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2년 11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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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00쪽 | 130*224*80mm |
ISBN13 | 9788937486074 |
ISBN10 | 8937486075 |
발행일 | 2012년 11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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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00쪽 | 130*224*80mm |
ISBN13 | 9788937486074 |
ISBN10 | 8937486075 |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 7부 8부 작품 해설 작가 연보 |
오래전 소피 마르소 주연의 <안나 카레니나> 영화를 보았었다.
그때에도 난 영화의 원작인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볼 생각을 못했었던 것 같다. 그냥 막연하게 언젠가는 읽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은 도끼다』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을 읽고난 후 이 책을 꼭 읽어야지 하고 주문을 했더니 책 3권에 페이지가 장난아니게 두꺼운 책이어서 언젠간 읽으리라, 꼭 읽어주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후 아는 분의 블로그에서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으로 조 라이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다는 기사를 접했다. 굉장히 반가워서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꼭 원작을 만나리라 생각하고 있다가 이번에 읽게 되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이 많이 생각났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영화의 장면장면들보다 책의 내용이 훨씬 다른 많은 내용들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일단 내가 영화를 보았을때는 우연히 만난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진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안나 카레니나 만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을수록 이것은 안나 카레니나와 작가의 생각이 그대로 들어있는 레빈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의 레빈은 키티를 사랑한, 도시를 떠난 시골에서 생활하는 남자다.
사랑하는 키티를 만나기 위해 시골에서 모스크바로 찾아와 키티에게 청혼을 하지만 그때 브론스키에게 빠져있던 키티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고 브론스키를 향한 마음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거절로 다시 시골로 돌아온 레빈은 깊은 절망으로 힘들어하지만 농업에 힘쓰려고 노력한다.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불륜으로 페테르부르크로 알렉산드로브나의 마음을 달래러 온 안나는 우연히 브론스키 공작을 만나고 그의 구애에 마음을 흔들리고 만다. 부랴부랴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온 안나는 그녀의 주변에 자꾸 나타나는 브론스키에게 점점 사로잡히게 된다.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브론스키와 함께 시골로 간 안나는 사교계에서 싸늘하게 외면을 당하고 브론스키에게 집착하는 안나와 그런 그녀에게 마음이 점점 식어가는 등 힘들어하는 면모를 보인다.
이 책에서는 안나 카레니나가 스무 살 넘게 차이 는 남편과 결혼생활을 했지만 우연히 비슷한 또래의 남자인 브론스키 공작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바랐던 여자 안나의 모습들을 그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결말과는 다른 결말을 보여줬다. 이를 테면 안나의 죽음 같은 것.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브론스키와의 행복을 바랐던 안나는 브론스키가 아무리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언젠가는 자신의 자유를 그리워할 사람으로 보고 힘들어 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해 했던 안나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또한 안나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했지만 자신의 자유를 그리워했던 브론스키의 모습 또한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을 내세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지주의 삶을 살며 농업에 대한 생각과 농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냈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레빈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들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레빈의 형 세르게이 이바니치의 생각을 빌어 그의 사회적인 철학을 강조했고, 안나의 오빠인 스테판 오블론스키는 아내인 다리야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지만, 책에서 나오는 모든 인물들과 친하게 지내며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 모든 주인공 들을 내세워 러시아의 생활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귀족들의 삶, 그들의 생활, 철학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하나의 신비가 여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은 채 그의 눈앞에서 완전히 실현되기도 전에, 그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그를 사랑과 삶으로 손짓하는 또 하나의 신비가 일어났다. (2권, 563페이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선한 것인가에 동의하고 있어. 나와 모든 사람은 확고하고 의심할 여지 없고 분명한 한 가지 지식만을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지식은 이성으로 설명도리 수 없어. 그 지식은 이성을 초월해 있고 어떤 이유도 갖고 있지 않고 어떤 결과도 가질 수 없어.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일 그것이 결과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3권, 518 페이지)
곧 개봉할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역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
안나의 오빠 스테판 역으로 나온 매튜 맥퍼딘은 <오만과 편견>에서 다아시 역으로 나왔다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의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3권, 560페이지)
이 책의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지만 책 속의 진짜 주인공은 안나가 아니라는 점.
레빈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커다란 울림을 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을 부정하였지만 끝내 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게 있었을 때 부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이는 하느님, 즉 신 밖에 없었다는 걸 깨닫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톨스토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말은 레빈의 마지막 나레이션이 아니었을까.
