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또 샀어? 집에 많은데.”
“많기는. 많은 술이 어딨어. 곧 없어질 술이지.”
얭은 조신한 입을 오물대며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을 내던지고는 캔을 하나 땄다. 벌써 마시려고? 하고 묻는 내게 뭘 묻느냐는 듯한 눈빛이어서 나도 입을 다물고 옆에 앉아 캔 뚜껑을 열었다. 제나가 오려면 멀었는데 얭과 나는 있는 술을 다 비워버릴 기세로 안주도 없이 마셔댔다.
--- p.30쪽
보고 싶다, 제나의 말에 보고 싶다, 얭의 말이 겹쳐지고 보고 싶다, 나의 말도 섞여 들었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보다 늘 우위에 있는 감정은 ‘보고 싶다’였다. 항상 보고싶었다. 보러 가는 길에도, 보고 있을 때에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 p.44~45
친구들하고 너무 붙어 다니는 거 아니냐고 남자친구가 충고 섞인 말을 늘어놓으면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싸우는 건 싫으니까 네가 뭘 알아? 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가끔 아이돌이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웃어주고 말았다. 왜 사냐건, 웃지요. 그런 마음이랄까.
--- p.51
그 뒤 찾아온 1초의 정적. 정적 뒤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루이가 없어도, 실제의 루이가 아니라도 우리는 이렇게 즐거워.
--- p.57
“스물하나의 내가 열아홉의 소년을 만났다. 소년을 보고 떠올린 것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얗고 달콤하고 폭신하기까지 한 궁극의 맛. 소년에게 내가 붙여준 이름은 서주아이스주, 줄여서 주주. 주주는 예쁘고 예쁘고 예뻤다. 나는 주주를 표현해야 할 때면 언어의 한계를 느꼈다. 더 좋은 말, 더 근사한 말, 더 멋진 말로 주주를 이야기하고 싶어서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내가 가진 언어의 서랍은 너무 좁고 얕은데 주주의 아름다움은 지나치게 넓고 깊어서. 그래도 내가 주주를 정말 좋아하게 된 계기는 빛나는 외모가 아닌, 그 너머의 어둠이었다.”
--- p.103~104
“맞아, 그 부분. 아는구나.”
우리는 신나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숨죽여 그 부분을 들었다. 츄파의 나른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노래했다.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는 사이에 키스하지 않을래? 키스하자.’
--- p.176~177
소리 내어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았지만 쓸쓸했고 답답했다. 한 번쯤은 내 말이 소리로 되돌아오고 내 눈빛이 온기로 되돌아오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마음 말고 생각 말고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나를 채웠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혼자 남겨졌을 때 번호 몇 개로 이어질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면 견디는 것이 쉬울 텐데. 그 생각의 끝은 늘 그렇듯 허탈한 웃음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음악을 켜고 멈췄던 청소를 이어갔다. 나의 오빠는 청소하는 나를 위해 열심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 p.208
제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함께 심장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제나도 나도 별일 아닌 것을 아는데, 아는데도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게 그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일지도 몰랐다. 제나는 눈썹의 움직임만으로 희성의 기분까지 알아차렸는데 결국 모르는 사이였다. 말을 하면 들릴 정도의 거리였는데 불러보지도 못했다. 공연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울부짖듯 그렇게 많이 외친 이름이었는데 가까이에 있으니 부를 수가 없었다. 멀리 있을 때 가까움을 느꼈듯이 가까이 있을 때 오히려 멂을 느꼈다.
--- p.224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셋이 있으면 괜찮았다. 넘어지고 엎어져도 덜 부끄러웠고 다시 일어날 힘이 돋아났다. 남들은 하나도 웃지 않을 개그에 말을 보태면서, 깔깔 넘어가면서,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애인과 헤어지고도 할머니를 떠나보내고도 아이돌과 멀어지고도 우리는 함께였다. 이별이 쉼 없이 이어지는 동안 떨어져 나가는 내 살점을 보는 것처럼 애타고 아프고 힘겨웠지만 흔히 하는 말 그대로 내일은 왔다.
--- p.235
한 살 더 먹었지만 나는 연애 대신 달달한 팬질을 다시 시작했다. 거리감에 무력감에 울게 될 걸 알면서도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사실 그들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웠다. 내 일상을 흔들고 현실을 뒤엎으며 생활을 조이는. 나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들을 보고 싶었고 더 가까이로 가고 싶었다. 그들은 별이고 꿈이었다. 꿈 없이 일상에만 갇혀 살아가는 내게 그들은 우주를 건네주었다. 나는 늘 꿈의 언저리를 맴돌고 맴도는 행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내 우주에 불을 켜주었다. 나는 그 흔들리는, 흐릿한 불빛에 의지한 채 걷는다. 사랑하는, 그들에게로.
--- p.267~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