는 법이다.---p.153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 있는 또 한 사람의 진정한 자신, 세속과 일상성을 전부 뛰어넘어 참된 순수함으로 영원한 것을 갈구하는 시인 같은 영혼이 그를 지배하고 행동하도록 내모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평생을 살며 단 몇 번만 반짝반짝 빛나는 영원을 만날 기회를 잡는다. 그 기회에 용감하게 결단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빈곤하게 퇴색된 일상성의 먼지 속에 묻혀 생을 마쳐야 한다. 일생 선택받은 인간이 될 수 없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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