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7년 12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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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4쪽 | 554g | 128*205*30mm |
ISBN13 | 9788971847589 |
ISBN10 | 8971847581 |
발행일 | 2007년 12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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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4쪽 | 554g | 128*205*30mm |
ISBN13 | 9788971847589 |
ISBN10 | 8971847581 |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리베르 문학 필독서, 단편·고전·수필 5종 세트
68,040원 (10%)
기획위원의 말 제1장 편력을 떠나다 제2장 거인과의 결전 제3장 성에서 생긴 일 제4장 마법에 걸린 숲 제5장 기사의 책무 제6장 카르데니오의 비애 제7장 고행의 시간 제8장 도로테아의 슬픈 사연 제9장 엇갈린 사랑, 제자리를 찾다 제10장 귀향 제11장 다시 편력의 길로 제12장 숲의 기사 제13장 사자의 기사 돈 키호테 제14장 둘시네아를 위하여 제15장 고통에 찬 여인의 부탁 제16장 섬의 총독이 된 산초 제17장 하얀 달의 기사 제18장 편력, 끝나다 《돈 키호테》 제대로 읽기 |
서론은 첫 번째 리뷰에 써놓았으니 각설하고, <돈 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의 생애부터 논해본다. 지난 번에 '효용론적 관점(독자관점)'에서 <돈 키호테>를 분석했으니, 이번엔 '표현론적 관점(작가관점)'에 대해서 논해보겠단 말이다. 간간히 '반영론적 관점(시대관점)'도 포함해서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할 지경이었단다. 오늘날이야 의사라는 직업이 사회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부유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이었지만, 16세기만 해도 '외과의사=이발사'로 통용될 만큼 천한 직업이었으며, 치료를 해주고도 치료비를 제대로 받지 않는 등 인심 좋은 가장이었던 탓에 자식들은 배를 곯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귀족의 시종 노릇을 하며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뒤 군인이 되어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당시에는 여행을 공짜로 하기 위해서 군대에 입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학자 데카르트도 그중 하나였는데, 암튼 세르반테스도 좋은 경험(?)을 많이 하기 위해서, 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군인의 길을 갔던 것 같다.
하지만 해전에서 왼팔에 총상을 입고 평생 불구가 된 세르반테스는 5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해적에게 붙잡혀 또다시 5년간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어찌어찌 고국인 에스파냐로 되돌아간 세르반테스는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투잡, 쓰리잡까지 했지만 곤궁한 삶을 벗어나진 못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왕성한 집필 활동까지 했고, <돈 키호테>를 비롯한 여러 대본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등 대히트를 쳤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1616년 4월 23일 셰익스피어와 '같은 날'에 숨을 거두었다. 각각 영국과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대문호가 한날에 생을 마감한 것이 참으로 묘하다.
셰익스피어는 그렇다치고 세르반테스도 대문호인 것이 타당할까? 그렇다. <돈 키호테>가 그 증거다. 다름 아니라 <돈 키호테>가 '현대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럴까? <돈 키호테>를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할 따름인데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줄거리라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탄하게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러 모험을 짜깁기한 것마냥 어수선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중간에 '작가의 넉두리'로 보이는 잡담까지 고스란히 담아 놓았는데, 주인공인 돈 키호테는 미치광이 짓을 거듭할 뿐이다. 이렇게나 난삽한 내용이 무려 300쪽~700쪽에 달하기 때문에 웬만한 독자들은 읽다가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현대소설의 효시'로 삼는 까닭은 '르네상스 이전의 소설'들이 어땠는지 살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고전소설들의 등장인물이 대부분 '전형적인 인물'을 등장시켰던 것에 비춰볼 때 '돈 키호테'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인물이었던 셈이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뿐만 아니라 하는 짓도 착한지, 나쁜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짓을 일삼는다. 그당시 독자들이 느꼈을 충격을 상상해보면 <돈 키호테>의 인기가 왜 높을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돈 키호테>는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히곤 했다. 17세기 근대가 시작하던 때에는 마냥 재밌는 책이었겠지만, 18세기 합리주의가 대륙의 사상을 지배할 때는 '이성상실'한 미치광이로 보았다. 