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2년 08월 01일 |
---|---|
쪽수, 무게, 크기 | 328쪽 | 448g | 140*210*30mm |
ISBN13 | 9788937833762 |
ISBN10 | 893783376X |
발행일 | 2012년 08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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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8쪽 | 448g | 140*210*30mm |
ISBN13 | 9788937833762 |
ISBN10 | 893783376X |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야. 우리 모두 죽는 날이. 모두 다. 인류가 죄다 사라져서 누가 이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우리 인류가 여기서 뭘 했다는 것도 기억할 사람이 전혀 없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너희들은 고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클레오파트라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어지는 거야. 우리가 하고 만들고 쓰고 생각하고 발견했던 모든 것들이 잊히고 모든 것들이 무(無)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17페이지
이런 말이 있지. 우리는 영원을 살 수 없는데, '순간을 영원처럼'이라는 희망적인 척하는 역설적인 표현. 어떤 희망을 담보하면서 내 생에 의미를 부여하며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열심히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아니잖아. 우리에게 영원은 주어지지 않았잖아.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이하 '거스'), 인생의 마지막 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는 이 아이들 앞에서는 영원이란 말은 금지어가 돼버리고, 이들을 위해 진짜 '영원'이 존재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또 나에게는 역설적으로 차올랐어.
어린 시절에는 뭐든 새로움이었고 그렇기에 호기심이 무궁무진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여자아이의 2차 성징도 그런 맥락으로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여자아이가 초경을 하게 되면 가족, 부모님은 ‘축하해, 우리 딸도 드디어 숙녀가 됐구나!’ 같은 인사를 한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 나도 엄마에게 이 같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생에 한 번뿐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헤이즐 또한 그랬다. 나와 달랐던 점은 13살 초경이 시작된 지 정확히 석 달 후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다는 거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거듭나는 과도기에 놓인 이 시점이 헤이즐에게는 시한부 인생에 대한 선고를 받는 그렇고 그런 날이었다. 낯섦과 새로움으로 똘망똘망한 눈을 떼구루루 굴리며 천진난만해야 할 시절에 헤이즐은 너무도 빨리, 훌쩍 자라 버렸다.
하지만 우리가 '기적 같은 일이야!'라고 일컫는 일은 멀리 있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희망이 있는 척 임시방편으로 눈가림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도 싶다. 나 또한 지금 당장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지만 이들은 이미 곧 죽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내일이 불완전한 이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말기 암 환자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에도 온갖 의학적 도움 덕분에 3년이란 시간을 헤이즐은 더 살아냈다. 암세포가 폐로 전이됐으나 무한정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음에 그것만으로도 이들 가족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 상태가 계속될 수도 있고 급작스럽게 끝나버릴 수도 있는 시간이다. 암세포라는 건 그렇다. 나는 건강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는데 어느덧 내 온몸을 좀먹고 있는 기생충 같은 존재. 내 몸에 암세포가 살아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나는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알고 난 후로는 뛰지 않는 심장을 소유한 사람처럼 급격히 시들고 나약해져 가는 나를 마주한다.
이렇듯 아픈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물 쓰듯이 펑펑 쓴다면 그들은 입이 말라 갈증에 숨이 막힐 때까지 물 한 모금을 아껴가며 투쟁한다. 오늘만 같은 날이 영원하기를, 내일 뜨는 저 태양과 밤하늘의 달과 별을 계속해서 두 눈에 담을 수 있기를 같은 염원 속에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말기 암 환자들의 일상이다. 하지만 헤이즐은 좀 다르다. 여느 그 또래 아이들에게서 종종 목격할 수 있을 만큼 반항적이고 자신의 병 앞에서 부모보다 더 덤덤한 모습을 보여준다. 병마라는 건 그렇다. 몸만 늙어버리게 하는 게 아니라 정신 또한 한참 성숙하게, 늙어버리게 만든다. 따분하고 무료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암 환우 클럽에서 만난 거스는 이런 헤이즐의 무료함에 큰 기쁨이 되어준다. 거스는 골육종 때문에 다리 한쪽을 절단해야 했지만, 현재는 관해 상태로 누구보다 밝은 미소를 머금은 유쾌한 소년이다. 전 여자 친구와 같이 스테로이드에 절어 퉁퉁 부은 얼굴을 한 헤이즐을 보고 첫눈에 호감-우리에게는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을 느꼈고 헤이즐도 관심을 갖는다. 익숙함이란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에게만 보이는 익숙함은 나와 당신의 거리를 좁혀주는 비타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아이들과 함께 소설 속에서는 가상의 소설 한 편이 흐름을 같이 한다. 헤이즐이 자칭 33반년을 살아내는 동안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장엄한 고뇌>라는 책이 그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혈액암을 선고받은 한 소녀의 투병기인 동시에 아이와 엄마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들의 이야기를 '그런'이란 말과 함께 제대로 된 엔딩 없이 불시에 끝내 버린다. 왜 그렇게밖에 끝내지 못했는지는 나중에 밝혀지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상상 속의 여지로 남겨두는 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마지막 양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헤이즐은 소설 속 안나를 통해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밑도 끝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린 소설의 마지막에 더 집착을 보이고 알아내려 하는 것 같았다. 투병하던 소녀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지만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호함, 그리고 끝나지 않은 그 뒤의 이야기... 이 궁금증에 의해 소설을 쓴 작가를 거스와 함께 암스테르담까지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이들은 현실을 본다.
