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레이븐 선정 2018 샤 르자 Sharjah 전시 2018 Little Hakka 대상 2018 NY 권리박람회 선정(그림책) 2019 볼로냐 아동도서전 전시 선정 2019 제4회 나미콩쿠르 그랑프리 2019 JUNCEDA 수상 2019 (5월) 세상을 살다보면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처음 거짓말했을 때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 끝내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의 아픔, 부모님이 더 이상 손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났을 때 슬픔의 깊이 등이 그렇지요. 전쟁의 공포와 참상은 과연 어떨까요? 지금까지 인류가 수없이 저질렀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고 또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위, 전쟁 말입니다. 이 책은 전쟁을 마치 전염병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검은 전쟁 바이러스들은 슬금슬금 어디론가 향하더니 불 켜진 창문을 넘어 군복 입은 남자에게 올라탑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 남자는 증오와 악으로 가득한 얼굴을 중세시대 투구로 가리고 제일 먼저 세상의 모든 책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인류의 역사와 철학, 진리와 감정, 낭만적인 이야기와 희망까지 모조리 불태운 남자는 차가운 공장을 가동해서 무기와 병사를 만들고 무차별 공격을 감행합니다. 공격의 목표는 분명하지 않지만 공격 목적은 이 세상의 파멸이 분명해 보입니다. 많은 생명들이 스러지고 전쟁 바이러스들은 또 다른 숙주를 찾아 폐허 위를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면서 끝이 납니다. 책을 덮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침묵뿐입니다. |
‘전쟁은 빠르게 퍼지는 질병처럼 일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첫 문장에서 알아봤다. 이 책, 심상치 않구나.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이어진다. 오죽하면 문장을 모두 여기에 적고 싶을 정도다.
면지의 그림은 마치 다리가 기다란 거미 같다. 그리고 한 장을 더 넘기면 뱀처럼 길게 이어진 줄이 나온다. 면지의 거미 같은 괴생명체를 줌아웃해서 본 모습이다. 어딘가로 빠르게 흘러간다. 그 다음 장에는 더 많은 괴생명체가 모여 더 빠르게 움직인다. 드디어, 목적지를 찾았다. 어느 건물의 불 켜진 창으로 보이는, 지도를 보고 있는 장군이다. 그리고 이 괴생명체는 지도 위로 빠르게 퍼져간다. 이는 곧 전쟁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전쟁은 증오와 야심과 악을 먹고 자란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군상들이 있다. 증오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심 때문이다. 주변의 이익을 위해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은밀히 바라는 군상도 있을 터다. 일본이 한국전쟁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고마워한다잖은가. 무기를 계속 만들고 팔아야 하는 방산업체들을 위해 가끔 희생양을 찾는 강대국도 있다. 야심, 이때 어울리는 단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불안을 조성하는 지도자도 있다. 이때 어울리는 단어 또한 ‘야심’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전쟁은 차갑고 그늘진 아이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한국전쟁,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등등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는지 알고 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의 야심을 위해 아무 죄 없는 젊은이들이. 두 페이지 가득 아무 표정없이 로봇처럼 서 있는 군인들을 보자니 마음이 먹먹하다. 누가 이들에게 이런 희생을 강요했단 말인가.
이 책은 아버지가 글을 쓰고 아들이 그림을 그려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 만한 책이다. 간단명료한 글에 전쟁의 속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야욕과 사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짧은 글 속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충격과 부끄러움과 슬픔을 욱여넣을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압권은 본문의 마지막 장이다. 처음에 나타났던 거미 같기도 한 괴생명체가 폐허더미에서 기어 나와 어딘가로 저벅저벅 이동하는 장면. 자기가 기생했던 숙주가 죽자 또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다. ‘이제 어디 가서 또 전쟁을 일으키지?’라는 음흉한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니콜라이 포포포의 <왜?> 이후 전쟁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책을 만났다.
‘전쟁은 빠르게 퍼지는 질병처럼 일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첫 문장에서 알아봤다. 이 책, 심상치 않구나.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이 이어진다. 오죽하면 문장을 모두 여기에 적고 싶을 정도다.