600페이지가 넘는 세 권의 책을 읽는동안 안나의 삶에, 사랑을 잃고 번민하는 레빈의 삶을 지켜보았다. 또한 그 사랑이 이루어졌을때 느끼는 행복감과 불안감 또한 비례한 듯 하다. 서로의 마음이 굳건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겠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가정을 버린다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또한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용서할 수 있는 아량도 좀처럼 찾기 힘든데, 이 책은 어쩌면 용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톨스토이의 모든 생각들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로 하여금 집약되어 있는 책으로 톨스토이의 생각들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했다.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도 그렇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독자들한테 사랑받는 명작이란 걸 다시한번 느끼겠다.
‘러시아 사교계에 잘나가는 유부녀의 바람 핀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는 게 『안나 카레리나』에 대한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한 개인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가 왜 세계적인 문학작품이 되는지도 의문이었다. 인간욕망의 근원을 파헤쳤다는 작품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약했다. 물론 대문호로 추앙받는 톨스토이의 작품이라고 해도 말이다. 조각지식으로 외면했던 안나 카레리나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2013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보고 나서이다. 영화를 본 것은 순전히 주연배우 때문이었다. 좋아하던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배우가 아니었다면 볼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이 기존의 생각을 뒤집지는 않았다. 허나 영화를 보면서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모든 장면을 연극무대 위에서 이끌어나갔다. 굳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장면에서도 특별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았다. 그건 단순히 인생을 한편의 연극에 비유해서 감독이 연출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원작이 그런 스타일로 쓰여 있던지. 또 하나의 궁금증은 안나와 브론스키 백작이 서로의 감정을 시작된, 그리고 모두의 눈총을 받았던 무도회장면이었다. 평소 춤에 관심이 있던 나에게 눈에 뛴 것은 그들이 추웠던 춤이었다. 일상적으로 무도회에서 보게 되는 왈츠가 아니라, 우아한 손동작이 어우러진 춤은 처음 보는 춤이었다. 영화 등을 통해 그 시대의 귀족사회의 무도회에서 볼 수 있는 단아하고 격식있는 춤이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대상끼리 부드럽고 우아하게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손동작은 섬세함에 관능을 동반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새들의 날갯짓마냥 손목아래를 파도치듯 울렁거리는 동작과 손가락의 섬세하고도 미세한 움직임도 특이했지만 손의 움직임과 손목의 유연함, 춤추는 대상과의 손의 만나고 헤어짐의 동작은 어찌보면 남녀간의 교합을 은유하는 것 같은 에로틱함도 깃들여있었다. 그냥 추면 그저 밋밋한 춤이었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추는 춤은 그 속에 서로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원작에도 언급되고 그 시대 러시아 귀족사회에서 유행했던 폴란드의 전통무용인 마주르카는 아니었다. 어쩌면 마주르카에서 역동적인 스텝을 제거한 춤이라고나 할까.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는 영화의 안무가였던 시디라르비 세르카위가 왈츠에 발레의 우아한 손동작과 배우들의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농염함이 가미된 바디 랭귀지를 삽입하여 창조한 춤이었다. 그래서 그렇듯 관능적이며 요염하게 보였나 보다. 마치 춤을 추는 서로의 감성을 춤의 동작만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2013년도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와 가슴의 거리이고, 그보다 더 먼 거리가 가슴과 발까지의 거리라고.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원작으로 만나본 『안나 카레리나』는 내가 알고 생각했던 단순히 한 여인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그렸다.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물론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재는 안나라는 가정을 가진 여자와 브론스키라는 젊은 귀족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의 소재일 뿐이다. 그 이야기에 가려 더 큰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건 삶에 관한 이야기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열정적이고 정염적인 사랑 -영화에서도 이 부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다른 이야기는 가려졌다 –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그 주위에는 얽히고설킨 수많은 관계로 엮어진 인드라망의 거대한 구성을 그려내고 있다. 어떤 하나의 삶의 모습에는 반드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의 삶의 모습을 대비하며 독자로 하여금 어떠한 삶이 참된 삶인지, 어떠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를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크게는 같은 귀족이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브론스키와 레빈의 삶의 대비를 통해 삶의 방식과 사랑의 방정식에 대해 애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나의 입장에서 브론스키와 남편과의 사랑의 방식. 키티의 입장에서 결혼을 위한 배우자로 브론스키와 레빈을 놓고, 화려한 삶을 사는 브론스키와 삶의 소소함과 의미에 치중하는 레빈을 비교하며 결혼에 있어 배우자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외도의 입장에서는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와 안나의 모습, 외도하는 배우자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둘리와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사랑의 방정식에 있어서는 안나와 키티를, 사랑에 있어서는 형식에 치중하는 알렉세이와 브론스키의 저돌적인 사랑을, 귀족의 삶의 모습은 정치에 뜻을 둔 레빈의 형과 그저 소일거리로 삶을 사는 귀족들의 삶을, 공장을 운영하며 지내는 귀족과 농노를 소유한 귀족, 여자의 외도에 대해서는 안나와 벳시의 비교, 그 외도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선, 도시의 공장노동자와 농촌의 농노에서 생활하는 농부들의 삶에 대한 대비, 낙관적인 삶과 치밀한 삶과 의미없는 삶, 비교하는 삶의 모습을 또한 보여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안나의 자식에 대한 편애, 안나와 키티의 출산의 모습과 대비되는 죽음, 작품의 초기에 열차에 치여 죽는 한 노동자의 죽음과 작품의 말미에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안나의 죽음 또한 같은 죽음의 모습을 놓고 극적인 대비의 묘미를 선사한다. 생명이 탄생되는 출산의 순간에는 출산의 기쁨과 더불어 대비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이란 것이 어떤 하나의 감정만을 지속할수 없음과 삶에서 우리가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비례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다양한 대비와 다양한 이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선택을 통해 달라지는 인생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서 삶의 진실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를 향해 묻는다. 그 물음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이다.