암적 이득이라 불리는 환자들을 향한 일반인들의 동정, 아픈 이들이기에 누리고 있는 나름의 특권, 자의식에 사로잡혀 안나는 제발 죽지 않았기를 바라는 그 어떤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그 속에서 알게 되는 거스의 재발. 세상의 공기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지만 피치 못해 인공적 공기, 초록색 산소 탱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헤이즐과 누구보다 밝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끝나지 않는 아픔에 허덕이는 거스는 우리의 현재이고 아픈 자화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들에게 닥친 이 비극적 아픔을 나누어 짊어질 필요성이 있다. 한 어린 소년 소녀가 세상의 모든 순리적 경험을 하지 못한 채 눈을 감는다는 것이 곧 비극적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들 곁에서 눈물을 흘려줄 순 있지만 그 이상의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더 아프게 다가왔던 것이리라.
헤이즐과 거스가 만나고 대화하고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시간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 어린아이들이 삶에 임하는 자세를 통해 어른인 나는 나이만 먹어갈 뿐 이 아이들처럼 어떤 것, 특히 삶이라는 것에 애착을 갖고 파고들고 관심 기울인 적 있는지 하는 자문을 한다. 비록 작가도 이 이야기는 픽션일 뿐이라고 못 박고 있지만 아니, 우리 별에는 이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에 아파하고 생을 마감하는 피지도 못하고 지는 빛들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이들의 생에 대한 애착이 결코 남 일 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사는 오늘을 살지 못하는 어떤 사람, 어떤 소년, 소녀... 그들의 살.고.싶.다.는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들을 생각한다면 내가 사는 오늘을 나는 과연, 얼마나 소중하게 살고 있을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 건강하니까,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그 때문에 생에 대한 소중함을 망각한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소설을 읽으며 마음이 불편했던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그 현실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떠오르고 그에 반해 나는 그들에게는 너무도 짧기만 한 하루 24시간을 어영부영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 때문에...
이 아이들이 병에 걸린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셀수도 없이 오기 마련이다. 헤이즐과 거스 또한 그런 불가피하고 불가해한 상황에 놓인 것 뿐이다. 아동 암환자들은 돌연변이의 부작용이라고 단정하는 헤이즐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너희의 잘못이 아닌데, 너희는 몸만큼 마음도 암이라는 못된 악성 세포 덩어리를 통해 좀먹고 있는 거구나. 너희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아플 수밖에 없는 우리 별의 현실. 온 우주를 통틀어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해도 누가 문제인지는 언제까지고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이건 네 인생이란다."-126페이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에게 평생의 역작으로 다가오는 소설의 작가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헤이즐에게 의사 선생이 던지는 이 문장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다른 누구의 인생도 아닌 바로 내 인생이기에,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지만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져야 하는 게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참 의미다. 멋대로 막살아가려는 듯 보이지만 이 아이들의 생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소설 곳곳에서도 드러난다. 모든 암의 원인이 되는 죽음의 물건인 담배를 꼬나물고-물론 불은 붙이지 않은 채로- 비딱하게 매력적인 미소를 건네는 거스, 그 소년은 자신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더 더 연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 절대로... 그 담배는 불붙지 않는다. 죽음의 물건을 항상 상비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생에 대한 애착을 더 고착시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헤이즐이 장엄한 고뇌의 뒷이야기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도 끝에 대한 마무리의 갈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물론 안나가 살아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면 더욱더 좋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그리고 불치병이라는 것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해피엔딩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걸 헤이즐도 알고 있다. 다만 이 소녀에게 필요했던 건 끝맺음이었다. 아름다운 그들 나름의 마지막. 본인 또한 그런 마지막을 가족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간절히 선사하고 싶었기에.. 그 모녀의 끝이 궁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나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최소한 살아는 있잖아. 그런데 무슨 불평불만이 그리도 많아? 한 번이라도, 돌아오기 어려운 강을 건넌 이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절대, 그런 말은 할 수 없다.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보다 죽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소망, 형식적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애도를 표해줄 누군가를 우리는 이 별에서 간절히 찾아다니고 열망한다. 마지막은 언제나 슬프다. 그러니 마지막이라 기억하기보다는 '영원히'라고 이 아이들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의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이 별에서 탄생했고,
이 별에서 살아가고,
이 별에서 아파하고,
이 별에서 기뻐하고,
이 별에서 눈물짓고,
이 별에서 사랑하고,
결국, 이 별에서 소멸하고,
그렇게... 이 별과 함께 공명하고,
그렇게... 이 별을 밝혀주는 별이 되었단다, 헤이즐과 거스, 너희는.