그러다 19세기 낭만주의가 들어서자 돈 키호테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해석되어 불의와 맞서는 고귀한 이상주의자가 되었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사실주의에 입각해서는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뻥쟁이이고, 마르크스주의로 보면 몰락한 봉건적 가치에 집착하는 귀족집단을 대표하며, 실존주의로 투영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초인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만나면서 '돈 키호테'는 물을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을 말한다. 한마디로 '불확실성'을 추구하는 사조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래서 돈 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주막을 성으로, 이웃집 못난이 처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둘시네아 공주로 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독자들도 <돈 키호테>를 읽으며 '다양한 해석'을 내놓기 일쑤다. 평가도 다양하다. 좋았다는 독자들도 있는 반면, 형편없다고 혹평을 내놓는 독자도 부지기수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읽히면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받는 작품이 또 있을까? 그래서 <돈 키호테>가 오늘날까지 주목을 받고 있으며,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영혼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한편, 메타버스가 가능해지는 미래에는 어떨까? 현실과는 다른 '가상세계'에 또 다른 나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지면 돈 키호테 같은 인물은 더는 미치광이가 아니게 된다. 왜냐면 풍차를 거인으로도 보고 뛰어들면 '진짜 거인'이 풍차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는 '게임속의 캐릭터'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아낌없이 투자하여 키우고, 꾸미고, 능력치를 성장시켜서 수많은 유저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현실속의 자신'도 덩달아 대리만족을 느끼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단언컨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하는 '특이점'이 구현된다는 2040년을 기점으로 <돈 키호테>는 다시금 주목받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인공지능의 몫이 되고, 인간은 '돈 키호테의 사고방식'을 추구하며 살아야 인간다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하면 '인공지능'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은 남다르고 색다른 창의적인 생각을 샘물처럼 쏟아내야만 할 것이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미치광이가 주목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
다음 <돈 키호테> 책에서도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련다.
다 읽고나니 기왕에 읽는거 시공사에서 나온 두꺼운 완역본으로 읽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쉽고 편하게 재밌게 읽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이라 완역본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르고 붙여 편집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치만, 돈 키호테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딱 최소한 접할 만큼은 접한 듯하니 이 정도로 만족.
철학자 김용규씨가 얼마전(?) 한겨레신문 토요일자 칼럼란을 통해 - 지금은 연재를 안하신다 - 두 차례에 걸쳐 돈 키호테 이야기를 하신 바 있다. 그만큼 다른 고전작품들보다 돈 키호테를 가지고 하고픈 말이 많으셨던듯 하다. 먼저 김용규는 "돈 키호테는 이상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이상주의를 ‘현실적 가능성을 무시하고 이상의 실현을 삶의 목표로 하는 공상적 또는 광신적 태도’ "라고 규정하면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이상은 순결한 이상이었다. 돈 키호테를 둘러싼 전자의 해석은 칼 마르크스에 의한 것인데 마르크스는 돈 키호테를 "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같이 "추상적 원칙에 의해" 세계를 해석한 "잘못된 의식의 화신" "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김용규는 그럼에도 돈 키호테에게는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가지기 어려운 미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 희생에 의한 이상 실현"이라고 한다.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한 인류의 이상은 숱한 사상가, 혁명가, 종교인에 의해서 시대를 거르지 않고 주장되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성취되지는 못했다. 각각의 이유야 많다. 그러나 공통적인 원인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모두들 자신의 이상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이상을 실현하는 데 요구되는 희생은 떠맡으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누구도 “남의 뺨에 흐르는 땀에서 제 먹을 빵을 짜내면서” 더 나은 삶과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이상이란 ‘단지 꿈꾸고 바라기만 하는 공허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희생을 대가로 이루어가야만 하는 고귀한 어떤 상태’인 것이다."