『안나카레리나』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보인다. 자신의 대변자인 레빈의 대사나 그의 삶을 통해 작가 자신의 삶을 반추해 낸다. 삶의 다양성에 대한 병렬적 구조의 이야기 전개를 통해 출생과 죽음, 사랑과 증오, 애정과 애증의 관계를 보여준다. 수없는 인과관계로 얽히고설킨 병렬적 서사구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레빈과 브론스키. 안나와 키티, 귀족과 평민, 도시노동자와 농부의 삶의 비교를 통해 관계와 관계로 이어져 끊임없는 순환구조에 이루어진 인드라망의 다양함으로 이야기는 구성되어있다. 마치 인간세상의 나비효과를보는 것 같다. 한사람의 선택은 누군가의 삶에 그만큼의 영향을 미쳐 그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그 관계와 관계로 구성된 그물망안의 몸부림이다. 그 관계란 나의 선택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럼 그 선택이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자신의 의지일까. 아니면 신의 섭리일까. 그 선택의 영향으로 바뀐 타인의 삶은 그럼 누구의 의지인가. 나의 의지의 발로라고 생각한 그 선택 또한 타인의 선택에 대한 영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아는 신은 그 관계는 아닐까. 그 관계라는 것이 신의 의지의 표현은 아닐까. 우리가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던 그 관계의 인드라망이 어쩌면 바로 신은 아닐까. 이 작품은 이렇듯 끊임없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격식과 허례에 갇힌 러시아 상류층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 형식에 치중하고 명예를 존중하며 외적인 치장에만 추구하는 귀족들의 삶. 먹고사는 것에 걱정이 없는 귀족들의 지루한 삶과 매일 밤 계속되는 화려한 파티문화, 삶 자체의 지루함이 주는 일탈에의 끝없는 충동,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탈이 그들의 삶에 자양분이다. 타인의 일탈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나의 일탈은 삶의 활력소인 이중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삶의 긴장감이 해소됨으로 인한 삶의 무기력함과 나약함. 살아있음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그들의 형식적인 삶,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에 가장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귀족들의 모습, 그 속에서 착취당하고 생의 영위를 위해 생존의 유지에도 어려운 보수와 지대를 납부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도시근로자와 농부들의 삶을 보여준다. 귀족들의 지루한 삶과 대비하여 노동의 신성함과 땀 흘림의 귀함을 자신의 대변자로 내세운 레빈의 삶을 통해 보여줌으로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에 대한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다.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이 작품은 총 8부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이 원작이 써진 그 시절 출판사에서는 7부까지는 출간하고 8부는 출간을 거절했다. 이야기의 구성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 출판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8부는 톨스토이가 자비로 출간했다고 한다. 7부에서 안나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하지만 그걸로 이 작품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를 통해 하고픈 이야 기를 마지막 장인 8부에 모았다. 8부는 기존의 이야기 전개방식과는 이질적이다. 레빈의 독백으로 엮어진 8부에서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성찰이 레빈의 입을 빌어 묘사된다. -참고로 이 작품속의 레빈은 톨스토이 바로 자신이다. - 작가는 묻는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그리고 레빈의 입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레빈의 독백을 빌어 고백한다. 하지만 난 톨스토이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결론이 인격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나는 동조할 수 없다. 물론 작가의 그런 생각은 마지막 8부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 안나가 달려오는 열차바퀴에 몸을 던져 자살을 선택할 때 안나는 신에게 용서를 빈다. 안나의 남편인 알렉세이가 자신을 배반한 안나에게 복수의 마음을 품다가 용서를 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도 신앙의 이유였다. 신앙심이 전혀 없는 그였는데 말이다. 만약 레빈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 신이 삶이라는 영역 속에서 마주치는 관계의 일환이며, 외부의 공기를 호흡하고 외부의 음식을 섭취함으로 생명을 지속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삶이라는 필연적인 관계의 인드라망 속에서의 맺어지는 수없는 인연, 필연, 운명의 역동성속에서 선택이 빚어낸 관계의 역학구도로 엮어지는 그 미지의 것이 신이라면 나는 그 섭리에는 동조할 수 있다.
