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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살아남은 자들이 경험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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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5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362g | 128*188*20mm
ISBN13 9788950988500
ISBN10 89509885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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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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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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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함이란 권태나 허무처럼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다. 거기서 전쟁과 살인과 증오와 죽음이 태어나는 것이다.
--- p.12

동생이 태어난 뒤로 저는 갑자기 어른이 됐답니다. 누군가 강제로 제 등을 떠밀어 그런 상태에 밀어 넣은 것이에요. 그랬더니 그동안 제가 결코 시도해보지 않았던 행동과 사고를 하게 됐지요.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윤리적 기준을 이해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수긍하게 됐으니, 이 또한 여덟 살 차이 나는 쌍둥이 남동생의 존재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이었지요.
--- p.19

머리 위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의 역사에 대해 고작 1퍼센트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망원경을 통해 우주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무력한 개인과 광대무변한 신이 아닐까요? 인간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암흑과 고요를 어떤 자는 부처라고 일컫고 어떤 자는 여호와, 어떤 자는 알라, 그리고 어떤 자는 시바라고 일컫는 게 분명합니다. 절대적인 것에 편의적으로나마 이름마저 붙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조차 없으니까요. 인간은 늘 대상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한다고 배웠습니다.
--- p.46

비의 기세가 여전한데도 노인은 옷깃 한번 추스르지 않고 태연하게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자신의 눈엔 빗줄기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 또한 비에 젖지 않는 것처럼. 페루의 새들처럼.
--- p.72

백주의 한복판에서 참, 괴이한 광경을 보았어. 갑자기 흑단나무 널보다도 더 검고 납작한 그림자가 일어나더니? 바람 한 점 없었으니까, 더 가볍고 마른 것들에게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했겠지? 빈 소주병보다 창백한 어떤 남자의 멱살을 붙들고 자신이 누워 있었던 짓무른 자리 위로 밀쳐내는 거야. 그림자는 남자의 호적상 나이보다도 더 오래 누워 있었다고 투덜거렸어. 그러니까 그림자와 남자는 견고한 스위치처럼 발목을 같이 쓰고 있어서 한쪽이 일어서면 한쪽이 쓰러지게 되어 있나 봐. 생은 좁고 무른 존재의 이유에 붙박여서 앞뒤로 불안하게 흔들리지.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이유가 있겠어?
--- p.72

‘재앙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모든 재난은 반드시 그것이 벌어질 전조를 알린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전조를 파악해서 재난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데, 그 능력은 대개 선천적으로 부여받지만 후천적으로 취득할 수도 있다고 한다.
--- p.80

그녀는 마치 그 시간에 태어났거나 죽을 존재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눈까지 감았다.
그리고 존재 전체의 무게를 하이힐의 높은 굽에 싣고 팽이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천천히 중심을 잡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마천루는 모두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거대한 아날로그시계 하나가 세상의 중심에서 지구를 돌리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 그 사이에 우주 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서 있었다.
--- p.92

충분히 차이를 짐작하시겠지만, 유품이란 유산을 제외한 부스러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에게 재산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저희에겐 유품이지요.
저희는 유품을 처리합니다.
죽은 자의 몸과 뼈도 유품에 해당합니다.
--- p.101

그녀는 죽은 자처럼 사흘을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고 골방에 박혀 어둠 속에서 잠만 잤다. 그리고 초저녁쯤 깨어나 마치 사흘 만에 갓난아이에서 어른이 된 것처럼, 또는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결정한 것처럼, 주위의 음식을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먹어댔다. 그녀는 먹는 동안 잠을 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꾸준히 화장실을 드나들며 마치 변태를 시작한 뱀처럼 내장을 반복해서 비웠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탈진 상태가 되어 밤을 맞이했다. 그녀는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잠 속으로 들어가 화석이 됐다.
--- p.110

히틀러를 포함한 모든 독재자들의 주변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동조자가 그것이다. 세 부류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조자들은 대체로 정체가 모호하고 자신의 의견을 거의 말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역사책에서도 그들이 전면으로 나타나는 페이지를 찾을 순 없다. 늘 가해자와 피해자만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며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하지만 정작 모든 역사에서 대부분의 악행을 저지르고 반성 대신 화해를 강요하는 자들이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동조자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너무 익히 알려진 나머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 pp.119-220

낯익은 것들로부터 확실히 멀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내 머릿속에서 남미라는 단어를 발견해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그 거대한 고래 한 마리가 머릿속으로 헤엄쳐 들어온 이상 그걸 대체할 수 있는 생각을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스스로를 설득할 이유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거부할 의사가 없는 이상 계획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계획을 지지해줄 동지나 근거를 찾을 목적으로 나는 그 서점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 pp.107-208

호랑이와 흑인 소녀와, 소녀의 스케치북에서 빠져나간 동물들이 어둠 속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다면 굳이 불을 밝혀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대개 진실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우연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 p.257

그녀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마리 로랑생을 위로했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폴리네르를 증오하고 싶진 않았다. 증오는 인과보다 목적이 더 치명적인 법이니까. 대신 그녀는 자신의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센강을 따라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어느 곳에 도착할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 p.274

나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굳게 닫힌 문은 침묵처럼 틈 없이 단단했고 어둠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문을 두드리는 순간 모든 기억이 산산이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문 안쪽이 스스로 밝아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딱히 그곳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딱히 찾아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젊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의 완벽한 알리바이가 됐으므로 몇 차례의 사랑에서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누구의 삶이든지 간에 그것을 짊어지고 걸어간 것은 기묘한 상처들이었고 그것들이 쓰러진 곳에서 잠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니까.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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