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알다시피, 소설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histoire)라면 역사(histoire)는 실제로 있었던 소설이다.” 장 도르메송, 「어디서 어디로 무엇을」 --- p.6
우리 나이가 되면 사람이 고목(古木) 같다. 노인네들도 날씨가 좋으면 슬슬 되살아나고 조금은 푸릇해진다. 한 해 한 해가 예전 같지 않지만 말이다. 화창한 봄날은 우리가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 p.20
나는 의식을 일단 놓아버린 후에 죽음을 맞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무 자각도 없이 그냥 웃다가 혹은 잠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하면 좋겠다. --- p.33
나는 염색을 그만둔 지 벌써 한참 됐다. 딸이 갑자기 열 살은 더 들어 보인다고 무진장 잔소리를 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 p.34
어쨌거나 내가 죽고 나면 골동품 안락의자, 긴 의자, 양탄자, 다탁도 다 걔들 거다. 어차피 자기들 물건인데 곱게 쓰지 않으면 자기들만 손해지! --- p.42
내 나이쯤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육신을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리기 위해 옷을 입어야 한다. --- p.47
립스틱을 칠하거나 어울리지도 않는 짧은 치마를 걸쳐야만 건강하게 사는 건 아니다! --- p.52
나는 이제 예측되지 않는 일이 싫다. 예상 밖의 일이 생기면 당장 나 불편할 걱정부터 앞선다. 무슨 대화를 해야 하나, 하루 일정이 어떻게 꼬이는 건가, 미뤄질 수밖에 없는 십자말풀이 …… 솔직히 내 새끼들이 내일 당장 내려오겠다고 할 때도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 p.103
나는 미국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우리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주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어떤 것들은 미국에만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 p.272
이따금 저녁에 불을 끄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 밤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내일은 내가 세상에 없는 하루가 될지도 모른다. 실은 나도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 잠을 자다가, 꿈을 꾸다가 훌쩍 세상을 뜨고 싶다. --- p.298
수십억 별과 행성이 쉬지 않고 도는 어둠의 세상. 우리의 지구는 그 세상에서 푸른 구슬 한 알에 불과할 뿐 ……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 천국은 어디 있을까? 르네, 에드몽드, 르포르 부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갈까? --- p.106
리본을 두른 상자 두 개 옆, 밤케이크 위에 10살짜리 큰 초 9개와 1살짜리 작은 초 1개를 꽂았다. 10개의 초. 난 오늘 열 살이다. --- p.353
겨울을 끝까지 버텨내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권태롭더라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 p.365
나는 운이 참 좋았다. 아름다운 한 생을 살았으니까.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조금 더 나누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기력이 그나마 있을 때 헐벗은 이들을 도우며 살 것을. 그래서 기도를 빙자하여 용서를 구할 때도 많다. --- p.375
차츰차츰, 모두 떠나간다. 벗들의 빈자리는 영영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 내 친구들을 대신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 p.403
나는 쪼그라든 말, 뒤틀리고 무너져내린 언어를 듣고 싶지 않다. 쭈뼛쭈뼛 나를 힘들게 하면서 끝날 줄 모르는 이 이야기가 싫다. 상처도, 고통도, 의존적인 삶도 더는 알고 싶지 않다. --- p.414
사람마다 취향과 욕망이 다른 법이니 이 사람의 결정이 저 사람의 추억을 훼손할 수도 있다. 무심코 베어버린 나무 한 그루가 비극을 부른다. 수풀 하나를 밀면서 누군가의 어린 시절마저 밀어버릴 수 있다. --- p.422)
각자가 보내는 인생의 단계가 다르고 각자가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다르다. --- p.423
내일부터 봄이다. 마침내 다 지나왔다. 강 너머, 다시 소생하는 삶의 지대가 보인다. 내일이다. 그래도 수평선은 여전히 부옇고 멀게만 보이리라. 너울을 뒤집어쓴 것처럼 색깔이 흐릿하고 빛은 희끄무레하다. 내가 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내 걸음은 느리고 나는 너무 지쳤다.
--- p.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