면지의 그림은 마치 다리가 기다란 거미 같다. 그리고 한 장을 더 넘기면 뱀처럼 길게 이어진 줄이 나온다. 면지의 거미 같은 괴생명체를 줌아웃해서 본 모습이다. 어딘가로 빠르게 흘러간다. 그 다음 장에는 더 많은 괴생명체가 모여 더 빠르게 움직인다. 드디어, 목적지를 찾았다. 어느 건물의 불 켜진 창으로 보이는, 지도를 보고 있는 장군이다. 그리고 이 괴생명체는 지도 위로 빠르게 퍼져간다. 이는 곧 전쟁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전쟁은 증오와 야심과 악을 먹고 자란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군상들이 있다. 증오 때문이기도 하지만 야심 때문이다. 주변의 이익을 위해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나길 은밀히 바라는 군상도 있을 터다. 일본이 한국전쟁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고마워한다잖은가. 무기를 계속 만들고 팔아야 하는 방산업체들을 위해 가끔 희생양을 찾는 강대국도 있다. 야심, 이때 어울리는 단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불안을 조성하는 지도자도 있다. 이때 어울리는 단어 또한 ‘야심’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점이다.
‘전쟁은 차갑고 그늘진 아이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미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한국전쟁,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 등등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는지 알고 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의 야심을 위해 아무 죄 없는 젊은이들이. 두 페이지 가득 아무 표정없이 로봇처럼 서 있는 군인들을 보자니 마음이 먹먹하다. 누가 이들에게 이런 희생을 강요했단 말인가.
이 책은 아버지가 글을 쓰고 아들이 그림을 그려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 만한 책이다. 간단명료한 글에 전쟁의 속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야욕과 사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짧은 글 속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충격과 부끄러움과 슬픔을 욱여넣을 수 있단 말인가. 특히 압권은 본문의 마지막 장이다. 처음에 나타났던 거미 같기도 한 괴생명체가 폐허더미에서 기어 나와 어딘가로 저벅저벅 이동하는 장면. 자기가 기생했던 숙주가 죽자 또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나는 모습이다. ‘이제 어디 가서 또 전쟁을 일으키지?’라는 음흉한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니콜라이 포포포의 <왜?> 이후 전쟁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책을 만났다.
숲노래 그림책
그림책시렁 180
《전쟁》
조제 조르즈 레트리아 글
안드레 레트리아 그림
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
2019.6.25.
우리가 동무라면 서로 싸울 일이 없습니다. 동무이니 그 아이가 싫다는 일이 있으면 안 합니다. 동무라서 우리가 힘든 일이 있으면 멀리하거나 기꺼이 돕습니다. 우리가 이웃이라면 서로 다툴 까닭이 없습니다. 이웃이니 그 집에 없는 살림을 스스럼없이 이바지합니다. 이웃이라서 우리가 넉넉하더라도 그 집에서 우리 살림을 훔치거나 빼앗으려고 달려들지 않아요. 온누리 모든 싸움판이나 다툼마당은 서로 동무도 이웃도 아니기에 벌어집니다. 서로 등을 지려 하니까 싸워요. 서로 마음으로 돌보거나 아낄 뜻이 없으니 다툽니다. 즐겁게 어깨동무하거나 기쁘게 어울리거나 신나게 뛰놀 생각이 있다면, 싸움이나 다툼이란 말은 아예 끼어들 수 없습니다. 《전쟁》은 이 별 곳곳에서 아직 불거지는, 또 남·북녘 사이에서 불거지기도 하는, 게다가 남녘에서조차 골골샅샅 불거진다 싶은 싸움판 이야기를 다룹니다. 총칼을 겨눌 적에만 싸움이 아닙니다. 고단한 동무한테 손을 내밀지 않는 몸짓도 싸움이에요. 탱크와 전투기가 춤출 적에만 싸움이지 않아요. 숲을 밀어내거나 자동차로 골목을 내달리는 짓도 싸움입니다. 사랑이 안 흐르고, 사랑을 안 배우니 싸웁니다. ㅅㄴ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