그녀의 주된 걱정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 즉 자신이 브론스키에게 어느 정도 소중한지, 자신이 그가 포기한 것들을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을지 였다. 브론스키는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그 갈망, 즉 그에게 사랑받고자 할 뿐 아니라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가 그를 사랑의 올가미로 얽매려 애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3권.199쪽)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나를 포기하고 너를 인정하는 것이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나의 사랑은 달랐다. 안나는 끝가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라는 새로운 구성체로 거듭나지 않는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삶. 너를 인정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 그것이 사랑에 대한 자각이다. 이런 자각이 없으면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하면서도 기존에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기반을 버리지 못했다. 모든 것을 다 갖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이 역설적이게 그들의 사랑의 종말과 더불어 안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랑 또한 그려져 있다. 협의로는 다양한 가정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광의로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사랑의 모습을 통해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여정도 함께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첫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1권. 13쪽) “가 오히려 다양한 사고의 확대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2013년도 영화에서 왜 감독이 모든 장면을 연극무대처럼 구성했는지. 그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관객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삶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했다. 그 선택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고 감독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싱크로율이 원작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장면을 무대 위에서 연출한 감독은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 담고 싶어 하는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물질의 무한성 속에서, 무한한 공간속에서 거품같은 유기체가 분리되어 나온다. 그리고 그 거품은 잠시 버티나 터져 버린다. 그리고 그 거품은, 바로 나.(3권. 503쪽)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일 그것이 결가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따라서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3권. 518쪽)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것은 늦은 밤 텅 빈 사무실에서였다. 마지막 장을 넘긴 그 순간의 감동을 책을 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만큼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왜 『안나 카레리나』가 위대한 작품인지를 가슴 절절히 느끼게 했다. 기차역에서의 한 번의 마주침으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의도치 않은 만남은 의도치 않은 삶을 그려냈고, 그 삶은 또 다른 이들의 삶으로 이어져 당사자들과 더불어 그들과 관계된 타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삶의 무한함, 하지만 생의 유한함.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삶속에서 한없이 이어지는 관계의 인연 속에서 인간의 삶은 끝없이 이어진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인연으로 강요된 선택의 순간, 그 속에서 어떠한 삶의 길을 택하느냐는 바로 자신의 문제이다. 안나의 죽음이후 누군가는 그 죽음의 영향으로 변화된 삶을, 누군가는 그 죽음으로부터 멀어져 일상적인 삶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리며 산다. 그 일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하지만 한 여인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바로 관계의 인드라망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가슴 가득 쏟아나는 뜨거움을 동반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의 들 뜬 열기를 달래기 위해 늦은 밤 한적한 도시의 길을 걸었다. 끝없이 떠오르는 상념을 규격화된 도시의 교통수단에 가둘 수는 없었다. 도시의 밤, 술에 취해 몸을 못가는 사람들, 늦은 밤 귀가 길을 서두르는 사람들, 어딘가를 향해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누군가와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난 무슨 인연으로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공기를 나눠마시며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에 존재하는 인연은 무엇으로 인함일까.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는 이 인연은 서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마주치는 낯모르는 이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를. 그리고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를. 이 작품은 스스로의 삶에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을 통해 이 질문에 답을 했다. 난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할수 있을까. 아니 답이 있기는 한 걸까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열린책들. 2014. 돈키호테 2권. 655쪽)
내용은 훌륭하나, 민음사를 믿고 구매해서 읽었는데, 중간중간 번역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가령, 인물간의 관계에서, 동생을 아가씨라고 해놓는다든지, 중간중간 문맥에 안맞는 부분이 있어
당혹스러웠습니다. 역자가 주석도 많이 달고 나름 열심히 한 것 같긴 한데, 주석이 아주 자세한데
비해, 등장인물들이 하는 불어나 러시아어에 대한 해석을 가끔씩 주석에서 툭툭 빼먹고,
꼼꼼한 검토 작업이 없었던 것 아닌가 싶어 많이 유감스럽고 아쉽습니다.
민음사의 이름에 걸맞게, 좀 더 신경쓰고, 확실하게 꼼꼼한 출판 작업 보여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