그리고... 언젠가 나도...
그래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삶을, 서로 사랑한 너희를 이렇게 부르고 싶어.
인생을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너희 삶 안에서.. 너희의 시간 안에서...
너희는 진정한 winner....라고.
죽음과 매일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수도 없이 전해 듣습니다. 누군가가, 내가 알고 있던 알고 있지 않던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은 그들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이 왜 죽었는지 이유조차 기억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지도 모릅니다. 하루가 지나고, 내일이 찾아온다는 것은 죽음과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저는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시간이 흐를 수록 더해갑니다. 내가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주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니까요.
산소 탱크를 어깨에 메고 산소호스를 달고 살아야 하는 헤이즐 그레이스는 열여섯입니다. 폐암 말기이죠. 죽음을 앞둔 이 소녀에게 소녀의 엄마는 매일 찾아오는 '하루'에 언제나 의미를 부여합니다 . “헤이즐, 오늘은 생일 반년 기념일이란다. 헤이즐, 오늘은 소나무에 새순이 나는 날이란다. 헤이즐, 오늘은 콜럼버스가 인디언에게 천연두를 퍼뜨린 날이란다.”하면서요. 소녀의 엄마는 그렇게 소녀의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녀를 기억하는 의식을 하죠.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견디기 힘들테니까요. 소녀는 그런 엄마가 자신보다 더 불쌍합니다.
세상에서 열여섯 나이에 암에 걸리는 것보다 더 지랄 맞은 일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암에 걸린 자식을 갖는 거다.
산소 탱크를 달고 오늘도 소녀는 암환자 모임인 서포트 그룹 집회에 나가요. 죽음의 부작용인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죠. 그곳에서 어거스티스라는 남자아이를 사귀게 됩니다. 재치있고 영리하고 활달한 어거스티스와 나눈 대화는 소녀 헤이즐을 흥분시킵니다. 도처에 깔린 친구라고는 암환자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시니컬했고 우울했거든요. 하지만, 어거스티스는 달랐어요. 어거스티스는 골육종이라는 암에 걸렸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영화주인공과 닮았다는 말을 해주고, 무엇보다 헤이즐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헤이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어거스티스에게 말해줘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책에 대해서요. 그 책은 『장엄한 고뇌』 라는 책으로, 그 책의 주인공 안나는 혈액암에 걸렸어요. 헤이즐이 안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안나가 자신의 암을 단지 ‘부작용’이라 부르기 때문이죠. 암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나, 암환자를 위해 재단을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은 헤이즐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미대가리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안나에게 매료되었던 것은 아동 암환자에 대한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이죠. 지구에 다양한 생명체를 만들어 낸 끊임없는 돌연변이의 부작용이라는 표현 말이죠. 그러나. 책은 안나의 엄마가 결혼하는 것이 끝입니다. 헤이즐은 다음 안나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안나가 죽었는지, 병을 이겨내었는지, 이후의 삶이 궁금한 헤이즐은 출판사 담당에게 편지도 여러 통 보내었지만. 답장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는 이야기까지 어거스티스 워터스에게 털어놓게 되죠.
어거스터스는 헤이즐을 위해 『장엄한 고뇌』 저자의 이메일을 알려 주죠. 그리고 헤이즐은 저자 피터 반 호텐에게 다음 편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요청을 해요. 그러자, 피터는 자신의 열혈독자를 암스트레담으로 초청을 해요. 하지만, 아픈 딸의 뒷바라지 하느라 없는 살림에 여행경비가 있을 리가 없죠.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암환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재단에 마지막 소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는데 헤이즐은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서 이미 소원을 써버렸답니다. 어거스티스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헤이즐을 위해 씁니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간 작가와의 만남에서 작가의 입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독설과 알콜중독자 특유의 횡설수설을 보고 둘은 실망을 안고 안네 기념 박물관에 갑니다. 그곳에서 둘은 서로를 기억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몸짓을 합니다. 그리고 어거스티스의 암이 활발하게 활동을 재개하였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게 되죠.