돈 키호테는 성직자들이 앉아서 기도나 드리고 있던 시절, 비록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기는 했지만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몸으로 노력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곳곳에서는 그런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못생긴 동네처녀를 공주라고 하질 않나, 낡은 여관을 뻑쩍지근한 성이라는둥 엉뚱한 소리, 엉뚱한 짓을 일삼고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력기사로서 꿋꿋이 나아간다. 그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 그렇게 묘사되고 있지만 그는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사회를 위해 한발 한발 정진해나가고 있다. 비록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헛된 망상이라고 놀리지만.
이상사회는 완전하지만 도달하기 어렵다. 현실이기보단 비현실에 가까우며, 그것은 차라리 꿈꾸지 않느니만 못해 보인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기 나름의 이상사회를 그리고 그 이상사회로 다가가기 위한 철학을 세웠다.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키는 부문은 이상사회였다. 플라톤이 그러했고, 헤겔도 그러했고, 칸트도 그러했다. 이들의 철학을 분야로 나누는 건 우습지만, 그들이 마지막에 자신의 철학을 완성한 곳은 정치철학이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이상사회를 꿈꿨지만 아무도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실현 불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현불가능하다하여 꿈꾸지 말란 법도 없다. 개인의 자아실현은 꿈을 꾸면서부터 시작되고 완성된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망과 노력이야말로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드는 변화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상이란 언제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부추기고 불편하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이것이 이상의 본래적 가치이며 역할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상주의자는 밤마다 희망을 쓸어안고 잠들고 아침마다 길 떠나는 자다."
우리는 이상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그리고 있는가.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현실을 보면 너무나 멀고 암울하기만 하다. 국민으로서 누리고자 하는 기본적인 가치조차 무시당하는 현실에서, 집나간 민주주의를 찾아 길떠난 시점에서, 우리에게 이상사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현실이 암울하다 하여 이상을 접어버릴 순 없다. 이토록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상을 꿈꿔야 한다. 그리고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 거꾸로 퇴행하는 역사를 되돌리고, 우리의 권리를 지키며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어쩌면 이상사회는 국민 모두가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받고 누릴 수 있는 사회인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해본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사회가 아닐까하고. 별다른게 없다. 그 옛날 선비들이 꿈꿨던 무릉도원이나 기독교의 천국이 이상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기본권을 보장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이 이상이 실현된 날이 아닐까 싶다. 그 날을 위해 한 발씩 내디디기에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이상을 위해 함께 가자. 돈 키호테처럼. 돈 키호테는 혼자여서 세상이 그를 비웃었을지 모르나, 우리가 함께 가면 우리가 세상을 비웃는다. 한 두명의 돈 키호테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동참해야 한다. 수많은 돈 키호테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p.s. 파란색 인용문은 모두 김용규씨의 한겨레 칼럼을 인용한 것이다.
돈키호테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돈키호테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할 것이고,
누구나 돈키호테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리고 어떤 뜻으로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돈키호테 같다’라는 말을 쓰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혹은 거의 전부가 돈키호테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돈키호테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이미 대충은 알고 있는데 시간을 내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렇게 읽지도 않았으면서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미 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살지는 말자는 생각에 조금씩 고전들을 찾아 읽고 있기는 한데, 이런 식의 의무감을 갖고 읽게 되는 경우는 항상 제대로 읽혀지지 않거나 건성으로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번 ‘돈키호테’를 읽는 과정도 (아쉽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서,
읽긴 했는데, 도무지 뭘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지를 않는다.
기억에 남는 내용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풍차를 어떻게 오해해서 달려드는지와 같은 일부 내용들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 작품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구성을 갖고 있고 어떤 의미로서 이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이 되지를 않는다.
그저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일부분으로서만
작품이 이해되고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저 대강이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어째서 돈키호테가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그가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기사가 갖춰야 할 행동방식을 얼마나 엉뚱하고 황당하게 실천하게 되는지를 그리고 그 행동이 점차 변화되는 세상(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세상과 어긋남을 보이는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소동극으로서
기사 이야기에 대한 뒤틀림을
일종의 패러디-풍자로서
이해될 수 있기도 하겠지만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점차 이야기가 확장되고 풍부하게 되어가지만 그것을 전부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부족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뻔하고 뻔한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될 뿐이었다.
그나마 대충이라도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얼마나 엉뚱하고 기발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약간이나마 위안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