사람들이 내가 우는 걸 보면 상처받을 거라고, 내가 그들의 삶에서 ‘슬픔’이라는 존재밖에는 되지 못할 거라고, 단순한 ‘슬픔’으로 전락할 수 없으니까 울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요. 어거스티스는 헤즐리보다 먼저 죽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티스는 헤이즐을 위해 많은 것을 남겼어요. 매일 하루하루 한정된 죽음속에서 영원을 느끼게 해 주었고, 이제는 자신에게도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비극적 결함’ 이 생긴 것에 기뻐하지요. 소설속에 등장하는 작가 피터의 말에 의하면 소녀가 나아지면 소년이 아프고 소녀가 아프면 소년이 나아지는 이런 '교차성'이 별의 본질이라고요. 피터는 이둘의 운명을 비극적 결함이라고 부르죠. 사실 헤이즐이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소년은 소녀를 보며 소원을 빌었답니다. 소녀보다 자신이 먼저 죽어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요.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이렇게 광활한 우주속에서 짧디 짧은 우리의 생生에 깊고 무한한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피어올립니다. 암환자치고는 능청스럽고 긍정적인 헤즐리의 유머때문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고통을 말할 때는 너무 가여워서 울게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채워간 이들의 용감함에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비록 고통이 우리를 피폐하게 할지라도 사랑만이 고통을 낫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빛나는 슬픈 사랑이야기라서요.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저자 헬렌 스코닝이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거든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가을이 여름뒤에 오듯 결혼 이후에는 사별이 기다리고 있듯, 자연의 법칙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죽음을 이렇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매일 죽음을 느끼면서도 사랑하는데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죽음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는 어린 두 주인공을 보며 인간의 생은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게도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의 한조각을 바라보며,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사랑하고 기억해주고 싶어요. 내가 이 별에 살았다는 것을, 누군가가 기억해주길 바라면서요. 헤즐리 양,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거..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죽음과 절망.
유한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이 고난과 관계의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폭발하여 가까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불행의 파편을 날려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삶이든 살아야 한다.
누구에게든 빛나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은 죽음과 질병과 고통이기 때문이다.
실은 그런 것들을 피하고 싶었다. 현실의 모습이 그러할진대 숨어 들어간 책에서조차 그런 것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틱하지 않은, 평범함을 잘 담아낸, 화려하지 않지만 지루하지도 않은 그런 맹숭맹숭한 이야기. 요즘 내가 선호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빠져 들었던 것은 두 아이의 시시덕거림을 포함한 다양한 만남이 불행보다 행운으로 느껴졌고, 피하고 싶은 죽음과 고통의 모습조차 삶의 모습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이 책은 사랑 이야기니까.
설령 ‘죽음의 부작용’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빠져들고 충분히 사랑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스스로에게 더 안 좋을 수도 있었다고, 세상은 소원을 들어 주는 공장이 아니라고, 암 때문에 내가 죽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으며, 암이 나를 죽이기 전에 자진해서 목숨을 바쳐서는 안 되는 거라고 말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그냥 ‘멍청해, 멍청해, 멍청해, 멍청새, 멍청해.’라고 그 단어가 의미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계속해서 되뇌었다. 여전히 그 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이것 역시 죽음의 부작용이다. 나는 뛰거나 춤을 추거나 질소가 많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지만, 자유의 도시에서 가장 자유로운 거주민 중 하나인 것이다.
내 삶을 살아가는 것 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들여다보려는 짓을 왜 하고 있는 건지 가끔 생각한다.
즉 흔한 말로 아무 쓸모없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왜 읽고 있는 건지,
남들이 가치 없는 시간낭비라고 해도 나만이 누리고 싶은 사치일 수도 있고, 해독하지 못한 내 인생에 어떤 해석을 내내려보 싶이때문인 것 도 있지만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어떤 순간을 잘 표현한 글을 만났을 때의 묘한 떨림'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해도 말 한 마디, 글 한 줄 쓰기가 어려운데 책 속에서는 ‘그 순간에 정확한 한마디’가 존재한다.
그 표현들을 내 일상으로 포함시키는 일이 좋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쓸데없는 책읽기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